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시가평가제가 위기 주범? 글쎄요!

최종학 | 33호 (2009년 5월 Issue 2)
클린턴 정권의 명재상으로 불렸던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은 2009년 1월 말 한 토론회에 참석해 ‘시가평가(mark-to-market) 회계제도’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루빈은 시가평가제도가 세계 금융위기를 야기한 원인 중 하나라고 주장했다. 특히 ‘자산 가격의 심각한 악순환(vicious circle of asset value)을 가져오기 때문에 시가평가제도를 당장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많은 금융기관들도 시가평가제도를 유예하거나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시가평가제도가 없었다면 이번 금융위기가 일어나지 않았거나, 일어났더라도 미풍에 그쳤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다.
 
유럽연합(EU) 15개국 정상회의가 시가평가제도 개선을 촉구한 직후인 2008년 10월,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는 국제회계기준(IFRS)을 개정해 시가평가의 다른 이름인 공정가치(fair value) 회계처리 적용을 완화했다. 이후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도 복잡한 금융상품에 대한 가치평가 기준 개선 방안을 연구하기로 했다.
 
이 회의에 참석한 한국은 주도적으로 회계기준 변경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겠다고 밝혔다. IASB 모임에도 더욱 적극적으로 참가해 한국의 입장을 향후 회계기준 개정에 반영하겠다고 덧붙였다. 심지어 자발적으로 각 참가국이 나눠서 지불하는 분담금 중 한국의 분량을 늘리겠다고도 공표했다.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발언권을 높이려는 의도다.
 
한국은 현재 독자적 회계기준을 사용하고 있으나, 2012년부터는 국제회계기준을 그대로 사용할 예정이다. 하지만 시가평가제도 적용 완화에 관한 사안은 국제회계기준을 신속히 도입했다. 금융감독원은 2008년 결산부터 기업들이 시가평가 완화 제도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미국 의회도 2008년 말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시가평가제도의 효과와 문제점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도록 하고, 시가평가제도를 바꿀 수 있는 권한까지 부여했다. 이에 따라 재무회계기준위원회(Financial Accounting Standards Board·FASB)는 2009년 3월 말 시가평가제도 완화안을 발표했다.
 
금융기관들의 자산 투매 이유
그렇다면 도대체 왜 시가평가제도가 비난받는지 살펴보자. 사실 회계처리 방법이 금융위기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상당한 과장이다. 필자는 금융위기의 주범으로 비난받는 월가 금융기관들이 다른 희생양을 찾기 위해 회계처리 방법을 언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997년 IMF 금융위기가 한국을 덮쳤을 때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했던 여야 정치권이 기업들에 책임을 떠넘긴 사례와 마찬가지다. 필자가 생각하는 이번 금융위기의 주원인은 단기 성과에만 입각한 성과평가체계다.(DBR 26호 회계를 통해 본 세상 ‘눈앞의 이익만 본 평가가 위기 초래’ 참조)
 
물론 시가평가제도가 금융위기의 신속한 전파 및 악화에 중요한 역할을 하긴 했다. 금융위기가 시작되자 많은 금융기관들이 보유하고 있던 자산의 가치가 급락했다. 전통적 투자 수단인 주식 및 채권 가치뿐 아니라 자산유동화증권(ABS), 신용부도스와프(CDS) 등 파생상품 가치도 급전직하했다. 이 때문에 금융기관, 특히 상업은행이 아닌 투자은행 업계는 막대한 미(未)실현 평가 손실을 입었고, 그 결과 엄청난 당기 순손실을 기록하고 말았다.

이때 투매가 일어난 이유는 3가지다. 첫째, 은행들은 국제결제은행(BIS)이 정한 은행의 건전성 규제를 위한 자기자본비율(BIS 비율)을 최소 8% 이상으로 유지해야 한다. BIS 비율은 자본을 자산으로 나눈 비율이다. BIS 비율을 계산할 때는 전체 자산 금액을 분모로 사용하지 않고, 자산의 위험 정도에 따라 가중치를 부여해 계산한다. 즉 위험가중치 조정 자산 금액을 분모로 사용한다. 물론 자본도 대차대조표에 보고된 자본 수치가 아니라 약간의 조정이 포함된다.
 
