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가능 경영이라는 단어가 범람하는 시대다. 남들에게 자신의 높은 사회의식과 시대의식을 보여주려면 반드시 이 단어를 써야만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사람도 많다. 연말 모임이 많은 최근에는 ‘지속가능성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 모임부터 지속가능해야 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이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중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요즘 회자되고 있는 지속가능 경영의 개념과 진정한 의미를 정리하고, 이 문제가 기업 경영이나 일반 생활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 살펴보자.
지속가능 경영의 개념
지속가능 경영이란 ‘지속가능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 또는 지속가능성 (sustainability)을 고려한 경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지속가능 발전의 정의는 이를 ‘미래 세대의 욕구 충족 능력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현 세대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발전’으로 규정한 환경개발 세계위원회(WCED·World Commission on Environment and Development)의 1987년 정의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 개념이 등장한 후 지속가능 경영에서 차지하는 기업의 역할이 강조되기 시작했으므로 지속가능 경영은 지속가능 발전과 함께 시작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부터 지속가능 발전, 2000년대부터 지속가능 경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국의 초기 지속가능 경영 논의도 지속가능 발전과의 연계 속에서 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역사적 맥락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다. 특히 일각에서는 지속가능성의 주체를 기존 논의의 관심사였던 경제, 사회, 생태계가 아닌 기업 혹은 경영진으로 바꿔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지속가능 경영의 개념을 둘러싼 혼란이 증폭된 이유다. 즉 흔히 말하는 지속가능 경영이 경제, 사회,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활동인지, 기업과 경영진의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활동인지 모호해졌다는 뜻이다.
필자는 이 둘을 동시에 추구하는 게 진정한 지속가능 경영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 둘을 동시에 달성하려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기존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미국 생태학자 개럿 하딘은 1968년 <사이언스>에 ‘공유지의 비극(tragedy of the commons)’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하딘은 제한된 넓이의 목초 공유지에서 농부들이 경쟁적으로 소를 방목하는 상황을 가정했다. 그는 적절한 규약 없이 소를 방목하면 농부들은 저마다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고 이기적으로 공유지를 이용할 것이며, 결국 땅은 폐허가 될 거라고 추론했다. 농부 개개인은 합리적 판단을 추구했지만 그 결과로 아무도 양을 키울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지속가능성이라는 용어를 빌려 설명하자면 개인의 지속가능성 욕구가 목초지의 지속가능성을 무너뜨리고, 궁극적으로 개인의 지속가능성 또한 무너진다는 뜻이다.
‘공유지의 비극’은 지속가능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빠질 수 있는 상호모순의 함정을 잘 보여준다. 내가 현재 누리고 있는 소비 수준과 생산 방식을 ‘지속가능하게’ 누리다 보면 나 자신이나 나의 후손이 누릴 것도 모두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방식의 지속가능성 욕구를 변화시켜야만 이를 지탱하는 경제, 사회,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뜻도 된다. 현재 수준의 소비, 생산 능력보다는 만족스럽지 않을 순 있지만 장기적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유지해야 할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만 한다.
지속가능성과 기업 경영의 조화
기업보다 상위 체제인 경제, 사회,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만 기업의 지속가능성도 보장할 수 있다는 주장은 2가지 우려를 낳는다. 첫째, 우리 회사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다른 기업들이 과거 방식대로 활동한다면 결국 우리 기업만 손해를 본다는 우려다. 둘째, 설령 모든 기업과 경제 주체가 합심해 올바른 지속가능성을 추구해도 경제 전체가 위축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다.
첫 번째 우려는 게임 이론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상황이다. 둘이서 협력할 수만 있으면 둘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욕심만 생각해 둘 다 손해를 보는 상황이다. 죄수의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은 대화와 상호 신뢰뿐이다. 죄수의 딜레마라는 상황 또한 두 죄수가 각각 독방에 갇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행동을 상의할 수 없었기에 발생했다. 또 설령 상의한다 해도 상대방이 약속대로 실천할지 확신할 수 없었으므로 발생했다. 대화와 상호신뢰가 식상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근본적인 방안임은 자명하다.
두 번째 우려는 사람들의 인식 변화로 극복해야 한다. 국내총생산(GDP) 등이 대변하는 경제 성장, 행복 지수, 지속가능성 등의 척도는 이미 그 한계를 드러냈다. 1933년 GDP 개념을 구체화한 공로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 경제학자 사이먼 쿠즈네츠조차 성장의 양과 질은 분명히 구분된다며 GDP 지수 남용을 경고한 바 있다. 쿠즈네츠는 무려 70여 년 전부터 성장의 양에 집착하지 말라는 경고를 남겼지만, 아직도 우리는 양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돈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돈만 가지고 인간다움을 모두 측정할 수는 없다. 기업 이윤도 마찬가지다. 기업이 영속하기 위해서는 이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기업 존재 이유를 무조건 이윤에서만 찾을 수는 없다. 1조 원의 이익을 낸 두 기업이 있다고 치자. 하지만 이를 어떻게 벌었고, 어떻게 사용했느냐에 따라 그 1조 원의 의미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많은 경영, 경제학자들이 ‘기업은 생산 주체인 동시에 자원 배분의 주체’라는 점을 강조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대 경영학의 대부 피터 드러커는 사회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연구개발(R&D)에 매진하고 혁신에 노력하는 기업을 꿈꿨다. 이때 사회 욕구는 가치가 포함되지 않은 빈 상자와 같다. 대량살상무기를 원하는 사회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R&D와 혁신을 도모하는 기업도 있다. 반면 다른 사람이나 자연과 공존이라는 사회 욕구를 위해 R&D와 혁신을 꾀할 수도 있다. 기업이 지속가능성을 사회적 욕구 충족의 필수 과정으로 여긴다면, 기업 및 경제 체제의 지속가능성은 더 이상 둘 중 하나를 선택하거나 기업에게 불필요한 부담만 지우는 요소가 아닌 기업 경영의 본질로 자리 잡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