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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ons from Classic

오페라 모듈화로 2주만에 한편 만들기도… 로시니는 고뇌 대신 똑똑함을 택했다

김혜옥 | 116호 (2012년 11월 Issue 1)

 

 

 

 

한때 우리나라 CEO들의 출신배경이 달라지고 있다는 기사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과거에는 많은 기업에서 현장 경험이 있고 다양한 보직을 돌면서 잔뼈가 굵은 인물들을 CEO로 선호했다. 그러나 IMF 관리체제 이후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효율성 위주의 경영과 자금 계획, 프로세스 혁신과 같은 의사결정의 메타 로직이 강조되면서 고도의 예측과 전망을 요하는 재무, 기획, 법무 계열 최고경영자들의 비중이 늘어났다. 이들은 다른 직군의 경영자들보다 훨씬 예민하고 스트레스를 받기 쉬운 성격의 소유자라고 한다. 분석, 구조화, 논리 등을 핵심으로 하는 보직을 거쳤기에 모든 전략적 선택을 데이터 기반으로 보고 과정 하나하나가 맞지 않으면 큰 고민을 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과연 철저한 계산과 대비가 미래를 보장해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인지심리학이나 행동과학에 이론적 기반을 둔 경영전략 연구자들은 대부분 ‘no’라고 얘기한다. 긴장보다 유희를, 예측보다 몽상을 즐기는 경영자들이 훨씬 오래 달릴 수 있다는 지적이다.1

 

불확실한 환경에서 다양한 자원들을 관리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19세기의 음악가들에게도 경쟁 환경은 큰 스트레스를 줬다. 예민한 성격에 쉽게 피로함을 느꼈던 천재들은 대부분 단명했다. 멘델스존, 슈베르트, 쇼팽처럼 고도화된피아니즘(Pianism·피아노 건반을 예민하게 연주하듯이 관현악, 성악 등에서도 고도로 섬세한 선율적 표현과 화성을 지향하는 사조)을 통해 세밀화된 예술세계를 지향했던 작곡가들은 거의 마흔 이전에 죽었다.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위대한 음악인을 넘어서 당대의 패러다임을 주도할 수 있는 오피니언 리더가 됐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자기 성격의 예민함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낭만주의 천재들의 민감성과 전혀 다른 경로를 걸어갔던 예술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조아키노 로시니(Gioachino Rossini). 대부분의 19세기 작곡가들은 가난, 고뇌, 철학적 몽상과 같은 키워드를 공유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이상적인 예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극도로 자신을 괴롭히는 인간형이 보편화돼 있었다는 의미다. 반면에 로시니의 행보는 고민하는 예술가의 몸부림과는 전혀 다른 패턴을 보였다. 20살에 혜성처럼 오페라계에 데뷔해오페라 부파(희극)’만 전문적으로 작업했던 그는 대중의 분석이나 견해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자유인이었다. 2주 만에 오페라 한 곡을 썼던 전설적인 일화도 있다. 그는 20년간 39편이나 되는 작품을 쓰며 파리, 런던, 밀라노를 주름잡았다. 그리고 38세에 과감하게 은퇴해 유명 요리사의 길을 걸었던 흔적은 자유로운 천재 로시니의 단면을 대변하고 있다. 과연 무엇이 그를 성공으로 이끌었을까?

 

 

스마트한 바보가 성공한다

조직이론과 경영전략의 거장 제임스 마치(James March) 교수가 1970년대에 남긴 명언이 있다. ‘바보가 되는 기술(Technology of Foolishness)’을 배우라며 예측과 분석 중심의 경영 관행에 일침을 날린 것이다. 그가 강조한 똑똑한 바보(sensible foolishness)라는 개념은 로시니의 삶에도 잘 들어맞는다.2

 

