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1943년 후반이 되면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과 일본군의 입장이 확연히 바뀐다. 호주까지 위협하면서 태평양의 석권을 눈앞에 뒀던 일본군은 과달카날과 뉴기니 전투에서 미군에 연거푸 패하며 공세에서 수세로 돌아서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의 전 과정을 알고 있는 후대인이 내리는 평가다. 당시로 돌아가면 미일 양측 모두 한치 앞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두 개의 섬에서 미 해병대가 승리했다고 하지만 바다에서 함선의 성능과 전투력 수준은 여전히 일본이 우위였다. 전투기 역시 일본의 제로센은 속도와 기동성에서 느리고 둔한 미군 전투기를 압도했다.
미군이 믿는 것은 일종의 물량공세였다. 수와 생산력의 우위, 그리고 이를 적절히 활용한 창의적인 전술로 미군은 바다와 하늘에서 일본군과 대등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나 아직 승리를 확신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단지 기계적 성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길 수도 있다는 자신감을 확인한 정도였다. 이 정도 우위는 한 번의 실수로 금방 날아갈 수 있었다. 세계의 전쟁사는 그러한 역전의 기록으로 가득 차 있다.
일본군은 미군이 태평양과 유럽이라는 두 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일본군도 미 본토까지 점령할 구상은 하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태평양의 석유와 전략물자였다. 일본군이 그 불굴의 사무라이 정신으로 강력하게 수비하면서 미군에 극도의 타격을 입힌다면 미군은 어느 선에서 일본과 타협할 것이라는 게 일본의 구상이자 기대였다. 결국 이 전략의 성패는 태평양 중서부에 있는 산호섬 타라와로 밀어닥칠 미군의 상륙 작전을 어떻게 저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게 됐다.
태평양 중서부의 환초(環礁) 타라와
타라와는 태평양 길버트 제도에 있는 환초(環礁)로 15개의 작은 산호초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섬들 중 미군의 상륙목표인 베티오는 길이 3km, 폭 1km 정도의 작은 섬이었다.
일본군은 섬을 빼앗기고 죽더라도 미군에 최대한의 희생을 안겨주겠다는 전략을 세웠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일본군의 특기가 아닌가. 그들은 항복보다는 죽음을 택하는 불굴의 사무라이들이었다.
미군도 그 점이 걱정이었다. 타라와는 요새화된 섬에 대한 최초의 상륙작전이었다. 일본군은 미군의 공격을 예측하고 베티오를 최대한 요새화했다. 이를 위해 방어 사령관도 공병 출신인 사이치로 도미나리 소장을 임명했다. 그는 전공을 살려 섬 전체를 치밀하게 요새화했다. 이 지역에서는 섬 외곽에 산호가 과성장해 발달한 산호초를 담장처럼 두르고 있다. 이곳을 넘어서면 다시 해변까지 바다가 형성된다. 이 바다의 폭은 긴 곳은 1km, 짧은 곳은 400m 정도였다. 일본군은 이 산호초와 해변사이의 바다를 ‘킬링 존(killing zone)’으로 지목하고 교묘한 함정을 팠다. 바다 속에 용의 이빨과 같은 콘크리트 장애물을 설치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해변에 다가올수록 입구가 좁아지는 V자형을 이루도록 설치했다. 미군 상륙정들은 해변에 다가올수록 서로 맞붙게 될 것이고 일본군은 바로 이 지점을 노리고 집중포화를 퍼붓는다는 작전이었다.
안타깝게도 이 용 이빨 장애물은 미완성에 그쳤다. 또 미군이 교묘히 우회하는 바람에 킬링 존은 예상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미군이 킬링 존의 살육을 피했다고 해도 장애물은 겹겹이 남아 있었다.
일본군은 모든 예상 상륙 지점에 토치카와 바리케이드를 설치했고 포와 기관총을 배치했다. 토치카와 포좌들은 이중, 삼중으로 구성돼 서로 엄호하도록 돼 있었다. 작전이 시작되기 전 사령관은 전투병과 출신인 켄지 시바자키 소장으로 교체됐다. 그는 이렇게 장담했다. “백만 명이 백 년을 공격해도 이 섬을 점령하지 못한다.”
