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증권가에서 자문형 랩(wrap) 상품의 수수료를 두고 가격전쟁이 벌어졌다. 박현주 미래에셋그룹 회장은 2월 7일 “증권사가 제공하는 서비스 수준을 고려하면 자문형 랩 수수료가 지나치게 높다”며 포문을 열었다. 실제로 자문형 랩의 수수료는 자산의 3%에 가까우며 이 중 80% 가량이 판매사 몫인 판매수수료다. 이는 일반 주식형 펀드에 비해 두 배 이상 높은 수준이다. 일부 증권사들이 랩 판매에 주력한 이유가 높은 수수료 때문이라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던 참이었다. 급기야 10일 미래에셋증권과 현대증권은 자문형 랩의 수수료를 1%포인트 이상 내리겠다고 발표했다.
반면 일부 증권사들은 고객에게 각종 맞춤형 부가 서비스를 제공하기 때문에 랩 상품의 수수료가 지나치게 높은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삼성증권의 박준현 사장은 박 회장의 발언 이후 “가격은 시장에서 결정되는 것”이라며 “수수료 경쟁보다는 고객 가치와 만족도를 높이는 데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삼성증권은 자문형 랩 시장의 절반가량을 점유한 랩 시장의 강자다.
랩 시장은 2010년 초 20조 원 규모에서 1년 만에 35조 원 이상으로 급성장했다. 이를 두고 단지 높은 수수료 수입을 노린 증권사의 푸시(push) 마케팅 때문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일부 랩 상품이 올린 높은 수익률을 보고 개인투자자들의 돈이 몰린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초과이익을 올리지 못한 랩 상품도 많았고, 2010년 말 대표적 투자자문사들의 기간별 평균 운용 수익률은 대부분 지수 수익률을 밑돌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랩 투자자들에게 높은 수수료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랩 상품에는 보통 최소 가입금액이 설정돼 있다. 일부 상품의 최소 가입금액은 1억 원 이상이다. 투자를 많이 할수록 받을 수 있는 부가서비스도 많아진다. 이런 상품 구조로 랩 상품에 가입한 사람은 ‘특별한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자아표현적 편익(self-expressive benefits)을 누릴 수 있게 된다. 아무나 살 수 없다는 희소성이 소비를 자극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높은 가격을 설정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이 구입할 수 있게 되면 가격은 물론 수요마저 떨어진다는 스놉 효과(snob effect·속물 효과)가 발생하는 것이다.
일부 금융전문가들이 랩보다 더 발전된 형태의 투자상품이라고 말하는 헤지펀드에서는 스놉 효과가 더 극명하게 나타난다. 헤지펀드의 최소가입금액은 보통 수백만 달러에 이른다. 베일에 가려진 헤지펀드의 모집 방식과 운영 체계는 신비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워튼스쿨의 자그모한 라주(Jagmohan Raju) 교수에 따르면 다년간 실적을 놓고 보면 최고의 헤지펀드조차 평균 이상의 수익률을 올린 것은 단 몇 년뿐이라고 한다. 그래도 헤지펀드의 연간 수수료는 자산의 3.5%에 달하며, 유명한 펀드매니저들은 자산의 4∼6%를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이런 스놉 효과는 얼마나 지속가능할까? 이제 한국 증권사들이 더 이상 자문형 랩에 3% 수준의 높은 수수료를 매기기는 어려워 보인다. 유사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요즘 서울은 물론 주요 도시 곳곳에서 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들을 볼 수 있지만 타워팰리스와 삼성동 아이파크가 누렸던 프리미엄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다. 신용카드 시장에서 플래티넘 카드는 더 이상 상류층으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표현해주지 못한다.
경쟁사가 쉽게 모방하기 힘든 차별적인 가치를 주지 않는 한 인위적으로 설정한 프리미엄 효과는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자신이 애써 형성한 프리미엄 이미지를 먼저 포기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특정 산업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이에 안주해서는 안 된다. 어디서 어떤 경쟁자가 나타나 기존의 산업 간 경계마저 무너뜨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21세기 초경쟁 시대에는 쉼 없는 혁신을 통해 고객에게 끊임없이 더 큰 가치를 줄 수 있는 기업만이 성장을 지속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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