1792년 이탈리아의 페자로에서 태어난 그는 가난한 호른 연주자 아버지와 성악가 어머니 밑에서 여러 고초를 겪으며 자랐다. 한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추종했던 아버지는 북이탈리아에 주둔한 프랑스 혁명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투옥되기도 했다. 아버지의 친구나 할머니의 집을 전전하며 겨우 살아갔던 로시니는 12살부터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면서 생계를 도와야 하는 환경에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가장 커다란 전환점이 찾아왔다. 16살에 볼로냐 콘서바토리에 입학하면서 정식으로 첼로, 피아노, 작곡 등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다. 이 시절부터 몽상가 로시니의 기질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교수들은 파이지엘로, 파가니니처럼 고전주의 시대의 색채가 짙은 작품만을 강의했다. 거의 대부분 패턴과 방향을 예측할 수 있게끔갈란트스타일로 쓰여진 곡들이었다. 그러나 로시니가 깊게 심취한 것은 하이든, 모차르트의 독일 음악이었다. 특히 선율의 조화 외에 화성의 색채감이 강조됐던 모차르트의 작품이 그를 매료시켰다. ‘내가 모차르트처럼 음악을 하면 어떻게 될까?’ ‘내가 쓴 아리아를 모차르트의 작품에 넣으면 어떤 효과가 날까?’ 절제된 표현을 강조했던 이탈리안 오페라에 서민적인 재담이나 무대 장치를 동원하는 것도 이야기하고 다녔다고 한다. 12살에 현악 4중주를 위한 소나타를 작곡했다는 일화도 기행(奇行)으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음악학교 친구들은 조숙했지만 어딘가 이상하게 보였던 로시니가 독일 음악에 미친 바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8살이 되던 해에 거대한 전환점이 생겼다. 불과 3년 차 음악학교 학생에 불과했던 그가 오페라를 작곡해 베니스의 극장에서 상연한 것이다. ‘혼인 계약(La cambiale di matrimonio)’이라는 첫 번째 작품이었다. 한때 문화의 중심이었던 이탈리아의 명문 음악학교에서 독일 음악을 중얼거리고 다녔던 로시니가 작품을 초연했다는 소문은 여러 극장과 계약주들에게로 퍼져 나갔다. 그가 작곡한 오페라를 관람했던 북이탈리아의 프랑스 총독은 내무장관에게서른 살이 되지 않은 마에스트로 로시니를 예찬하는 편지를 쓰기도 했다.

 

사실 로시니의 오페라 작곡은 거의 우연에서 시작했다. 학교에서 칸타타 작곡으로 우등상을 탔던 경험을 살려 평범한 구상 수준에서 썼던 작품이혼인 계약이었다. 그러나 청중은 기존의 고전주의 오페라와는 다른 서곡(overture) 연주와 연기가 강조된 독창 파트에 열광했다. 심지어 그의 첫 번째 전기작가였던 스탕달은 로시니가 이미 10대에 치마로사, 모차르트와 대등한 정도의 역량을 평가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필립 고세(Philip Gosset)를 비롯한 로시니 연구자들은 로시니가 정형화된 레슨과 교수법을 바탕으로 연습하는 데 집중했다면 불가능한 시도였을 것이라고 한다. 꾸준한 분석과 계산, 훈련이 아니라 상상과 직관의 힘이 그를 역사적인 반열에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실현 가능해야 진정한 창의성

