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SE
환경보호기금, ‘비용최소화’한 거래제도 제안
정치권은 물론 다른 환경단체들까지 비난 일색
지난 호 DBR에서는 청정대기법이 제정된 1970년부터 1988년까지 진행된 산성비 문제 해결을 위한 청정대기법 입법 협상 사례에 대해 살펴보았다. 1989년 청정대기법 수정안은 과연 의회를 통과할 수 있었을까. 대부분의 환경단체들은 버드-미첼 타협안과 비슷한 환경 법안의 제정만이 해결책이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전국청정대기연대 멤버인 환경보호기금(EDF, Environmental Defense Fund)만이 시장 유인을 활용해야 효과적으로 환경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1988년 12월 정권 인수팀의 보이든 그레이는 EDF 사무총장인 프레드 크럽을 백악관으로 초청, 새 정부를 위해 시장을 기반으로 한 산성비 감축 계획 제안을 요청했다. 연방환경청도 배출권거래의 시장 논리를 받아들이고 있었지만 1980년대에 시도된 배출권 거래시장, 즉 위스콘신 폭스 강의 수질오염 사례나 휘발유·납 성분 규제 사례의 운용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당시에는 아직도 환경 문제를 최우선시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환경 규제 준수 비용을 최소화하면서 경제 성장을 우선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강했다.
물론 시장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아이디어가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경제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공해 감축을 위한 한계 비용이 발전소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무시한 획일적인 규제가 경제적으로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1920년대에 프랑스 경제학자 피구는 부정적 외부효과(Negative Externalities)로 알려진 공해를 효과적으로 막으려면 공해 물질이 야기한 한계 환경파괴 손해와 동등한 세금을 부과하면 된다고 밝혔다. 이론적으로 공해 감축을 위한 한계 비용이 높은 발전소가 상대적으로 한계 비용이 낮은 발전소로부터 배출권을 살 수 있는 배출권 거래시장이 움직이면 감축 총량이 일정하더라도 전체 비용은 훨씬 감소한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EDF의 배출권 거래계획안, 거센 반발 직면… “아이디어가 아니라 실행력이 문제”
1988년 11월 아버지 부시가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자마자 공화당 정권 인수팀은 즉시 환경팀을 구성했다. 인수팀은 12월 하순에 존경받는 환경운동가 윌리엄 라일리를 연방환경청(EPA) 수장으로 뽑았다. 라일리는 중도적 환경단체인 자연보호재단(Conservation Foundation)의 이사장이었으며, 기업과의 관계도 좋은 편이었다.
라일리와 정권인수팀은 선거 캠페인 멤버인 전 미시간 전력위원회 위원 윌리엄 로젠버그를 연방환경청 대기국장으로 선택한다. 1989년 2월 1일 연방환경청에 부임한 로젠버그 대기국장은 환경 전문 관료그룹을 리드하는 연방환경청 대기국 정책실장 로버트 브레너를 만난다. 브레너는 청정대기 문제와 산성비 문제를 해결해 나갈 대안에 대해 상세한 브리핑을 했다.
1989년 2월 초 EDF는 배출권 거래계획안을 발표했다. 계획안의 골자는 연방 정부가 모든 석탄연소 화력발전소마다 아황산가스(SO2) 배출 한도를 부여하고 3년마다 단계별로 이를 축소해 10년 뒤에는 1200만 톤의 SO2 감축을 달성한다는 것이었다. 발전소들은 집진기(스크러버) 설치, 저유황석탄으로의 전환, 한계 비용이 낮은 발전소 SO2 감축 권리 구입 등 여러 대안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다. 다만 지역 대기의 청정도 기준을 초과하는 거래는 불가능했다.
그러나 EDF의 계획안에 대한 반응은 차가웠다. 연방환경청 대기국 산성비 과장인 브라이언 맥린은 오랫동안 규제 산업으로 존재해온 전력업계에 기업가 정신을 기대하긴 어렵다며 이 계획이 지나치게 복잡하다고 비판했다. 지난 10년간 가공 거래와 나쁜 거래의 경험을 한 대기국과 환경론자들 사이에도 부정적 시각이 강했다. 전국청정대기연대에서도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배출권 거래의 경제학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편법이 통하지 않도록 만드는 구체적인 실행과 법적 강제 집행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많은 환경단체는 버드-미첼 타협안 같은 통제와 명령 시스템보다 오히려 EDF 스타일의 배출권 거래시장 계획에 대해 더욱 비판적인 태도를 보였다. 전국청정대기연대의 아이어즈 의장은 “아이디어가 없어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실행을 할 수 없어 문제”라고 비판했다.
