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당서울대병원
발단은 단순했다. 2010년 어느 날, 인터넷으로 뉴스를 보고 있던 황희 분당서울대병원 의료정보센터장의 눈이 커졌다. 10년 가까이 의료정보센터에서 일하면서 분당서울대병원의 의료정보 관리와 분석을 맡아 온 그였다. 평소에도 데이터 분류와 관리, 관련 기술의 발달 및 추세와 관련된 기사를 관심 있게 보던 터. 시선을 사로잡은 기사는 구글에 대한 것으로 어느 지역에서 감기 관련 검색이 늘면 오래지 않아 해당 지역에 독감주의보가 발표되더라는 내용이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구글은 검색창에 관련 검색어가 입력되는 빈도를 토대로 독감 확산 여부를 포착하며 이는 이 분야에서 공적 권한을 가진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보다 2주나 빠른 것으로 보고된다. 이제는 아예 전 세계 독감 확산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전용 페이지(www.google.org/flutrends)가 있을 정도다. 당시 황 센터장이 받은 충격은 컸다. 그는 “잘 짜인 데이터가 이렇게 활용될 수도 있구나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회상한다.
충격은 머릿속에만 머물지 않았다. 황 센터장은 새롭게 부각된 빅데이터를 실제 의료 현장 속으로 깊숙이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분당서울대병원이 갖고 있는 정체성과 경쟁력을 강화하고 의료정보화시스템 분야의 선두 자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한 단계 더 도약해야 할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그동안 누적된 데이터를 새로 분류하고 다시 가공해서 좀 더 많은 정보와 통찰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최첨단 데이터웨어하우스를 갖추기로 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황희 센터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분당서울대병원의 빅데이터 활용 과정과 그 결과를 분석했다.
시작
의료정보시스템에 대한 투자는 사실 직접 진료와 무관하다. 예컨대 MRI나 CT 기계를 구입하겠다는 결정은 직접적으로 환자에게 필요한 투자를 하는 것이므로 비용과 효과가 즉각 나타난다. 하지만 의료정보시스템에는 얼마의 투자가 적정한지 분명하지 않고 비용을 들인 만큼 효과가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투자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분당서울대병원이 빅데이터 개념을 받아들이고 차세대 CDW(Clinical Data Warehouse)를 구축하는 일에 신속하게 착수할 수 있었던 데는 설립 초기부터 갖고 있던 ‘의료정보 분야의 선두주자’라는 정체성 영향이 컸다. 분당서울대병원은 서울대 의과병원에 속한 병원 중 한 곳으로 2003년 개원해 올해로 꼭 10년 차가 됐다. 이 병원은 개원할 때부터 최첨단 의료정보 시스템 구축을 목표로 했다. 개원 당시 종이, 차트, 필름, 슬립이 없는 4리스(less) 병원으로 출발하며 관심을 모았다. 종이에 펜으로 적어 기록하는 대신 전자패드나 노트 등을 활용해 기록을 남기는 방식을 도입했다. 2000년 들어 병원 업계에서는 종이차트 없는 페이퍼리스(paperless) 병원이 가능한지에 대한 논의가 많았다. 파일럿 형태로 여러 시도가 있었으나 1000병상 이상 대형 병원에서 이를 실제로 구현한 곳은 분당서울대병원이 처음이다.
2000년 이후 탄생한 덕을 톡톡히 봤다. 기존 대형 병원에서는 차트를 없애고 전자의료기록(EMR· Electronic Medical Records) 시스템을 구축하고 싶어도 기존 데이터들을 변환해 이관 및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새로 출발하는 분당서울대병원은 기존 데이터 이관에 대한 부담이 없었다. 그럼에도 대형 병원에서 모든 차트와 필름을 전자화한다는 것은 기존 관행에 도전하는 만만치 않은 실험이었다. 황 센터장은 “시스템을 구축할 때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예상이 압도적이었지만 실패하면 다시 종이차트를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며 “현재 우리나라의 웬만한 대형 병원은 모두 전자 기록 시스템을 도입했는데 아마 가장 큰 공을 세운 곳이 분당서울대병원일 것”이라고 말했다. 분당서울대병원이 큰 문제없이 페이퍼리스 시스템을 실현하자 대형 병원에서도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점이 검증됐고 다른 곳에서도 경쟁적으로 도입에 나섰다는 얘기다.