1810년에서 1813년의 기간 동안 로시니는 이탈리아 각지의 극장에서 흥행작곡가로 인정받았다. 작품의 수월성뿐만 아니라 상품을 개발하는 프로세스 면에서도 전설적인 실력을 발휘했다. 19세기 초반의 이탈리아 오페라 시장은 비엔나나 파리와 달리 시즌별로 새로운 작품들을 여럿 선보여야 했다. 우선 문화 소비자들의 감식안이 높았기 때문에 수준 높은 오페라를 다양하게 보여야만 유지가 되는 분위기가 있었다. , 이탈리아 오페라는 프랑스, 영국에서도 다녀가는 글로벌 표준 상품이었기 때문에 빠른 콘텐츠 유통과 트렌드 창출을 통해 선도 주자 역할을 해야 하는 압박도 있었다. 임프레사리오(Impresario·오페라 전문 기획사 또는 유통사 역할을 했다)들이 극장으로부터 5∼6개월 정도의 기한을 두고 급하게 작품을 발주해 오면 작곡가는 그보다 더 빠른 시간에 초고를 완성해 수정을 반복하는 것이 당시 관습이었다. 그러나 로시니는 이토록 가혹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제작 프로세스에도 전혀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빠른 시간 내에 창작을 해냈다. 베토벤이나 리스트처럼 초고를 쓴 다음 여러 번 고친 흔적도 없고 다른 작품에서 선율을 따왔을 경우 으레 남기는 표기도 없었다. 대부분 착상 단계에서 틀을 잡은 다음 열흘 남짓한 시간에 일필휘지로 써 내려갔다는 것이 통설이다. 스탕달의 로시니 전기에서 재미있는 근거들이 전해지고 있다. 레스토랑에서 리조토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20여분 만에 썼다는 탄크레디(Tancredi)쌀의 아리아며 침대에서 이중주 작곡을 거의 마쳤는데 악보가 침대 밑으로 떨어지자 줍는 것이 귀찮아 새로 작곡했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음악사학자들에 따르면 로시니의 빠른 창작 속도는 관행의 정착을 통한 작품의 모듈화를 시도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연주자들을 최대로 배려한 결과다. 특정한 스타일을 도입해서 극장의 연주 프로세스로 연결시키는 것은 갓 개발된 신기술을 공정에 적용시키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과정이다. 극장주, 지휘자, 연주자 등이 기법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한 시간도 필요하고 무대 장치나 연출을 통해 드라마의 디자인이 실현될 수 있어야 한다. 로시니는 모든 이해관계자들이 그것을비용으로 여길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가사 표현이나 성악가의 동작처럼 변화를 위한 투자가 덜 수반되는 일에만 창의성을 추구하고 오케스트라의 선율이나 작품 전체의 길이처럼 투자 위험이 동반되는 측면에 있어서는 최대한 연주자와 클라이언트의 입장을 존중하는 입장을 취했다.베토벤의 등장 이후에 심오하고 창의적인 작품 경향을 원했던 유럽 관중들의 수요와는 다소 역방향으로 가는 전략이기도 했다. 그러나 로시니의 입장은 한결 같았다. 어떤 작품이든지 실현 프로세스로 소화할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한 시도는 진정한 창의성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제품의 기획과 개발 자체뿐만 아니라 성과 창출의 메커니즘에서도 직관을 발휘했다.

 

 

소모적 경쟁은 피하라

제임스 마치와 비슷한 시기에 사회심리학을 기반으로 조직의 변화를 이야기했던 칼 와익(Karl Weick) 교수는센스메이킹(Sensemaking)’이라는 개념을 주창했다. 일종의감각의 경영이다. 외부의 환경을 읽어내고 변화를 시도하는 데에 정해진 전략이나 이론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혁신에는 환경을 읽어내고 패턴화를 시도하며 또 자신의 위치 수정을 거듭하는이론화(theorizing)’의 차원이 있을 뿐이라는 논지다.3

 

