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 지진과 해일 앞에 경제대국 일본도 무기력했다. 하지만 위기와 혼란의 순간에서도 일본인들이 보여준 질서의식은 지진 해일의 가공할 만한 파괴력보다 더 놀랍게 느껴진다. 일본인들은 편의점, 주유소는 물론 가족의 생사를 묻는 공중전화 앞에서도 질서정연하게 줄을 선다.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의식과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하는 일본인의 정서가 자발적인 줄을 만들어낸다.
긴 줄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다. 서울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루이비통 매장 앞에도 입장을 기다리는 고객들이 주말 극장 앞처럼 늘어선 진풍경이 종종 펼쳐진다. 세일이라도 하는 날엔 ‘특별한 고객들을 모신다’는 럭셔리 브랜드 매장 앞이 시골 장날처럼 북적인다.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입장객 수를 통제한다 하더라도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고객들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불편과 비용을 감내하면서까지 기다리는 충성도 높은 고객들이 있으니 줄 세우는 이를 무작정 탓할 수만은 없다.
럭셔리 브랜드 매장이든 국밥을 파는 시골 장터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든 기업과 상인에게 피크타임(Peak time)과 대기시간(Waiting time) 관리는 골칫거리다. 서비스는 상품과 달리 저장할 수 없다. 발생하는 순간 사라진다. 재고라는 개념도 없다. 따라서 수요가 폭증하는 피크 타임에는 일시적으로 공급이 달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수롭지 않게 보이는 이 대기시간이 고객 만족도에 미치는 영향은 생각보다 크다. 심지어 기다리는 시간이 실제 서비스 시간보다 고객 만족도에 더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영문도 모르고 기다리거나, 기다리는 동안 새치기로 공정하지 못한 대우를 받았다거나, 불편한 상황에서 기다려야 하거나, 혼자서 기다려야 할 때 사람들의 불만은 더 커진다. 피크타임 관리를 위해 무작정 인력과 설비를 늘릴 수도 없다. 게다가 서비스 공급이 늘어난다고 해서 이에 비례해서 대기 시간이 줄지도 않는다.
아웃소싱이나 전략적 제휴를 통해 공급을 일시적으로 확대하거나 고객이 몰리는 특정 시간대를 제외한 나머지 시간에 할인 혜택과 각종 쿠폰을 제공해 수요를 분산시킬 수는 있다.이는 추가 비용이 들어가는 일이다. 럭셔리 브랜드처럼 높은 충성도를 가진 고객과 매우 한정된 공급자가 존재하는 판매자 시장(Seller’s market)에서는 줄 세우기를 통해 고객에게 이 비용을 전가한다. 서비스 가치가 클수록 사람들은 더 오래 기다린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이제는 중저가 수입 패스트패션 브랜드들까지 브랜드 파워를 과시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고객 줄 세우기에 나선다.
진정한 고수들은 고객의 심리적 경험(psychological experience)을 조절하는 방법을 활용한다. 실제 기다리는 시간과 고객이 인지하는 시간의 길이가 다르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고 예측 가능하다면 더 오래 기다릴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엘리베이터 앞에 거울을 설치하는 이치다.
크리스피크림은 주문 대기 줄 옆에 도넛 생산 과정을 볼 수 있는 투명 창을 설치한다. 미국 뉴욕 록펠러센터는 기다리는 고객들에게 다큐멘터리 영화를 틀어준다. 고객이 느끼는 심리적 시간을 줄여주기 위해서다. 줄 서기를 바꿔 고객 만족과 추가 수익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기업도 있다. 미국 디즈니랜드는 줄을 서지 않고도 지정된 시각에 놀이기구에 입장할 수 있는 ‘패스트패스(FASTPASS)’ 티켓을 판매했다. 줄에 발이 묶인 고객은 매출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패스트패스 티켓으로 줄에서 해방된 고객들은 기다리는 시간에 다른 서비스를 추가로 이용했다. 고객 만족도는 물론 놀이공원의 수익도 늘었다.
선진 기업만의 노하우는 아니다. 서울 무교동에는 40년도 더 된 북엇국집이 있
다. 인근 직장인들이 한꺼번에 몰리는 점심식사 시간에는 10m 넘게 긴 줄을 선다. 이 식당에는 점심 메뉴가 하나다. 앉자마자 밥 딸린 북엇국이 나온다. 웬만한 성인 남자라면 10분도 안 돼 식사를 뚝딱 끝낸다. 줄은 길어도 자리 회전은 빠르다. 식당 주인이 얘기해주지 않아도 한두 번만 와보면 늘어선 줄만 보고 얼마를 기다려야 할지 짐작할 수 있다. 깐깐한 직장인들도 군말없이 줄을 선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스놉 효과(속물 효과, 많은 사람이 구입하면 하찮다고 생각해 수요가 오히려 떨어지는 현상)만을 우려한 ‘묻지마 줄 세우기’는 영원할 수 없다. 시장의 판도가 바뀌면 언제든지 고객의 반란에 직면할 수 있다. 영문도 모른 채 자신의 이익까지 희생해가며 긴 줄을 언제까지고 참아주는 순진한 고객은 없기 때문이다. 무교동 북엇국집의 이유 있는 줄서기가 세련되지 않아도 빛이 나는 이유다.
박 용 기자 parky@donga.com
박용
- 동아일보 기자
-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부설 국가보안기술연구소(NSRI) 연구원
- 한국정보보호진흥원(KISA) 정책연구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