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본사가 있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서현동의 삼성플라자 분당점은 삼성물산의 서울 이전을 계기로 운영 주체가 바뀌면서 변화가 요구됐다. 필자는 삼성플라자를 인수해 새롭게 운영을 맡은 애경의 대응에 주목했다. 우선 삼성과 애경은 브랜드 파워 측면에서 격차가 컸다. 경기도 용인시 죽전에 유통 강자인 신세계백화점이 새롭게 문을 여는 등, 비록 지역적으로 다소 떨어져 있기는 했지만 상권 측면에서도 근본적인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삼성물산의 이전은 직원 2000여 명의 이동뿐만 아니라 주변 주거 가격에까지 영향을 미칠 만큼 위력을 발휘했다. 이런 시점에서 새롭게 주인이 된 애경이 과연 어떤 공간으로 시장 주도권을 확보할 수 있을지 관심을 갖고 지켜봤다.
애경은 삼성플라자를 대대적으로 리모델링해 지난해 3월 AK플라자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1년간 성적표는 어떨까. AK플라자는 서울 강남 상권과 맞먹는 분당 지역에 자리한 점을 감안하면 기대보다 저조했다. 오히려 AK플라자 바로 앞에 문을 연 작은 매장인 스페인 패스트패션 업체의 자라(ZARA)의 집객(集客) 효과가 더욱 컸다.
시장 변화 반영이 아쉬운 이유
스페이스 마케팅은 사람들에게 ‘감동’의 경험과 ‘낯선’ 경험, 그리고 ‘∼하고 싶다’라는 희망의 경험 전략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AK플라자는 이미 높아진 사람들의 높아진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했다. 대대적으로 리모델링을 했다고 하지만 소비자들에겐 그저 인테리어 조금 바꾼 것으로 비쳤을 뿐 새로운 느낌을 주지 못했다. 근본적인 ‘공간의 새로움’을 소비자들에게 각인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공간의 전략도 사람들에게 화제가 되지 못했고, 새롭게 입주한 판교 주민들을 끌어모을 만한 매력도 주지 못했다.
현재 서현역 주변 상권이 삼성플라자가 처음 들어선 1990년대 환경과 비슷하다면, 기존 유통 시설을 답습해도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1980년대 말 주택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서울 주변에 위성 신도시를 만들었다. 소극적인 방식이긴 하지만 선진 국가들에서 이미 나타난 흐름에 주목해서 철도를 중심으로 지역별 중심 상업 지역들을 만들었다. 경기 분당 신도시에는 핵심 상권으로 수내역이나 서현역이 계획됐다. 도쿄 위성 도시인 일본 지바의 마꾸하리 역이나 유럽 도시들의 역세권 상업 지역들을 모델로 했다. 서현역에는 삼성플라자가 들어서면서 한동안 지역 상업 공간의 핵심 역할을 차지했다. 크기 면에서 수내역이나 기타 지역의 상업 시설 대비 우위를 점하면서, 브랜드 프리미엄과 더불어 상당한 위력을 떨쳤다. 공간적 특성 역시 실내 광장을 조성해서 약속 장소로 애용되도록 만들어 집객 효과를 극대화했다. 몇 가지 한계가 있었지만, 어차피 분당이라는 도시 범위 안에서 소비되는 상업 공간이었기 때문에 성공적인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다양한 가격대의 경쟁자(2001 아울렛)와 대체재가 등장(죽전 패션아울렛 거리)하고 유사 경쟁업체(롯데백화점 및 강남 지역 백화점)까지 강력하게 포진해 있는 상태라면 추가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현대백화점이나 신세계백화점, 롯데백화점은 공간 개조를 통해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서울 중구 충무로 신세계백화점 본점의 야외 조각 갤러리나 미술관 같은 매장 구성, 현대백화점의 각 점포가 진행한 몰(mall) 형식의 리모델링,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갤러리아 백화점의 첨단 디자인, 롯데백화점 각 점포의 대대적인 디자인 매장 전략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AK 플라자는 유통 고유의 기능에 집중했다. 단순히 기능에만 집중할 때에는 가격 전략이 가장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분당 지역은 가격 전략 측면에서 강력한 경쟁자(2001 아울렛, 뉴코아 백화점 등)가 즐비했다. 이 시기에 AK플라자는 공간과 관련한 새로운 감동을 줄 필요가 있었다. 보다 구체적인 생활 공간의 제안이 필요했다. 주말 유동 인구가 10만 명이 넘는 지역적 특성에도 불구하고 유동 인구를 흡수하기 위한 매력적 가치 제안을 하지는 못한 것으로 분석된다. 상상력에 기반한 비전 제시와 실천 측면에서 약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지역 세분화로 매장마다 다른 디스플레이를 선보이는 자라
반면 ZARA는 전략을 달리했다. 패스트패션 업계에서 갭(gap), ZARA, H&M, 유니클로(Uniqlo), 포에버21(Foever21) 등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치열한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패스트패션 업체들은 흥미로운 마케팅 전략들을 끊임없이 도입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핵심은 공간 전략이다. 이들 패스트패션 업체는 대개 대량 생산을 기본으로 하지만, 일반 소비자들은 이들 브랜드에서 대량 생산의 맹점으로 종종 지적되는 획일성을 느끼기 어렵다.
대표적인 예로 ZARA를 들여다보자. ZARA는 의류를 대량 생산하기 때문에 재고 소진과 브랜드 관리에 대한 스트레스가 많다. 이 두 요소는 서로 상충되는 점이 있다. 비용과 이익 관점에서 보면 재고 물량을 값싸게 처리하는 게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는 브랜드 관리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친다. 상황에 따라서 의류를 소각하거나 사회적 기부로 해결하기도 하지만, 가장 좋은 해결책은 재고율을 낮추는 전략이다.
이에 따라 ZARA는 지역별 시장 세분화로 적극 대응했다. 일본 도쿄 사례가 대표적이다. ZARA는 일본에서 긴자와 신주꾸, 시부야에 있는 매장의 상품 구성과 디스플레이를 각각 달리했다. 상대적으로 격식이 있는 긴자와 패션 트렌드를 주도하는 시부야의 서로 다른 특성을 반영해 상품 디스플레이에 차별화를 뒀다. 이로 인해 긴자에 없는 상품이 시부야에 전시되기도 했다. 따라서 소비자들은 동일한 브랜드 의류인데도 매장에 따라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ZARA는 이런 전략을 분당뿐 아니라 서울 등 국내 매장에서도 비슷하게 도입했다. 시장을 세분화(segmentation)해서 타깃에 대한 접근을 달리한다는 전략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전략을 자신의 사업에 적합하게 분석하고 대응하는 기업은 많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