1822년이 되자 로시니도 과감하게 자신의 과거로부터 단절하는 선택을 하게 된다. 이탈리아를 떠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에게 1812년부터 1822년까지 10년간의 세월은 예술적 표현을 둘러싼 비난과 맞대응의 연속이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신데렐라와 같은 여러 작품들을 통해 대중의 사랑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전주의 오페라를 잊지 못하는 비평가들은 꾸준히 그의 스타일이이상하다고 신문지상을 통해 인신공격을 퍼부었다. 꾸준히 혁신을 시도했던 부지런한 작곡가였음에도 불구하고살찐 작곡가의 오만하고 게으름과 같은 낭설이 떠돌았다. 사실 로시니의 전체적인 작품 성격은 거의 항상 비슷했다. 그러나 독주자, 독창자의 연주 기법에 있어서는 혁신적인 시도가 자주 이뤄졌다. 성악가가 악기처럼 표준화된 역할을 담당했던 과거의 관행에서 벗어나서 독창자가 주목받을 수 있는벨칸토창법을 개발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자신이 소모적인 경쟁 환경에서 고정된 전략으로 자양분을 잃어가고 판단했던 그는 과감하게 자신의 지분을 버리고 비엔나와 런던으로 떠돌기 시작했다. 진정성 있는 작품 활동을 위한 무대를 찾아 다녔다.

 

그러던 중 1822 4, 로시니에게 재미있는 사건이 발생했다. 원로 작곡가 베토벤과 만난 것이다. 희극 위주의 작품을 해왔던 로시니가 독일식 낭만 음악의 진중함이 결여돼 있다는 것을 느끼고 고민하던 상황이었다. 이탈리아의 흥행작곡가가 비엔나로 건너 오자 대중들은 독일 음악가들에 대한 관심을 잊어버릴 만큼 그에게 열광했다. 그러나 스스로 천재성은 있지만 진정한 명인이라 생각하지 않았던 로시니는 베토벤, 알브레히츠베르거와 같은 독일 작곡가들에 비해 지나치게 유희 지향적인 자신의 작품에 자조적이었다. 그러던 중 베토벤이 그에게 자신감을 북돋워주는 한마디를 던졌다.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작곡한 그 친구로군! 너무 큰 고민하지 말고 지금 그대로 하면 돼요. 자신을 믿으세요.”

 

이탈리아를 떠나 자신이 꿈꾸던 독일 음악의 이상에 편입될 것을 바랐던 천재는 환상을 버렸다. 그리고자기류의 길이 있음을 확신하고 힘을 얻었다. 비록 재정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영국의 킹스시어터에서 상연된 오페라는 조지 6세의 관심을 얻을 만큼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았고로시니 열풍이라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프랑스 정부의 위촉을 받아 파리의 이탈리아 극장장으로 정착하게 된다. 로시니가 자신의 필드였던 이탈리아를 떠났던 선택은 새로운 기회였다. 기존 도식과 필드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파괴적인 혁신을 시도하고 성공한 것이다.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나는 것도 전략

파리는 시민혁명 이후에 다양한 예술적 시도가 이뤄졌던 테스트베드였다. 살리에리편(DBR 105)에서 다뤘던 것처럼 파리에는 재능 있는 예술가를 알아보고 그들끼리 경쟁하는 것을 장려하는 문화가 깔려 있었다. 문화예술에 대한 소비도 다른 도시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과감했다. 이외에도 여러 문인, 화가, 외교관 등이 모여서 각자의 관점을 이야기하고 평가하는 것이 자유로운 공간이기도 했다. 왕권을 전복시킬 만큼 급진적인 프랑스의 저변을 궁금해 했던 전 세계의 문화예술인들이 모여자유는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했다. 자연스럽게 파리는 혁신 클러스터로 발돋움했다. 로시니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대중의 이목을 끄는 트렌드 리더로서 자리매김했다.

 

