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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괴와 돌파의 갈림길에서…

이방실 | 220호 (2017년 3월 Issue 1)
최근 유니레버 인수 의사를 밝혔던 크래프트 하인즈가 불과 며칠 만에 인수 제안을 철회했다. 1430억 달러에 달하는 인수 금액으로, 만약 성사됐다면 역사상 두 번째로 큰 인수합병(M&A) 거래이자 네슬레에 이은 세계 제2의 소비재기업이 탄생할 수 있었던 M&A였다. M&A 시도가 좌초된 이유로는 인수 계획의 조기 노출, 자국 기업의 헐값 매각을 경계하는 영국 정부 등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대한 이유는 양사 간 너무도 다른 기업 철학 때문이다.

크래프트 하인즈는 투자회사인 버크셔해서웨이와 사모펀드인 3G캐피털이 약 50%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3G캐피털은 투자 기업을 대상으로 고강도의 비용 절감과 인력 구조조정 등을 통해 단기간 수익률을 극대화하는 사모펀드로 정평이 나 있다. 반면 유니레버는 장기 성장과 지속가능성을 기업의 최대 가치로 삼고 있는 회사다. 이런 경영 철학은 130여 년 유니레버 역사상 처음으로 외부에서 영입된 폴 폴만이 수장을 맡은 이후 더욱 강화되고 있다.

P&G와 네슬레에서 30년간 일해 온 폴만은 지난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어려움에 빠진 유니레버의 구원투수 역할을 맡게 됐다.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한 후 그는 단기 실적에 연연하지 않고 장기적 관점에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분기별 실적 전망 제시를 중단하는 용단을 내렸다. 전례 없는 결정에 주주들과 잠재적 투자자 모두 경악했지만 “유니레버가 추구하는 장기 가치 창출 모델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다른 곳에 투자하라”는 도발적 발언도 서슴지 않으며 밀어붙였다.

취임 이듬해인 2010년엔 ‘지속가능한 삶 계획(Sustainable Living Plan·SLP)’이라는 청사진을 발표하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구체적 비전을 제시했다. 제품에서 트랜스지방 사용을 줄이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산된 농산물의 구매 비중을 확대하며, 포장재 사용량을 감축하는 등 원재료 조달부터 제품 생산 및 소비에 이르는 전 단계에 걸쳐 책임 있는 기업 시민으로서의 노력을 통해, 2020년까지 지구 환경에 끼치는 부정적 영향을 절반으로 줄이겠다고 공표했다. 지구를 살리는 게 돈이 된다고 굳게 믿는 폴만의 의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다.

폴만의 리더십 아래 2009년 398억 유로였던 유니레버의 매출액은 2016년 527억 유로로 증가했고,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50억 유로에서 78억 유로로 늘었다. SLP라는 비전을 핵심 전략으로 끌어안으며 조직원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낸 결과다. 그가 언제까지 유니레버의 수장으로 남아 있을지는 미지수다. 거대 다국적 기업의 CEO라기보다는 일견 환경운동가처럼 보이는 그를 향해 여전히 의구심을 갖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명확한 비전을 조직원들과 공유하며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자신의 경영철학을 담대하게 펼쳐가는 그의 리더십은 주목할 가치가 충분하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인 존 엘킹턴은 1994년 ‘지속가능경영의 3대 축(Triple Bottom Line·TBL)’이라는 개념을 주창했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선 재무적 성과 외에 환경 및 사회에 끼치는 영향력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다. 엘킹턴의 TBL 개념은 인류의 건강과 행복 증진, 환경보호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폴만의 행보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엘킹턴의 지적처럼 오늘날 기업들은 ‘붕괴(breakdown)’와 ‘돌파(breakthrough)’의 갈림길에 놓여 있다. 기업과 시장, 심지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신뢰마저 흔들리고 있는 21세기에 단기 재무성과 개선에만 연연하는 기존 전략으로는 붕괴를 피하기 어렵다. 사고방식과 전략, 투자 등 모든 측면에서 장기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지속가능 성장은 말로만 떠든다고 이룰 수 있는 게 아니다. 기업(이익)과 인류, 지구의 공생번영에 대한 비전을 추구하며 과거의 성장 패러다임과 싸워 정면 돌파해야만 이뤄낼 수 있다. 환경보호에 힘쓰는 게 기업과 주주를 위한 길이라는 확고한 믿음, 주주들의 반발에도 굴하지 않고 장기 가치를 우선시하는 담대한 리더십이 없다면 쉽게 얻어질 수 없다.



이방실 기업가정신센터장 smile@donga.com

필자는 서울대 영어교육과 및 동 대학원(석사)을 졸업했고 미국 듀크대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서울대 공대에서 박사 학위(기술경영)를 받았다. 한국경제신문 기자를 거쳐 올리버 와이만에서 글로벌화 및 경쟁전략 수립 등과 관련한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 이방실 이방실 | - (현)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기자 (MBA/공학박사)
    - 전 올리버와이만 컨설턴트 (어소시에이트)
    - 전 한국경제신문 기자
    smi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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