범정부 환경작업그룹 가동… 이해관계 조정은 난항
EDF가 시장 기반 산성비 감축계획을 발표한 것과 비슷한 시점인 1989년 2월 9일 상·하원 합동 연설에서 부시 대통령은 “우리가 숨 쉬는 대기는 우리가 보호해야 한다. 산성비 문제에 관한 한 더 이상 연구만 하고 있을 수 없다. 이제 행동에 옮길 때가 됐다”며 새로운 청정대기법 수정안을 의회에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다음날 부시 대통령은 로저 포터 경제 및 국내정책 수석보좌관을 불러 이 일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행정부 내에서조차 연방환경청과 에너지청의 입장이 달랐기 때문에 중립 인물인 포터에게 일을 맡긴 것이다. 포터는 즉시 연방환경청장 라일리, 에너지청 제임즈 왓킨스 장관, 예산부(OMB), 백악관 경제자문위(CEA), 백악관 수석보좌관실, 백악관 정책개발실 등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범정부 환경작업그룹을 가동시킨다.
포터는 환경작업그룹 가동 초기에 두 가지 중요한 전략적 의사 결정을 내렸다. 첫째, 백악관 내에서 만들어진 정책안으로 의회, 산업계, 환경그룹을 설득하는 대신 의회그룹, 환경단체, 전력회사 등 관련 이해관계자 모두를 포함시킨 공개적이고도 공격적인 캠페인을 펼치기로 했다. 둘째, 골수 환경보호론자이자 언론과 친분이 두텁고 행정부 내에서는 ‘싸움닭’으로 알려진 브레너 대기국 정책실장 및 그의 상사 로젠버그 대기국장을 정책개발 단계에 참여시켰다. 포터의 두 번째 결정에 대해 많은 사람이 “닭장 속에 여우를 끌어들인 꼴”이라고 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들은 1989년 3월부터 5개월 동안 SO2 배출 감축이라는 대통령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방법과 과정을 설계했다. 작업은 만만치 않았다. 환경보호론자들은 계속해서 최소 1000만 톤, 최대 1200만 톤의 SO2 감축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브레너와 로젠버그 등 환경 전문 관료들은 대체로 700만 톤 이상 감축하려면 비용이 크게 증가한다고 우려했다. 게다가 SO2의 심각성에 대한 광범위한 인식에도 불구하고 그 피해에 대한 과학적 근거가 확실치 않으며, 고비용성 대규모 감축의 혜택조차 불확실하다고 생각하는 환경 전문 관료들도 있었다. 이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정치적 및 환경적 이익과 새로운 규제에 필요한 비용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비용의 경우 1980년 기준으로 SO2 1000만 톤을 감축하려 할 때 700만 톤 감축 비용의 두 배가 필요하다는 분석이 나왔다. 환경작업그룹에서는 700만 톤 감축안이 가장 경제적이라는 주장이 팽배했다.
그러나 라일리 연방환경청장은 대통령이 1000만 톤 감축을 제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환경론자들도 1000만 톤 이상을 주장했고 캐나다의 브라이언 멀로니 총리도 같은 입장이었다. 라일리 청장은 “환경론자들과 캐나다 국민의 지원도 받지 못하는 제안이라면 구태여 전력업계의 수많은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운 환경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킬 필요가 있을까”라고 말했다. 그러나 라일리의 반대자들은 “어차피 환경론자들은 공화당 출신 대통령을 좋아할 리 없다. 그렇게 비싼 감축안을 제안함으로써 강력한 이해관계자 집단을 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느냐”고 맞섰다.
1989년 여름, 대통령을 포함한 부시 행정부의 최고 정책결정자들은 어떻게 이 문제에 대한 의사결정을 내렸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