그런데 이번 금융위기의 주범인 파생상품의 투자 위험은 매우 높기 때문에, BIS 비율 계산 시 거의 자산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 즉 현금을 주고 파생상품을 구입할 때 BIS 비율을 계산하면, 현금을 그대로 보유했을 때보다 낮은 BIS 비율이 나온다. 따라서 BIS 비율을 일정 수준 이상 유지해야 하는 금융기관들은 파생상품의 매각을 원했다. 파생상품을 보유하면 할수록 은행은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전에는 파생상품의 위험이 이렇게 클 것으로 예상한 사람이 없었으므로, 투자 목적으로 보유했던 파생상품을 팔 이유가 거의 없었다.
 
둘째, 금융당국의 규제다. 금융기관은 신용등급이 일정 수준 이상인 증권만을 보유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신용등급 BBB+ 이상을 투자 적격 등급, 그 미만을 투자 부적격 등급이라고 평가한다. 금융위기 전 많은 금융기관들은 모기지 대출금을 담보로 발행한 주택담보부증권(MBS)을 보유하고 있었다. 금융기관은 보유 채권의 신용등급이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면 무조건 해당 증권을 매각해야 한다. 금융위기 후 많은 증권, 특히 MBS의 가격이 폭락하고 신용등급도 떨어졌으므로 많은 금융기관들이 규정에 의해 보유했던 MBS를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유동성 문제다. 금융기관의 경영 성과가 나빠지자 투자자들은 만기가 돌아온 상품을 재투자하지 않고 자금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현금이 부족해져 부도 위기에 몰린 금융기관들은 자산을 매각해 현금을 마련하려고 했다.
 
이 3가지 이유 때문에 금융기관들은 보유 중인 파생상품이나 채권을 매각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갑자기 거의 모든 금융기관들이 자산을 매각하려고 나섰지만, 이를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사려는 사람이 없자 자산 가격이 정상보다 더욱 낮은 수준까지 떨어졌고, 자산 가격 하락의 악순환이 시작됐다.
 

자산 가격 하락의 악순환과 시가평가제도
시가평가제도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시가평가제도가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는’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자산 가격이 계속 급락하자 금융기관들은 보유 자산을 형편없이 떨어진 가격으로 회계장부에 기록해야 했다. 시가평가제도 때문이다. 이후 금융기관의 평가 손실은 점점 늘어났고, 재무제표에 표시된 금융기관의 경영 성과와 자산 건전성 또한 더욱 나빠졌다. 때문에 이전보다 더 많은 자산을 팔아야만 했다.
 
이에 매각을 기다리는 더 많은 자산이 시장에 매물로 등장했다. 가뜩이나 자산을 사겠다는 수요는 거의 없는데 매물만 자꾸 늘어나니, 이들 자산의 시장가격은 더욱 떨어졌다. 사실상 자산 가치가 휴지 조각으로 전락했다.
 
즉 시장가격과 회계처리 방법이 서로 톱니처럼 맞물려 상황을 점점 악화시킨 셈이다. 바로 루빈 전 재무장관이 언급한 ‘자산 가격의 악순환’이다. 선진국 금융기관이 2008년 4분기에만 대부분 수천억 달러의 엄청난 손실을 기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때문에 회계학자들은 과거 수십 년간 취득원가제도와 시가평가제도 중 어떤 방법이 더 우수한지에 대해 끊임없는 논쟁을 되풀이하고 있다. 취득원가제도는 자산의 최초 구입 가격을 계속 회계장부에 기록하거나, 구입 가격에서 감가상각 충당금 누계액을 뺀 잔액을 기록하는 방법이다. 현재까지 많은 사람들은 대부분의 자산을 취득원가제도에 근거해 기록하고 있다.
 
