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예측이나 시나리오 플래닝 없이도 충분히 기업을 경영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쓸데없는 일’에 신경 쓰지 않아 마음이 편하겠죠. 하지만 미래를 준비하지 않는 기업은 예상치 못한 갑작스런 변화 때문에 순식간에 몰락할 수 있습니다. 음반업계를 보세요. 속 편하게 CD만 팔려고 하다가, MP3의 등장과 함께 초토화가 됐습니다.”
경쾌하고 약간은 장난기 어린 말투로 말하던 그의 표정이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잠깐 동안 엄숙해졌다. ‘순식간에 망할 수 있다’란 바로 그 대목에서였다. 곧바로 웃는 얼굴이 돌아왔지만 순간의 진지한 모습은 여운을 남겼다.
매튜 레이넌(Matthew Ranen) 이사. 미국 GBN(Global Business Net -work)의 시나리오 플래닝 및 기업혁신 전문가다. GBN은 모니터그룹의 미래연구 기관이자 전략컨설팅 회사로 구소련의 몰락을 예측했던 피터 슈워츠가 설립했다.
레이넌 이사는 자동차와 금융, 정유, 상하수도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시나리오 플래닝 프로젝트를 진행한 베테랑으로, 한국 대기업의 시나리오 플래닝에 조언을 해주기 위해 지난달 말 방한했다. 그는 DBR와의 인터뷰에서 시나리오 플래닝이 중요한 이유와 한국 기업들이 주의해야 할 부분, 자신이 생각하는 미래의 모습 등에 대해 깊이 있는 조언을 내놓았다.
단순한 예측으론 아는 만큼만 보여
레이넌 이사는 시나리오 플래닝이 꼭 필요한 이유로 복잡성의 증대를 들었다.
“최근 들어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로 기술 발전의 속도가 빨라졌습니다. 시장 경쟁은 훨씬 치열해졌지요. 변화의 양상 역시 복잡해졌습니다. 거의 모든 변화가 불연속적입니다. 여기다 산업과 기업들 사이의 연관성도 커졌습니다. 세계의 한쪽에서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날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그는 시나리오 플래닝의 역할은 이런 복잡한 세상에서 전략적인 위험과 숨겨진 기회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시나리오 플래닝은 보통 때의 시각으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여 줍니다. 모든 가능성을 체계적으로 검토하는 방법론이기 때문이죠. 단순한 예측으로는 자기가 아는 만큼만 보입니다. 훌륭한 시나리오는 자기 산업의 바깥에 있는 것과, 보통은 간과하고 지나치는 것, 사회와 기술의 흐름 등 파급력을 가질 수 있는 모든 변수(driver)를 짚어 줍니다.”
레이넌 이사는 그러나 시나리오 플래닝은 족집게처럼 미래를 예견하는 도구는 아니라고 말했다.
“시나리오 플래닝은 무한한 가능성 가운데 중요한 요소를 찾아낸 후 3∼5개의 ‘가능한 미래’를 그려 보는 작업입니다. ‘정답’은 최상과 최악의 시나리오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것이지요. 많은 CEO들이 하나의 정답을 원하지만, 시나리오는 모든 것을 보여주는 ‘예언자의 수정 구슬(crystal ball)’이 아니란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기업이 해야 할 일은 경영 환경에 심각한 파급력을 줄 수 있는 다양한 요소를 찾아 대응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한국 기업들 지나치게 수치만 추종
레이넌 이사는 한국 기업들의 미래 전략과 시나리오 활용 수준에 대해 “시나리오 플래닝의 기본이 되는 논리적 사고 능력과 이해 능력은 충분히 있다”며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러나 곧 “한국 기업들은 과거의 성공 경험을 통해 미래를 바라보려 한다”며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조목조목 지적했다.
“시나리오 플래닝이 기업의 전략에 영향을 주려면 고위 경영자들이 시나리오 분석 결과를 신뢰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 기업들은 지나치게 ‘증거’를 요구합니다. 데이터가 중요한 것은 당연하죠. 하지만 미래를 읽기 위해서는 수치만을 믿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힘은 숫자가 아니라, 사람들로부터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바로 시나리오 플래닝을 할 때 사람들의 감정이나 심리적 요소를 중요시하는 이유입니다.”
그는 이어 “조직원들이 상상력이 담겨 있는 도전적인 대화를 해야 한다“며 ”한국 기업의 서열의식이 미래의 가능성을 보는 데 걸림돌이 된다”고 말했다.
레이넌 이사는 하지만 ‘기업의 근시안적 시각’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라고 덧붙였다. 주주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는 기업이 단기적 이익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는 “다만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현실을 넘어선 것을 보려는 노력은 잊지 말아야 한다”며 “한국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좀 더 넓은 시야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