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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과병원

전문화•대형화로 승부 25평 출발, 1300만 건 진료 기록 쓰다

이유종 | 139호 (2013년 10월 Issue 1)

 

 

부산 제3육군병원에서 안과과장으로 군복무를 마친 청년의사 김희수는 1962 8월 서울 영등포로터리 인근에 25평짜리 사무실을 빌려 김안과의원을 열었다. 당시 군사정부는 병·의원의 특정지역 편중을 억제하기 위해 인구비례에 따른 개업 허가제를 실시하고 있었다. 중구와 종로구 등 유동인구가 많은 시내 중심가에는 이미 공안과 등 유명 안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는 영등포 일대에는 공장이 많아 눈을 다치는 근로자도 많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반면 안과의원은 거의 없었다. 개원 첫날 환자는 15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안과의원은 안과 전문화와 의료보험 실시, 전문경영인 도입 등에 힘입어 이후 반세기 동안 국내 정상의 안과 전문병원으로 성장했다. 외래환자 진료가 연간 42만 건으로 개원 이후 누적 외래환자 진료는 1300만 건에 달한다. 연간 23000여 건의 안과 수술을 진행하고 있다. 녹내장 수술의 경우5’로 불리는 국내 대형 대학병원들이 연간 50∼70건 정도를 실시하고 있지만 김안과병원은 이들 병원보다 서너 배 많은 200건 이상을 진행하고 있다. 2011 11월에는 세계안과병원협회에 가입했다. 세계안과병원협회에 가입하려면 안과 전문과목을 5개 이상 보유하는 등 전문성을 갖춰야 하고 연간 수술 건수가 8000건을 초과해야 할 정도로 병원 규모도 일정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1단계: 설립기 - 의료보험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다

김희수 김안과병원 이사장은 미국에서 배운 선진 의술과 최신 의료장비, 적극적인 병원 홍보, 환자중심의 서비스 등으로 변두리 동네의원에 불과한 김안과의원을 개원 10년이 채 되지 않은 1971년 연건평 400여 평 규모의 대형 안과의원으로 키웠다. 김 이사장은 세브란스의대를 졸업한 뒤 미국 일리노이대 의과대학원과 뉴욕 세인트프랜시스병원 등에서 33개월 동안 의학이론과 임상실습을 배웠다. 미국에서 배운 의술은 초창기 김안과의원의 명성을 쌓는 데 도움이 됐다. 그는 당시 익상편(결막 질환) 수술 뒤 재발을 방지하는 동위원소 치료법을 미국에서 배워 국내에서 유일하게 치료할 수 있는 의사이기도 했다. 귀국할 때는 최신 의료장비를 가져왔다. 당시 안과의사들은 큰 돋보기로 환자의 눈을 보며 진료했는데 김 이사장은 미국에서 중고로 구입한 세극등 현미경(Slit Lamp)을 이용해서 환자를 진찰했다. 환자들이 선진 의술과 최신식 기자재에 매료되기에 충분했다. 김 이사장은 미국 유학시절 어떤 사업이든 홍보와 광고의 힘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국에서는 기업과 병원, 단체 등 대부분의 기관들이 광고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미국에서는 1950년대 TV가 가정에 보급되면서 TV광고가 크게 늘었다. TV광고를 통해서 제품과 서비스를 알리고 성공한 사례도 많았다. 그는 한국에 돌아가서 개업하면 가장 먼저 병원홍보에 집중하겠다고 생각했다. 개원 초창기 환자가 많지 않자 영등포 일대뿐만 아니라 경기 안양과 수원까지 다니며 주택가 전신주는 물론 골목골목 벽마다영등포 김안과라는 글자를 페인트로 새겼다. 정규 진료가 없는 공휴일 오후마다 2∼3년 동안 이런 방식으로 홍보를 이어갔다. 1971년에는 건물 옥상에 당시 국내에서 가장 큰 대형 간판을 세웠다. 사람들이 영등포역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김안과의원의 간판을 보게 한 조치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당시 국내 병·의원에는 환자에 대한 서비스 개념이 전무했다. 의사들은 고압적이었고 간호사와 직원들도 불친절하기 일쑤였다. 김 이사장은병원에서는 환자가 왕이라는 환자제일주의가 절실하다고 느꼈다. 매일 아침 진료를 시작하기 전 40분 동안 간호사와 행정직원을 대상으로 서비스 교육을 실시했다. 간호사들에게 환자들이 질환과 관련해서 질문하면 거리낌 없이 답변할 수 있도록 숙지시켰다. 의료보험 등 행정업무와 관련된 사항도 주지시켰다. 인사하는 법과 전화받는 방법 등도 가르쳤다. 1960년대 후반에는 환자 대기실에 국내 최초로 대형 에어컨을 달았다. 또 이례적으로 24시간, 365일 진료를 실시했다. 환자들에게김안과에 가면 언제든 치료를 받을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다. 정규 진료시간 이후에도 당직의사 등이 응급환자를 받았다. 안과 질환의 경우 다른 질환과 비교할 때 응급환자가 많지 않다. 그래서 대형 병원의 응급실에서는 안과 응급환자를 소홀하게 취급했다. 안과 응급환자들은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김 이사장은 이런 상황을 감안해서 24시간 진료체제를 구축하면 환자들에게신뢰를 심어줄 수 있다고 보고 초창기부터 연중무휴 진료를 고수하고 있다. 사실 24시간 진료체계는 당직의사 배치 등 추가 비용이 들어가지만 환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재무적으로만 보면 병원에는 손해다.

 

김안과의원이 본격적으로 성장한 계기는 정부의 의료보험 확대 정책 때문이다. 정부는 1977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의료보험을 실시했다. 당시 한국 정부와 의료보험조합은 재정형편이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의료보험 비용을 보조해주기 힘들었다. ·의원들은 정부의 보조 없이 기업주와 피고용인만의 부담으로 의료보험을 추진하면 진료비가 매우 낮게 책정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의료보험 정책에 반대했다. 게다가 제도 시행 초창기에는 의료보험 취급을 희망하는 병·의원들이 개별적으로 기업 및 공공기관과 의료보험 취급 계약을 맺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대부분의 병·의원은 계약에 소극적으로 나왔다. 하지만 김희수 이사장은 미국 유학 시절 의료보험제도를 미리 경험한 터라 이 제도의 장단점을 알고 있었다. 의료비가 낮게 책정되더라도 환자들을 많이 받아들이면 오히려 전체 진료비는 많아진다고 판단했다. 여기에는 의사가 환자를 거부해서는 안 된다는 직업적인 소명의식도 반영돼 있었다. 역시 진료비가 낮아서 기피하던 산업재해 지정병원도 자진해서 허가를 받았다. 하지만 영등포공단 근로자들이 의료보험과 산재보험의 적용을 받아서 부담 없이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자 김안과의원에는 환자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만 해도 공장 근로자들은 눈이 아프더라도 웬만큼 위험한 상황이 아니면 진료비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참을 때가 많았다. 진료비 문턱을 낮추자 숨어 있던 환자들이 대거 김안과의원을 찾았다. 산업재해 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지방 출신 근로자들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까지 모시고 와서 치료를 받았다. 김안과의원은 더 이상 늘어나는 환자를 감당할 수 없어서 1986 8월 영등포 청과물시장 인근에 연건평 3000평 규모의 병원을 새로 지었다. 1988년 전국민 의료보험 시대가 열리면서 김안과의원을 찾는 사람은 더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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