태생부터 의료정보화에 뿌리를 두고 있던 분당서울대병원은 설립 때부터 자체적인 데이터웨어하우스를 갖추고 환자들의 방문과 진료, 처방에 대한 기록을 빠짐없이 쌓아왔다. 젊은 병원답게 대부분의 의료진이 디지털 기기 사용에 거부감이 없는 3040세대라는 점도 전자 기록의 디지털화에 도움을 줬다. 디지털 자료를 검색하고 연구와 진료에 활용하는 일도 큰 무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기존 시스템을 그대로 활용해도 전혀 문제가 없는 상태였다. 기존 시스템은 이미 국내는 물론 세계에서도 인정받는 최신 시스템이었다.
황 센터장의 생각은 달랐다. 구글 기사를 접한 후 그는 빅데이터 관련 정보들을 닥치는 대로 수집하고 읽었다. IT 전문가들도 찾아다니며 만났다. 결론은 명확했다. 빅데이터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 누가 먼저 오르고 나중에 합류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무시하고 갈 수 없는 대세였다. 황 센터장은 빅데이터 기술을 신속하게 도입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얼마 후, 황 센터장은 자료를 정리해 의료정보운영위원회 안건으로 올렸다. 병원장과 부원장은 물론 병원 운영의 큰 틀을 짜고 관리하는 기획조정실장 등이 전부 참여하는 회의였다. 차세대 CDW를 구축해야 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최신 트렌드를 설명하는 내용과 병원의 경쟁력 향상을 위해 반드시 추진해야 할 일이라는 의견이 포함됐다. 예상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수백억 원에 달했다. 웬만한 병원을 새로 짓는 것과 같았다. 당시 다른 프로젝트로 200억 원 이상을 쓰던 중이라 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기존 시스템이 낡거나 제대로 가동하지 않던 상황이었다면 설득이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기존 시스템은 바로 그해 미국보건의료정보관리 및 시스템학회 애널리틱스에서 부여하는 의료정보화 단계에서 최고 수준인 7단계 레벨을 획득했다. 미국을 제외한 나라에서 최초일뿐더러 미국을 포함해도 9번째였다. 의료정보화 분야에서 이미 최고 그룹에 속해 있다는 증거였다. 하지만 위원회에 안건을 올린 결과는 만장일치 통과였다.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지만 의료 IT에서 선도적 지위(leading position)를 유지하려면 선제적 투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통한 것이다. 황 센터장은 “좋은 건 알겠는데 지금 이 시점에 꼭 그렇게 많이 투자해야 할까 하는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통과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정보화 수준이 의료서비스 수준을 좌우한다는 기본적인 공감대가 있었던데다 대규모 투자를 아끼지 않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모두가 신뢰를 보내준 결과”라고 말했다.
전개
CDW TFT가 꾸려졌다. 어떤 곳과 손을 잡고 시스템 구축에 나설지를 선정하는 단계가 먼저였다. 총 7개 사업자로부터 제안서를 받았고 작은 프로젝트를 던져 기술검증(PoC)을 실시했다. 유수 글로벌 벤더들을 제치고 SAP가 최종 낙점됐다. 가장 중요한 선정 기준은 필요한 서비스를 즉각 받을 수 있는가였다. 병원은 업종 특성상 작업의 현지화(customization)가 필요할 때가 많다. SAP는 원천기술을 갖고 있고 한국에 연구소를 두고 있어 프로그램 수행에 유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기존 시스템이 갖고 있던 한계와 문제점을 진단하는 일에서부터 시작했다. 주 사용자인 의사와 간호사를 대상으로 전수 조사를 진행했다. 어느 부서, 어느 팀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서울대병원 4곳의 모든 의사와 간호사를 대상으로 설문해 병원별, 부서별로 요구사항을 정리했다. 황 센터장은 “분당서울대병원이 선두에서 첨단 시스템을 받아들여 적용하면 다른 서울대병원에도 순차적으로 확산된다”며 “이를 감안해 아예 처음부터 4곳의 의료진을 모두 설문 대상으로 했다”고 설명했다. 현 시스템을 쓰면서 불편한 점은 무엇인지, 개선해야 할 방향은 무엇인지, 새로 구현됐으면 하는 기능은 어떤 것인지 꼼꼼히 묻고 분석했다. 이 작업의 주체였던 의료정보팀은 워크숍을 갖고 정리된 내용을 공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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