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11월. 글로벌 기업 제너럴일렉트릭(GE) 임원 51명이 대거 일본으로 몰려왔다. 임원 교육 프로그램인 BMC(Business Management Course)의 일환으로 방문한 것이다. 교육 프로그램이지만 참석자들은 특별한 과업을 부여 받았다.
임원들은 일본 기업과 협력하거나 일본 기술을 활용해 GE의 성장 기회를 모색하라는 ‘미션’을 받았다. 4일 동안 무려 100여 곳을 둘러봤다.
며칠 뒤 미국 뉴욕주의 크로톤빌연수원에서 제프리 이멜트 GE 회장을 포함한 최고경영진과 마주한 자리. BMC에 참가한 임원은 이렇게 말했다.
“일본 혼다사를 둘러본 뒤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소형 엔진에 강한 혼다와 대형 엔진의 강자인 GE가 손을 잡으면 어떨까요? 15∼20인승 비행기 엔진 시장의 경쟁자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합작사를 만들면 승산이 있습니다.”
이 제안은 즉각 채택돼 일사천리로 실행됐다. 약 1년 뒤 ‘GE혼다에어로엔진’이 탄생했다.
#2
2010년 5월. GE의 임원들은 또 다시 아시아를 찾았다. 이번에는 한국이었다. 임원은 45명으로 규모는 비슷했지만, 머무는 기간은 2주일로 훨씬 길었다. 글로벌 시장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임원들 역시 글로벌 리더십을 기르는 게 필수라는 판단이 작용했다. 하지만 목표는 같았다. 현지 시장의 성공 전략을 GE의 성장 전략에 접목시켜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는 것이었다.
임원들은 삼성전자, 포스코 등 주요 기업 및 기관들을 잇달아 방문하면서 질문을 퍼부었다. 참가자들은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배우려는 의지가 있었고, 일과가 끝나면 팀별 토론 활동을 벌였다. 이들 역시 일본 BMC에 참석했던 임원들처럼 크로톤빌연수원에 가서 이멜트 회장에게 한국에서 수행했던 과제를 보고하고, GE의 성장 전략을 논의했다.
임원의 경쟁력은 기업의 경쟁력과 직결된다. 임원 한 명이 수백 명의 직원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임원들에게 체계적인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기업은 많지 않다. 바쁜 일상에 치여 임원들이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은데다 기업도 임원 교육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덜하다.
그러나 세계 최초의 사내대학 크로톤빌연수원을 설립하고, 교육에 연간 12억 달러를 쏟아붓는 GE는 다르다. 특히 BMC에 참석한 임원들은 단순히 강의실에 앉아 수동적으로 강의를 듣는 게 아니라, 마치 컨설턴트처럼 특정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 문제는 자신의 업무와 무관하면서도 GE가 당면한 실제 비즈니스 현안이다. BMC는 한 해에 3차례 진행된다. 참석 인원도 회당 45명 안팎으로 연간 150명을 넘지 않는다. GE 임직원이 약 30만 명인 점을 감안하면 극소수 엘리트만이 이 교육을 받는 셈이다. 올해 한국에서 이뤄졌던 BMC를 중심으로 황 수 GE코리아 사장과 박래익 GE리얼에스테이트 대표, 조병렬 GE코리아 상무와의 인터뷰를 통해 BMC 성공 요인을 분석했다.