베티오 상륙작전
공격을 맡은 미 해병 2사단의 지휘부는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요새화된 진지를 무력화시키는 방법은 사전 포격 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사전 포격은 상륙 3시간 전부터 시작됐다. 1시간 이상 함포를 때리고, 그것이 끝나자 다시 항공기들이 몰려들어 있는 대로 폭탄을 퍼붓고 기관총을 쏘아댔다. 병사들의 목격담에 의하면 포격이 어찌나 대단한지 섬 전체를 들었다 놓는 것 같았다고 한다. 일부 병사들은 저 정도 포격이면 개미새끼 한 마리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장시간의 포격을 지켜보다 지쳐 이젠 빨리 상륙하자는 마음이 들 정도였다고 한다.
드디어 상륙부대가 돌진을 시작했다. 그러나 산호초에 도착했을 무렵, 병사들은 자신이 지옥의 웅덩이에 내던져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륙용 주정(舟艇)이 산호초를 통과하려면 산호초와 수면과의 사이가 최소한 120cm 이상은 돼야 했다. 미군은 해도에 따라 최소 깊이가 확보된다고 생각해 진격했다. 그러나 미군이 본 해도는 100년 전의 것이었고, 그것도 만조시의 해도였다. 막상 산호초에 도착하니 어떤 것은 육지처럼 바다 위로 나와 있고, 물에 잠긴 곳도 수심이 얕아 통과할 수 없었다. 결국 상륙부대 1진은 베티오섬 해변이 아닌 산호초에 상륙하고 말았다. 해변까지 가려면 수백 미터의 바다를 걸어서 건너야 할 판이었다.
이 순간에 일본군이 사격했더라면 1진은 전멸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 포대는 침묵했다. 일본군도 미군이 그곳에서 멈출 줄은 몰라서 산호초 안 킬링 존에 들어오면 그때 사격하도록 훈련을 받았다. 매뉴얼에 절대 복종하도록 교육받은 그들은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 난감한 상황을 해결한 게 LVT(수륙양용차)였다. 타라와 전투는 LVT가 처음 투입된 전투로 기록된다. 산호초와 얕은 수심으로 고민하던 미군 부대의 한 중령이 당시 막 발명된 LVT의 가치를 알아봤다. 반대론도 거셌지만, LVT가 없으면 작전을 중단하겠다는 사단장의 강력한 지원으로 120대의 LVT를 확보했다. 미군의 LVT의 도입과 매뉴얼 집착에 따른 일본군의 실기(失機)로 미군 1진, 1200명이 별 손실을 입지 않고 해변에 상륙했다. 미군의 상륙으로 일본군의 공격은 해변의 미군과 후속 상륙부대로 분산됐다. 1진의 운 좋은 상륙이 없었다면 타라와 작전은 미군의 일방적 참극으로 끝났을 것이다.
1진이 상륙에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미군도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우선 LVT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결국 모선에서부터 해안까지 구간을 LVT로 단번에 실어 나를 수가 없어서, 모선부터 산호초까지 구간은 원래 미군이 즐겨 쓰던 상륙용 주정(히긴스 보트)으로 수송했고, 이후 산호초부터 해안까지의 구간을 LVT가 계속 왕복하며 날랐다. LVT는 병사뿐 아니라 보급품도 날라야 했고, 해변에서 부상병을 싣고 산호초 지역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이른바 ‘피스톤 수송’)해야 했다.
미군 1진이 상륙한 이후 일본군도 매뉴얼을 변경해 피스톤 수송이 시작되는 산호초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LVT와 상륙부대의 희생이 점점 커져갔다. 자신들을 실어 나를 LVT가 부족한 상황에서 포화가 빗발치자 병사들은 아예 물에 뛰어들어 긴 바다를 걸어갔고, 결국 중대, 대대가 상륙과정에서 거의 전멸했다.
