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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투자자가 기업 투명성 높인다고?

최종학 | 29호 (2009년 3월 Issue 2)
2008년 9월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 서거 10주기 추도식 행사가 열렸다. 연단에 선 최태원 회장은 행사에 참석한 손길승 명예회장 및 3000여 명의 임직원을 향해 갑자기 큰절을 올려 모두를 당황케 했다. 최태원 회장은 “분식회계 및 소버린 사태로 힘겨웠던 SK그룹이 지금의 자리까지 온 것은 모두 전·현직 임직원 덕분”이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최태원 회장이 창사 이래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다고 회고한 SK그룹 분식회계 및 소버린 사태는 무엇일까. 사건은 1997년 IMF 외환위기 직후에 시작되었다. 외환위기로 막대한 타격을 입은 상당수 국내 은행 및 증권회사들은 부실 금융기관으로 지정돼 퇴출 위기에 몰렸다.
 
이 중에는 SK증권도 속해 있었다. 이때 계열사인 SK증권을 구제하기 위해 SK그룹과 JP모건이 이면계약을 체결했다. 겉으로는 JP모건이 SK증권의 장래성을 보고 실제 가치보다 비싼 가격으로 SK증권의 유상증자에 참여하는 형식이었지만, 실제로는 JP모건이 유상증자로 입을 손실을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이 떠맡아주기로 한 것이다.
 
당시 한국은 달러 부족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정부는 외국 자금을 유치해 증자할 경우 부실 증권사를 퇴출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때문에 SK그룹은 SK증권의 퇴출을 막기 위해 이런 편법을 동원했다. 이 이면계약은 계약이 체결된 1999년 당시에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덕분에 증자에 성공한 SK증권은 퇴출 대상에서 벗어나 살아남았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불과 4년 만인 2003년 이 비밀은 만천하에 드러났다. 모 시민단체의 고발에 이어 검찰이 수사에 착수하자마자 SK글로벌뿐 아니라 SK그룹 전체 계열사의 주가가 급락했다.
 
이때 모나코 국적의 사모펀드 소버린 자산운용이 순식간에 SK㈜ 주식의 14.99%를 1800억 원에 매집했다. 이로 인해 SK그룹은 소버린과의 치열한 경영권 분쟁에 휩싸였다. 소버린이 최태원 회장 등 분식회계에 연루된 경영진의 퇴진과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하며 전방위 압박에 나섰기 때문이다. SK㈜는 SK그룹 전체의 지주회사 역할을 했으므로, SK㈜의 주인이 바뀌면 SK그룹 전체의 주인이 바뀔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공개된 SK증권 이면계약의 비밀
소버린은 당시 SK㈜ 주식을 더 많이 살 수 있었지만 14.99%의 지분만을 구입했다. 소버린이 14.99%를 초과해 15% 이상의 SK㈜ 지분을 보유할 경우, 전기통신사업법상 SK㈜가 SK텔레콤의 ‘외국인’ 주주로 바뀌기 때문이다. 당시 SK㈜는 SK텔레콤 지분을 21.5% 보유하고 있었다. 전기통신법에 따르면, SK텔레콤의 모회사 SK㈜의 주주 구성에서 단일 외국인(소버린) 지분이 15% 이상이 되면 SK㈜ 자체를 외국인 주주로 해석해 SK㈜가 보유한 SK텔레콤 지분 21.5%를 모두 외국인 지분으로 분류해야 한다.
 
소버린은 사전에 국내 모 대형 로펌에 SK㈜ 주식 매입에 관해 상세한 자문을 얻었다. 그 결과 법의 규제를 받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구입할 수 있는 최대 지분 비율이 15% 미만이라는 점을 파악했다. 이처럼 소버린은 사전에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오랜 기간 동안 SK㈜ 주식 매입을 준비해왔다. 단지 SK㈜의 주가가 단기간에 급락해 가격 메리트가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1800억 원이라는 거액의 투자를 즉각 결정했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소버린의 공격과 SK의 대응
소버린이 공격을 계속해오자 SK그룹은 비상 사태에 돌입했다. 소버린은 최태원 회장의 해임을 거듭 요구했다. 최 회장이 퇴진하면 SK그룹을 인수해 선진 경영의 모범을 보이겠다며 주주총회에서의 표 대결도 선언했다. SK그룹의 대주주보다 소버린의 주식 총수가 더 많은 상황이라 당시 SK그룹 직원들은 ‘어느 날 출근했더니 갑자기 회사가 외국계 기업으로 바뀌었다’는 자조 섞인 농담을 하기도 했다.
 
소버린에 대항하기 위해 SK그룹은 국내 소액주주들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면 소액주주들을 만족시켜야 했고, 주가 부양 정책을 내놓아야만 했다. 그 결과 단기적으로 과대 폭락했던 SK그룹의 주가는 당연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소액주주의 도움을 얻은 SK그룹 경영진은 주주총회에서 소버린의 도전을 힘겹게 물리칠 수 있었다.
 
SK그룹의 경영권을 인수하겠다던 소버린은 2005년 7월 주식 매입 불과 2년 만에 주식을 모두 매각하고 한국 시장에서 철수해버렸다. 1800억 원을 투자했던 소버린은 무려 8000억 원 정도의 시세차익을 얻었다. 수익률이 400%를 넘은 것이다. 게다가 허술한 국내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필자는 이 기법도 국내 모 로펌이 가르쳐준 것인지 궁금할 따름이다. 외국 자본을 차별하자는 뜻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외국 자본이건 국내 자본이건 소득을 얻었다면 그에 대한 세금을 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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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학

    최종학acchoi@snu.ac.kr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

    최종학 교수는 서울대 경영대학 학사와 석사를 거쳐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회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홍콩 과기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우수강의상과 우수연구상을 다수 수상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숫자로 경영하라』 시리즈 1, 2, 3, 4권과 『재무제표 분석과 기업 가치평가』 『사례와 함께하는 회계원리』, 수필집 『잠시 멈추고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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