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기원전 480년 9월 23일 새벽, 미처 날이 밝기도 전에 지엄한 페르시아의 황제 크세륵세스는 아이갈레오스산으로 올랐다. 그곳에는 이미 전망대가 만들어져 있었다. 동이 트자 하늘과 바다가 하나가 된 듯한 에게해의 아름다운 바다와 섬들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평온한 아침, 탐욕스러운 황제는 일생일대의 장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378척의 그리스 함대는 600척이 넘는 페르시아 함대와 격돌하기 직전이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원래 1000척이 넘었으나 폭풍과 이전의 전투로 400척 이상이 파괴된 상황이었다.)
크세륵세스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페르시아는 이미 3라운드 경기에서 2라운드를 이겼다. 테르모필라이에서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그리스 육군을 전멸(1라운드)시켰고, 테베와 아테네를 점령(2라운드)했다. 그리스 땅에서 남은 곳은 스파르타가 있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아테네의 함락으로 ‘보트 피플(boat people·난민)’이나 다름없게 돼 버린 아테네의 수군 뿐이었다.
그리스군의 내분(內紛)
그리스 수군이 아테네군만으로 이뤄진 건 아니었다. 아테네가 전력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기는 했지만, 스파르타와 여러 폴리스, 식민지 전력으로 구성된 연합부대였다. 그러나 육군의 패전으로 그리스 해군은 심하게 동요하고 있었다. 페르시아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육군과 해군이 동시에 진격할 조짐을 보이자, 비(非)아테네 계열의 수군은 “그리스의 남은 땅을 지키기 위해 펠로폰네스 반도로 후퇴해서 육군과 연합작전을 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아테네의 보트 피플들은 “그렇게 한다면 자신들은 이탈리아로 항진해서 정착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리스군 내부의 갈등은 꽤나 심각해서, 회의석상에서 막말이 오갈 정도였다. 그리고 이 소식은 그리스 진영에 심어 놓은 페르시아 첩자들에 의해 바로바로 황제에게 전해졌다.
크세륵세스의 목표는 펠로폰네스 반도가 아닌 그리스 해군이었다. 그것만 궤멸시키면 그리스는 항전을 포기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리스 해군은 좁은 살라미스 해협 안에 틀어박혀 있어서 공격할 수가 없었다. 좁은 지역에서는 병력의 우위라는 장점을 살릴 수 없었고, 1대 1의 격돌에서는 그리스군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을 넓은 바다로 끌어내려 했지만, 그리스군은 바보가 아니었다.
크세륵세스가 쓸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살라미스 해협을 봉쇄하고 장기전으로 가서 그리스군이 와해되기를 기다리는 전술이다. 승리가 확실한 방법이었지만, 크세륵세스는 시간이 없었다. 다음은 그리스군의 내분에 기대를 거는 것이었다. 그리스인의 지역갈등과 정치적 야비함, 정치가의 타락은 통일제국을 이루고 있는 페르시아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페르시아는 황금과 협박으로 그리스 도시들을 농락했고, 종종 쉬운 승리를 거두어왔다. 그리스군 내부의 험악한 분위기를 매일 같이 듣고 있던 크세륵세스는, 결국 내분에 좀 더 기름을 치기로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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