취득원가제도 옹호론자들은 2007년까지 세계 주식 가격이 올라갈 때는 금융기관들이 막대한 평가 이익을 기록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익을 기록할 때는 아무 말이 없다가, 손실을 기록하자 문제가 있다는 발언이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오는 사실 자체가 시가평가제도의 맹점을 보여준다는 비판이다. 이 말은 맞다. 시가평가제도는 이익이 생길 때 이익을 더욱 커 보이게 하고, 손실이 발생할 때 손실을 더욱 커 보이게 한다. 즉 기업 성과의 변동성을 확대시킨다는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취득원가제도에도 문제점은 있다. 세계 경제 구조가 점점 복잡해지고 경영 환경도 급변하는 21세기에 자산이나 부채의 시장가치가 급변하는데도 회계장부에 취득원가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 또한 완벽히 정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취득원가제도를 사용할 때는 회계정보의 적시성과 유용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결국 회계정보의 신뢰성(취득원가제)과 적시성 및 유용성(시가평가제) 중 어떤 점이 더 중요하느냐를 두고 오랜 논란이 있었던 셈이다. 최근 10년 동안에는 적시성과 유용성을 중시하는 의견이 좀더 우세를 보여왔다. 이에 따라 시가평가제도를 회계처리 기준으로 사용하는 사례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시가평가제도는 과연 공정한 가격을 사용할까
그렇지만 시가평가를 말이 아니라 실제로 구현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자산이나 부채의 공정가격을 어떻게 평가해야 객관적이고 신뢰할 만하냐에 대해 그 누가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시장에 상장된 주식처럼 시가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하지만 비상장주식이나, 주식처럼 시장 개장과 마감 시간이 명확하지 않은 채권과 외환 및 복잡한 구조를 지닌 파생상품의 시가를 평가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겠는가.
 
비상장주식인 삼성에버랜드나 삼성생명의 주식 가치를 둘러싼 논란을 보자. 에버랜드 주식에 대해 시민단체에서는 상당히 높은 가격을 주장하는 반면, 삼성이 의뢰한 평가기관에서는 훨씬 낮은 가격이 공정 가치라고 평가했다. 삼성자동차의 부채에 대한 담보로 삼성그룹이 금융기관들에 제공한 삼성생명 주식은 반대 사례다. 삼성 측이 평가기관에 의뢰해 평가한 금액이 금융기관이 주장하는 공정 가치보다 더 높다. 비상장주식은 거의 거래가 이뤄지지 않고, 거래가 이뤄져도 거래량이 매우 미미하다. 그 거래 역시 경영권 이전 등의 특수 상황에서 특수자가 거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거래 가격이 공정가격이라고 판단하기도 힘들다.
 
상대적으로 평가가 쉬운 주식의 가치 평가도 이렇듯 어렵다. 때문에 주식보다 평가하기 더 어려운 채권, 외환, 파생상품의 공정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채권은 발행 기업의 파산 위험이 얼마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진다. 신용등급에 따라 가치를 평가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겠지만, 현재 문제로 드러난 대부분의 금융상품들이 금융위기 직전까지도 AA급 이상의 최우수 등급을 받았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신용등급 자체도 얼마나 믿을 수 없는 수치인지 이해할 것이다.
 
신용평가 회사들은 좋은 신용등급을 줘야만 해당 기업을 고객으로 확보해 매출을 올릴 수 있다. 자신이 평가해야 할 대상으로부터 평가 수수료를 받아야만 먹고살 수 있는 기형적 수익 구조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엄밀히 말해 신용평가 회사에는 채권 등급을 철저히 평가하고 신용등급을 엄격히 부여할 의무가 별로 없다. 금융위기가 일어나자 신용평가 회사의 간부가 “우리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탄식한 이유다.
 
복잡한 파생상품에 대한 정확한 가치평가는 더더욱 어렵다. 파생상품은 수학이나 통계학 박사 이상의 인력들이 여러 가지 복잡하고 난해한 공식을 사용해 설계한 상품이다. 그러니 일반 기업의 재무 담당자나 회계사가 어떻게 이 파생상품의 정확한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겠는가. 향후 IASB나 FASB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예의 주시해야하는 이유다.
 