상륙한 병사에겐 두 번째 악몽이 기다리고 있었다. 해변 모래사장에는 나무로 만든 일본군의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었는데, 모래사장의 폭은 겨우 1m 정도였다. 일본군 토치카 덕에 미군은 하루 종일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포격으로 떨어져 나간 팔다리가 모래사장에 널리고 바다에 둥둥 떠다녔다. LVT는 병사들의 시체를 피할 수가 없어 그냥 밟으며 지나가야 했다. 일본군의 포화를 피해 LVT가 흩어지는 바람에 상륙부대는 마구 뒤섞였다. 장교들은 상륙하자마자 3분의 2 이상이 전사해 편제와 지휘계통이 붕괴돼 버렸다.
일본의 실책-방어선 위치 선정 실패와 경직적 태도
타라와 전투는 1943년 11월 20일에서 23일까지 4일간 진행됐다. 결과는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타라와가 아무리 작은 섬이라고 해도 해안 전체에 방어선을 구축하려다보니 미군이 상륙할 당시 방어 공사가 완성되지 못한 지역이 있었다. 여기저기 작은 사각과 빈틈도 있었다. 미군은 바로 이 틈을 파고들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일본군 시각에서 타라와 전투의 실책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방어선의 위치 선정이다. 요새화한 진지 구축을 통한 방어전은 상륙작전을 감행한 적에게 막대한 희생을 강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라와가 4일 밖에 버티지 못한 이유는 방어선을 해안에 포진시켰기 때문이다. 효과적인 방어를 원했다면, 해변이 아닌 내륙 산지에 방어선을 둘러쳐 집중력을 발휘해야 했다.
둘째, 급박하게 바뀌는 위기 상황에 적절히 대응치 못하게 한 경직성이 문제였다. 만약 전투 첫날 미군 상륙부대 1진을 향해 일본군이 과감하게 공격했더라면 미군은 타라와 상륙에 실패했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일본군들은 매뉴얼에만 집착해 기선을 제압할 기회를 놓쳤다. 타라와 전투 첫날 전세는 일본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이었다. 미군 스스로도 전멸을 각오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매뉴얼에 집착해 당시 그들의 전매특허인 만세돌격을 하지 않았다. 도미나리 소장과 시바자키 소장 모두 일본군에서는 드물게 무모한 공격을 싫어하는 장군이었던 탓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어쨌든 타라와 사건으로 가뜩이나 공격적인 일본군은 이런 태도를 크게 비난하게 된다. 이후 상륙작전에서 일본군은 더더욱 무모한 돌격전술을 선호하게 됐고, 덕분에 일본군은 미군 대비 거의 10대 1의 희생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타라와 전투가 일본과 미국에 남긴 것
일본군과 미군의 차이는 바로 이 지점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일본의 타라와 수성 실패의 근본적 원인은 방어선 구축의 전략적 위치 선정 실패와 위기 발생시 유연한 대처 능력 부재에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 같은 근본 원인을 직시하지 않고 단지 ‘만세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표면적 결과에만 집착했다. 그에 따라 이후의 전투에서 한층 더 무모한 돌격전술을 선호하게 됐다. 매뉴얼에 묶이는 경직된 사고를 고칠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매뉴얼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단점보다 장점이 많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반면 미군의 태도를 보자. 비록 승리했다고는 하지만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미국에 타라와 전투는 실패한 승리였다. 고작 4일간의 전투에서 4400명의 사상자를 낸 탓에 승리에도 불구하고 당시 온갖 비난 여론이 빗발쳤다. 그러나 미군은 타라와에서의 전투를 통해 상륙작전 시 사전 포격의 필요성과 LVT의 중요성이라는 굵직한 교훈부터, 무전기에는 반드시 방수 장치를 달아야 한다는 식의 세세한 지침까지 엄청난 교훈을 얻었다. 이것은 그 후에 벌어진 수많은 작전에서 미군 병사들을 구해내는 계기가 됐다. 타라와 전투에서 겪은 혼란과 실수는 지금까지도 상륙 작전의 교본으로 내려올 정도다.
실패는 누구나 언제든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오늘의 실패를 내일의 성공을 위한 밑거름으로 삼아갈지, 아니면 더 큰 실패를 초래할 불씨로 남겨놓을지다.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론적 문제를 보는 수준을 넘어 그 뒤에 숨어 있는 문제의 근본 원인을 직시하는 혜안이 필요하다.
임용한 경기도 문화재 전문위원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