그가 주목했던 프랑스 오페라의 특징은화려한 무대에 비해 독창자와 연주자들의 역량이 볼품없다는 것이었다. 로시니는 극의 전체 흐름과 선율의 변화를 통해 혁신을 시도하기보다는 개별 연주자의 발성법과 주법을 개선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던 과거의 방법을 다시 사용했다. 새로운 오페라를 쓰기보다는 기존의 작품을 프랑스어 버전으로 개작하고 큰 오페라홀을 울릴 만큼 성량이 크지 않은 가수도 주역이 될 수 있을 만큼 구도를 수정했다. ‘오리 백작(Le comte Ory)’이나마호메트 2같은 곡들이 프랑스인들의 취향에 맞게 변모됐다. 극장장이라는 막강한 위치를 통해 능력 있는 후배들을 소개하는 역할도 했다. 로시니의 작품을 전문적으로 연주해 각광받고 있었던 마이어베어(Meyerbeer)가 그의 은혜를 입어 파리 극장에서 공연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나타났다.4  로시니의 발성법과 주법을 열심히 연구한 후배들이 파리 오페라의 새로운 경향을 주도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던 벨리니, 도니체티 같은 인물들이 파리에서도 각광받기 시작했다. 결국 로시니는 자신이 발휘한 고유의 역량에 의해 대체돼 버리는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변화에 저항하기 위해빌헬름 텔(Gilluame Tell)’ 같은 작품들을 쓰고 초연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인기를 누릴 수는 없었다. , 트렌드에 민감한 파리의 관중들은 변덕스러운 기질을 지니고 있어 금세 로시니의 작품에 싫증을 느꼈다. 7월 혁명으로 샤를 5세가 퇴위하자 프랑스 정부와 맺었던 극장장 계약이 취소됐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로시니는 의도하지 않은 상황을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방법으로 마무리해버렸다. 과감하게 음악계로부터 은퇴를 선언한 것이다. 프랑스식의 그랑 오페라(Grand Opera)에 적응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고 자신의 혁신적인 노력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는 대중들을 상대로 투쟁하는 것도 소모적이라고 느꼈다. 항상 긍정성을 추구했던 천재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간단했다. 과감하게 무대에서 사라지기로 결심한 것이다.

 

 

천재음악가에서 요리의 명인으로

즉흥적이지만 과감했던 로시니의 은퇴는 거의 30여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어졌다. 음악사가들이짧은 영광과 긴 은둔이라고 그의 생애를 표현했던 것처럼 수십 년간 로시니는 창작 활동이나 예술적인 논쟁으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했다. 대신에 자신의 오페라에 삽입된 모티브 중 하나인 요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유럽 왕실의 전속 요리사 역할을 했던 앙토넹 카렘(Antonin Careme)과의 교분은 로시니가 아마추어 이상의 요리 실력과 감식안을 갖추고 있었다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음악계에서 잊혀진 주인공이 된 로시니는 요리의 명인으로 더 유명해지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송로버섯 요리인투르느도 로시니같은 명물이 탄생하는가 하면 로시니식 요리법을 본떠 만든알라 로시니시리즈가 프랑스 미식가들의 관심을 사로잡기도 했다. 진정한 창조는 오페라나 작곡과 같은 기존의 직업과 영역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님을 깨닫게 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또 요리를 통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기도 했다. 로시니의 살롱에는 당대를 대표하는 음악인과 문인들이 드나들었다. 미남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추앙받던 리스트, 오베르, 심지어 자신을 은퇴하게 만들었던 원인 중 하나인 마이어베이어도 자주 방문했다. 샤토브리앙, 알렉산드르 뒤마 같은 유명 작가들도 로시니의 품성과 긍정성을 예찬했다. 중노년의 로시니에게 성공은 최대한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라는 안목이 있었다. 강하게 파고드는 집중력과 빠른 시간 동안에 여러 작품을 써내려 갔던 돌파력을 지녔지만 스스로의 모습이 다양하게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했다. 이런 관점은 모든 상황을 하나의 틀이 아닌 변해가는 모습 그 자체로 인식하는 자세에서 비롯된다. 경영학자 와익(Weick)은 이것을 가리켜마음챙김(mindfulness)’의 미학이라고 표현한다.5 스스로에게 발생할 수 있는 우연과 가능성의 집합을 인정하다 보면 여러 사건들 사이에 상호의존성이 있음을 깨닫게 되고 진정한 명인이 될 수 있다. 디자인 혁신 경영의 원조로 추앙받는 스티브 잡스(Steve Jobs)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모든 사건들은 하나의 점이고 돌이켜 관찰해 보면 그것들이 일정한 방향으로 연결돼 있음을 깨닫게 된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뿐

