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적 혁신은 소비자 중심 경영에서 나온다
서울 마포에서 수년간 개인병원을 운영하다가 1년 전에 강북 모 뉴타운으로 병원을 옮긴 40대 초반 치과의사를 얼마 전 만났다. 요즘 어떠냐는 질문에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의례적인 문답이 오가던 중 이런 질문을 받았다. “여기 와서 처음에 병원을 열었을 때 환자들이 전화해서 무얼 물어봤는지 아세요?” 원장의 나이, 성별, 출신학교 등을 물어보지 않았겠냐고 답했더니 그게 아니란다.
대신 이런 질문을 몇 번 받았다고 한다. “원장님 병원 매장은 분양 받으신 건가요, 임대하신 건가요?” 그런 게 왜 궁금하냐고 되물었더니 “원장님이 여기서 치과를 오래 하셔야 나도 원장님을 믿고 오랫동안 꾸준히 치료를 받을 수 있겠지요”라는 ‘현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개원 초기에 겪은 이런 경험은 환자에게 지금 꼭 필요한 치료만 권하고, 가장 비싼 치료 방법이 아니라 모든 가능한 치료 방법의 장단점을 비교 설명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현명한 소비자(smart consumer)’의 시대가 왔다. 똑똑한 소비의 대상은 온라인에서 쉽게 검색하고 비교 평가할 수 있는 일상재(commodity)에 그치지 않는다. 자동차와 같은 내구재, 병원 등 고급 서비스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2011년 상반기 전체 수입차 판매량 중 2000㏄ 미만 자동차 판매 비중이 40%를 넘어섰다. 3000㏄ 이상 대형차의 판매 비중은 점차 줄어드는 추세다. 이는 소비자들의 가치 중심 구매 성향과 이를 간파한 일부 수입차 업체들의 중소형차 구색 강화가 맞물린 결과다. 반면 아직도 한국에서 고가 고사양 중심의 판매 전략을 고수하고 있는 도요타, 혼다 등 일부 수입차 업체들은 고전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비용 측면에서도 현명한 의사 결정을 한다. 위 치과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제 소비자들은 구매 비용(구입, 설치, 사용에 관련된 비용)뿐 아니라 유지보수 비용과 변경 비용(switching cost), 정보조사 비용까지 고려할 줄 안다. ‘총 보유 비용’을 감안한 ‘평생 가치’가 구매 의사결정의 기준이 된 것이다.
여전히 공급자 중심의 시각에 머무르는 기업은 미래 성장은커녕 생존까지 위협받을 수 있다. 현재 기업이 보유한 기술 역량에 기반해 고객에게 제공할 가치를 정하고 상품·서비스를 푸시(push)하는 방식은 이제 잘 통하지 않는다. 먼저 고객이 원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파악한 후 이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과 역량을 확보해야 성공할 수 있다.
신기술의 경연장과 같은 IT 산업에서도 이런 경향은 나타난다. 애플의 아이폰에서 애플의 자체 기술로 개발한 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10%도 되지 않는다. 경쟁 기업이 최신 기술을 이용한 고사양 게임기를 고집할 때 닌텐도는 저사양 저가 부품을 이용해 가격을 낮춘 게임기 위(Wii)를 내놓아 경쟁에서 승리했다.
정부의 산업 정책도 ‘소비자 중심’으로의 시각 전환이 필요하다. 일부 태동기의 산업 또는 1차 산업을 제외하면 더 이상 정부 주도의 ‘산업 육성·보호’는 큰 의미가 없다. 관세 장벽과 진입 규제 등 국내 기업 보호 정책은 기업이 현실에 안주하게 하고 소비자 후생을 희생시키는 부작용만 낼 수 있다. 고환율 정책으로 당장의 수출을 늘릴 수는 있어도 기업이 해외 시장에서 차별화된 경쟁력을 갖추도록 ‘육성’할 수는 없다.
세계 경제에서 미국이 누려온 절대적 지위는 흔들려도 IBM과 마이크로소프트, 애플, 구글,페이스북 등 여전히 가장 창조적인 혁신 기업들은 대부분 미국에서 나오고 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친소비자적인 정책을 펴는 나라 중 하나다. OECD가 선진 8개국 29개 산업의 물가 수준을 비교해 2004년 펴낸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들은 영국, 독일, 일본 등 다른 선진국 소비자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20% 이상 저렴한 가격에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의욕적으로 도입했다가 실패를 경험한 오픈 프라이스 제도(경영 용어로는 intra-brand competition: 동일 브랜드의 제품도 다른 유통 채널에서는 다른 가격에 팔려 결국 같은 제품끼리 경쟁하는 것과 같음)는 미국에서는 매우 당연한 제도로 받아들여진다.
그 어느 때보다 미래 성장 동력, 창조적 혁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 기업이 고객의 숨겨진 니즈를 간파하고 혁신적인 제품을 내놓아 세계 시장을 뒤흔든 사례는 별로 많지 않다. 한국 소비자들은 한국 기업들의 창조적 혁신에 호응할 준비가 돼 있다. 이제 기업과 정부, 정치가 박자를 맞춰야 할 때다.
한인재 경영교육팀장 epicij@donga.com
필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기자, 경영교육팀장으로 듀크대 MBA,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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