1.‘하면서 배운다’, 사업 현안이 곧 교육 주제
BMC는 전형적인 액션 러닝(Action Learning)이다. 액션 러닝은 이른바 실행하면서 배우는 과정(learning by doing)을 통해 개인과 조직이 모두 성장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보고 듣고 배운 것을 본인이 직접 행동으로 옮길 때 학습 효과가 더 크다는 점을 감안해 만들어졌다. BMC의 목적은 글로벌 경쟁 환경에서 일하는 데 필요한 리더십, 비즈니스 스킬을 연마하는 것이다. 황 수 GE코리아 대표는 “글로벌 사업 환경에 기민하게 대처하는 데 초점을 뒀다”며 “보통 연수가 참석자들에게 지식이나 정보, 기술을 전달하는 것이라면, BMC는 거꾸로 참가자들로부터 아이디어를 수렴하고 서로 리더십을 배우게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열린 BMC의 주제는 ‘한국 기업(Korean Company)’과 ‘디지털화(Digitization)’였다. 세부적으로 한국 기업은 ‘대기업 시스템’ ‘수출 플랫폼’ ‘건설엔지니어링(EPC) 기업’으로, 디지털화는 ‘인터넷과 모바일’ ‘디지털과 연구개발’ ‘녹색과 디지털’로 각각 나눴다. 주제별 참석자 45명을 6개 팀으로 나눠 주제에 맞춰 각각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이는 GE의 사업 현안을 BMC의 주제로 삼아 임원들이 같이 고민하고 가능하면 실제 사업 아이디어를 얻기 위한 것. 이 주제는 3개월마다 열리는 전사 최고 경영진회의(Corporate Executive Council)에서 선정됐다. 이 회의에는 GE의 회장, 부회장, 전 사업부의 최고경영자와 전사 지원 담당 수석 부사장 등 40여 명이 참석했다.
이번 주제 역시 GE가 새로운 한국 전략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경영진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GE 경영진은 한국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비교적 빨리 극복했고, 중동 플랜트 시장과 세계 가전 및 자동차 시장 등에서 한국 기업의 경쟁력이 높아졌다는 점에 주목했다. 또 2004년, 2005년 이뤄진 현대캐피탈, 현대카드와의 성공적인 합작도 주목했다. 뿐만 아니라 인천 송도신도시의 글로벌U-헬스R&D센터의 설립 협약과 SK건설과의 오성 복합화력발전소 장비 납품 계약 등 한국기업과의 합작 사례가 잇따르자 한국에서 사업 기회를 찾기 위해 이번 BMC 주제를 한국으로 정하게 됐다.
GE는 시장 규모가 절대적으로 큰 것은 아니지만 역동적인 한국 경제가 GE의 성장 전략 수립에 새로운 통찰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한국에서 BMC를 개최했다.
2.고성과 임원에만 교육 집중
BMC 교육 대상자는 고위 임원(Executive, Senior executive)이다. 그런데 임원이라고 해서 BMC에 무조건 참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대부분의 기업이 승진 대상자나 일정 직급의 직원을 대상으로 교육시킨다면 GE는 잠재력이 큰 직원(high potential)만을 대상으로 교육을 진행한다. GE에서 오래 근무했더라도 리더십 교육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하다.
GE는 임원을 승진시키면 18개월 미만의 임원을 대상으로 하는 MDC(Manager Development Course)를 진행하는데, BMC는 MDC에 참여한 사람을 우선 대상자로 한다. BMC 교육 대상자는 철저하게 성과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선정된다. 360도 평가(다면 평가), 적성(talent) 및 역량 평가, 리더십 교육 훈련 결과, 개인의 성과 및 가치관을 평가하는 ‘세션C’ 등 1년 내내 진행되는 평가 결과를 두루 감안한다. 특히 세션C의 비중이 크다. 세션C의 평가 등급은 ‘롤 모델’ ‘엑설런트’ ‘스트롱 컨트리뷰터’ ‘개발 필요’ ‘불만족’ 등 5가지로 나뉘는데, BMC는 상위 2개 등급을 수년간 연속으로 평가 받은 사람으로 한정한다. 이 과정에서 고위 직급의 비즈니스 리더와 인사 책임자가 BMC 참가자를 최종 결정한다.
GE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런 엄격한 절차를 거쳤기 때문에 유능한 임원들이 서로 자극을 받으며 학습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더 높은 학습 효과를 위해 BMC의 팀도 매우 다양하게 구성한다. 특히 소속 국가와 사업부, 직무가 겹치지 않게 한다. 실제 한국을 방문한 BMC의 한 팀은 모두 7명이었는데 이들의 국적은 미국, 프랑스, 일본, 영국, 브라질 등으로 각기 달랐다. 사업 분야도 항공, 운송, 미디어, 캐피탈, 전사금융, 조명 등으로 다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