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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Case Study: 관광 불모지서 ‘재생의 아이콘’으로

“ 스토리가 있는 폐광” 모두가 열광 역발상으로 기적을 캔 ‘광명동굴’

조진서 | 226호 (2017년 6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관광 불모지였던 베드타운 광명시는 2011년 광명동굴을 개장해 수도권에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2016년 140만 명의 유료 관람객이 이곳을 찾았다. 폐광을 단장해 테마파크로 성공한 광명동굴의 비결은 다음과 같다.

1. 최소 요구 조건부터 맞춘 개발 계획: 시청의 한계를 파악하고 되는 일부터 차근차근 진행
2. 린스타트업 같은 공무원 조직: 10인 규모의 별동대 조직이 동굴로 출퇴근하며 5∼6년째 ‘빠른 실험-피드백 수집-개선’을 끊임없이 반복
3. 핵심/비핵심 업무영역의 분리: 콘텐츠 기획과 운영은 시청에서 전담하고 기타 부문은 외부기관들과의 파트너십을 적극 추진
4. 브랜드 네이밍: 누구나 기억하고 부르기 쉬운 이름을 선택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조규원(홍익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초여름인데 하얀 입김이 나왔다. 광명동굴 지하층은 시원한 정도를 넘어 추운 느낌마저 들었다. 사방 단단한 바위와 지하수 폭포에서 나오는 냉기 때문이었다. 왜 이 동굴이 수도권 서남부 관광명소가 됐는지 알 것 같았다. 화강암벽의 거친 질감에 은은한 조명이 잘 어울렸다.

광명동굴 개장 이전의 광명시는 관광과는 큰 인연이 없는 동네였다. 서울 근교 베드타운 중 하나, 기아자동차 소하리 공장 소재지, 비교적 최근에는 이케아 매장이 들어섰다는 것 정도가 외부인들이 광명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였다. 광명시를 찾은 관광객은 연간 수천 명이었다고 하지만 딱히 관광지라 할 만한 것이 없으니 숫자를 집계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2011년 시험적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2015년부터 입장료를 받기 시작한 광명동굴은 2016년 142만 명의 유료 방문객을 받았다. 경기도 내 내로라하는 관광지인 캐리비안베이(142만 명), 한국민속촌(149만 명) 등에 뒤지지 않는 수치다. 2017년은 아예 200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 아직 성수기가 시작하지 않았지만 동굴 안팎은 평일에도 내외국인 관광객으로 붐빈다. 한여름에는 주차장 진입에만 수시간 걸렸다는 증언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어떻게 서울 근교에 길이 8㎞에 달하는 동굴이 있을 수 있을까? 왜 최근에야 각광을 받게 된 것일까? 사실 광명동굴은 천연동굴이 아니다. 일제시대부터 60여 년에 걸쳐 인간의 힘으로 꾸준히 파 들어간 금속 광산이다. 1970년대 광산이 문을 닫고 40년 가까이 버려졌지만 광명시청 공무원들의 지혜와 열정으로 새 삶을 찾았다. 광명동굴은 2017년 유료 개장 2년 만에 한국관광공사가 ‘한국 100대 관광지’로 선정했다. 또 시민에게 400여 개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재생의 아이콘’으로 주목받고 있는 광명동굴 개발 사례를 분석한다.


관광 불모지의 버려진 광산

광명동굴의 옛 이름은 시흥광산이다. 한일합방 2년 후인 1912년 일본인에 의해 ‘시흥 동(銅) 광산’이 설립됐다는 기록이 있으니 100살이 넘었다. 광산은 광명시 남쪽 외곽에 있는 가학산 중턱에서 시작한다. 산을 동서로 관통하는 갱도가 척추 역할을 하며 거기서부터 60여 년 동안 꾸준히 파내려간 흔적이 지하 8층, 총연장 7.8㎞에 달한다. 한창때는 500∼600명의 노동자가 하루 250톤의 암석을 캐냈다. 주요 산물은 금, 은, 동, 아연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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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권 최대 금속광산이던 시흥광산은 1972년 홍수 때문에 문을 닫았다. 광산 앞 공터에 쌓여 있던 광미(광석 찌꺼기)가 물에 쓸려가 일대의 논밭, 하천을 덮쳤다. 광미에는 미량의 중금속 성분이 남아 있기 때문에 제대로 처리를 하지 않으면 중금속 오염을 일으킬 수 있다. 피해보상 문제로 하루아침에 문을 닫은 광산을 1974년 한 사업가(김기원)가 매입했다. 하지만 정부는 채굴 허가를 다시 내주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소유주는 인근 소래포구에서 나온 새우젓을 한 통에 1만 원씩 받고 저장해주는 창고 용도로 갱도의 일부만을 사용했다. 그러는 동안 전체 8층 중 하단부 7개 층은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지하수에 서서히 잠겨버렸다. 산 곳곳에 위치한 출입구와 외부 시설물은 잡초와 덩굴, 나무 속으로 묻혀 들어갔다.

안양, 의왕, 시흥, 인천, 부천 등 주변지역이 도시화되는 가운데서도 그린벨트에 속한 가학산 지역은 도시 속의 산골로 남아 있었다. 1990년대 정부가 광산 주변 오염된 땅을 정화, 매립한 후 그 자리에 쓰레기소각장을 건설한 것이 유일한 변화였다.

1990년대 후반, 이 폐광산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강원랜드 카지노 개장 등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폐광 지역 개발이 이슈가 됐기 때문이다. 1998년 2기 민선시장으로 부임한 백재현 시장(현 지역 국회의원)은 부임 다음 해 시청 직원들에게 가학산에 있다는 옛 광산 일대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조사는 막 신설된 시청 정책개발팀이 맡았다.

설계도도, 길잡이도 없었다. 당시 42세 팔팔한 나이로 팀장 직무대리를 맡고 있던 최봉섭 현 시민행복국 국장이 탐험에 앞장섰다. 진입로 상황조차 파악하지 못하던 터라 우선 칡넝쿨을 잡고 기어 올라가 산 정상 부근에 있는 사갱(비스듬한 갱도) 입구에 이르렀다. 다음번에는 헬멧과 로프 등 장비를 챙겨왔다. 나무에 로프를 묶고 최 팀장이 다시 앞장을 섰다. 무시무시한 기분이 들었지만 일은 일이었다. 로프 한 가닥에 몸을 의지해 한참 내려가니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거대한 공간이 나왔다. 거기서부터 아래쪽으로는 마치 잔잔한 호수처럼 갱도가 물에 잠겨 있었다. 수평 방향으로 이어진 다른 갱도를 따라가 보니 새우젓 저장고와 과거 광산의 정문으로 쓰이던 입구 쪽으로 이어졌다. “동굴이 생각보다 크고 미로처럼 복잡하게 돼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고 최 국장은 기억한다. 정책개발팀원들은 이후 동굴을 샅샅이 탐사해가며 도면을 그렸다. 수소문 끝에 광업진흥공사가 보관 중이던 갱내도를 입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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