일부 비평가들은 그가 77세로 장수했던 것에 비해 작품 활동의 기간은 지나치게 짧다고 비판한다. 심지어 모든 작품들이 자기 반복을 거듭하고 있고 유쾌한 정서와 무대연출 자체에 집착한 나머지 비극과 교회음악과 같은 다양한 장르에 눈을 돌리지 못했다는 화살을 날린다. 그러나 이는 로시니가 환경을 읽어냈던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 해석이다. 실제로 그는 노년에 미사, 칸타타와 같은 교회음악 작품을 일부 남겼고노년의 과오라는 제목으로 200여 곡의 컴필레이션 편집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시종일관 그의 삶과 경쟁력에 대한 태도는 유지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합리적인 예측과 시장의 변화에 대한 탄력적인 대응만이 혁신과 생존의 비결은 아니다. 때로는 자기의 코드를 유지하고 즐겁다고 느끼는 상상을 현실에 시도할 때 훨씬 더 큰 성과를 누릴 수도 있다.물론 로시니의 경우에는 그 기회가 빨리 찾아왔고 시대적 조류의 변화에 의해 금세 경쟁의 뒤안길로 밀려나야 했던 측면도 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변화 가능성을 인정하고 고정된 앵글로 바라보지 않았던 천재는 우리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훨씬 다채로운 삶을 살았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변화 자체밖에 없다는 금언이 있다. 로시니는 그것을 자아를 투영하는 관점에도 적용했고 성공이 자신을 스쳐 지나간 시기 이후에도 그 믿음을 지니고 살았다. 19세기 음악계의 대표적인 독설가로 유명한 바그너가파리에서 내가 만난 유일한 천재라고 그를 예찬한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한때 유행처럼 번져 나갔던 비즈니스 모델 개발 방법론이나 컨설팅 프레임워크에 피로를 느낄 지경이라고 고백했던 컨설턴트 출신 경영자를 만난 적이 있다. 대부분의 경영자들은 상당수 변화와 혁신이 예측하기 어려운, 우발적인 현상이라는 점을 감으로 알고 있지만 경영전략을 수립하다 보면 정량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사실들도 정형화된 분석체계로 표현해야 할 때가 있다. 의사결정 프로세스를 표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정한 경쟁 상황이 하나의 틀로 규정지어지는 그 순간부터 경영자는 현실과 시스템의 괴리를 뼈저리게 느끼며 괴로워한다. 그때 우리는 로시니의 마음챙김(Mindfulness)의 미학을 배워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적당히 바보가 된 듯 즉흥적인 순간, 그리고 자기 자신도 언제나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즐겨보자. 이상(李箱)이 말했던 것처럼 가끔은 허공을 날아볼 필요도 있다

 

 

 

 

김혜옥 연세대 음악대학 합창지휘전공 교수hokimbangeunice@gmail.com

천영준 연세대 창조경영센터 선임연구원 taisama@naver.com

 

김혜옥 교수는 줄리어드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학사 및 석사, 웨스트민스터 콰이어 칼리지에서 교회음악 및 합창지휘 석사, 맨해튼 음대에서 같은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레건 바흐 페스티벌, 한국합창제 등을 통해 전문 연구자 및 세미나 강사로 활동해 왔다. 현재는 연세대 음악대학 교수 겸 연세 콘서트 콰이어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다. 2010년 스페인 문화부 주최 국제하바네라콩쿠르에서 최고 지휘자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천영준 선임연구원은 연세대 경영학과 및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정보산업공학과 석사 과정에서 비즈니스 모델 개발 및 경영 전략을 연구했다. 현재 연세대 기술경영협동과정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연세대 창조경영센터에서 협업적 혁신(Collective Innovation) 및 소셜 컴퓨팅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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