회계제도의 개선인가 개악인가
시가평가제도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방법은 2가지다. 첫째, 일시적 투매가 벌어져 시가가 거의 제로(0) 수준으로 떨어지거나 시가를 평가할 수 없을 정도로 거래 자체가 중단된 자산은 시가로 평가하지 않는다. 대신 회사가 합리적이라고 평가한 가격으로 회계장부에 기록할 수 있다. 둘째, 자산의 분류 기준을 변경해 일부 평가 손실을 당기순이익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는다. 대신 직접 자본에서 빼서 기타 포괄 손익계산에만 포함시킨다.
 
둘째는 자산 가치의 변동이 손익계산서는 아니라도 최소한 대차대조표에는 등장하도록 한 방식이다. 회계 지식을 갖춘 사람이 열심히 재무제표를 살펴본다면 최소한 그 수치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회계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이 방법에 속을 수도 있다.
 
만약 상당한 평가 손실을 입은 기업이 자산 분류 기준을 변경해 이 손실을 당기순이익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가정해보자. 이 기업의 투자자가 당기순이익 숫자만 보고 투자 결정을 내리거나, 금융기관의 대출 담당자가 대출 의사결정을 내린다면 큰 손실을 입을 수 있다. 어쨌든 금융감독원은 이미 이 방법을 사용하도록 허락했다.
 
첫 번째 방법은 두 번째 방법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좋은 의미로 해석하면, 첫 번째 방법의 골자는 기업 경영자가 자신의 양심에 따라 자산 가치를 평가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나쁜 의미로 해석하면, 경영자가 자의적으로 자산 가치를 평가하도록 허용한 셈이다. 이 상황에서는 설사 회계 전문가라 해도 이 수치의 신뢰성을 확인할 방법이 전혀 없다.
 
회계학계에서는 이 방법을 시가평가(mark-to-market)에 비유해 ‘마음대로 평가(mark-to-myth)’라고 비꼬기도 한다. 원래 규정의 뜻은 ‘가치평가 모형을 사용한 평가(mark-to-model)’다. 하지만 모형 적용에 필요한 여러 수치를 기업이 자의적으로 선택할 수 있기에 비꼬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기업 투명성을 현저히 떨어뜨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필자는 현재와 같은 위기 상황이 아니라면 이 방법을 절대 허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각국 정부가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짜낸 고육지책이라는 점은 필자도 인정한다. 하지만 아무도 재무제표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대공황 때처럼 자본시장 자체가 완전히 멈춰버리는 극단적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결국 원론적이기는 하지만 투자자, 기업, 경영자 모두 회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서로 다른 회계처리 방법을 사용할 때 나타나는 회계 숫자의 의미 차이를 간파할 실력을 갖추는 수밖에 없다.
 
금융위기의 시작과 전개에 관해 궁금한 독자는 필자의 동료 교수인 서울대 최혁 교수의 저서 <2008 글로벌 금융위기>를 참고하길 바란다. 이 책은 2008년 9월 리먼 브러더스 파산부터 12월까지 3개월 동안 일어난 사건들의 내용과 시사점 등을 담고 있다. 금융 전문가가 아니라도 현재의 금융위기가 어떻게 시작되고 전개됐는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친절한 설명을 곁들인 책이다. 최근 언론 경제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복잡한 재무 및 회계 용어에 대해서도 간결한 설명을 덧붙였으므로 좋은 참고 서적이 될 듯하다.
  • 최종학 최종학 |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필자는 서울대 경영대학 학사와 석사를 거쳐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회계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홍콩과기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우수강의상과 우수연구상을 다수 수상하는 등 활발한 강의 및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는 『숫자로 경영하라』 시리즈 1, 2, 3, 4, 5권과 『재무제표분석과 기업가치평가』, 수필집 『잠시 멈추고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acchoi@snu.ac.kr
    이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