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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하면서도 빈틈없는 3개년 계획의 힘

김현정 | 48호 (2010년 1월 Issue 1)

 
시작은 도자기와 옥(玉), 폭죽, 플라스틱 조화(造花)였다. 무역회사 리&펑은 거의 70년 동안 아시아 제조업체와 서구 고객을 이어주는 전형적인 중계자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리&펑 그룹은 유명 의류 제조업체들의 전체 공급망을 관리해주는 세계적인 무역회사다. 이 회사는 면사(綿絲) 구입에서부터 완성된 청바지와 티셔츠를 소매업체에 운송하는 일까지를 모두 담당한다. 리&펑의 윌리엄 펑 사장은 이곤젠더와의 인터뷰에서 왜 기업가 정신이 임원들의 캐치프레이즈 이상의 것이 되어야 하는지를 설명해줬다.
 

 
60세인 윌리엄 펑은 인터뷰 진행자들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중국 공산당으로부터 매우 중요한 것을 배웠습니다”라는 이야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그는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으며, 세계 최대 무역업체 중 하나를 경영하는 사람이지 않은가.
 
리&펑 그룹의 수장인 그가 과연 제정신으로 이런 얘기를 했을까? 대답은 “물론 그렇다”이다. 그렇다면 리&펑이 중국 공산당에게서 배운 것은 무엇일까? 펑은 깊은 확신에 찬 듯한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그건 바로 중앙 집중식 계획(central planning)의 중요성입니다.”
 
펑은 인터뷰 진행자들의 표정을 살펴보고선 미소를 지었다. 그가 또다시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려는 걸까? 물론 중국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가 서로 상반되는 원칙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2가지를 성공적으로 결합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였다. 하지만 서양에서 날아온 방문객들에게 상장기업의 수장이 공산주의를 옹호하는 모습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파고들어 보니 윌리엄 펑이 ‘조금 다른 뜻’으로 한 얘기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계획의 힘
리&펑은 3년 단위로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그 계획은 마치 돌에 새겨진 글처럼 절대 변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미국 유학 시절 학교에서 배운 것과는 달리, 펑은 서양 기업들 사이에서 널리 퍼져 있는 연동 계획(rolling plan·매년 정기적으로 계획과 실적 간 차이를 비교해 그 시점에서 새로 3년이나 5년의 계획을 재구성하는 방식)을 신뢰하지 않는다. 펑은 기업의 목표가 계속 변하면 목표의 구속력이 사라질 뿐 아니라 지침이 되는 가치도 상당 부분 손실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리&펑의 경영진은 전혀 다른 접근 방법을 선택했다. 펑은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3년에 1번씩 마주 앉아 향후 3년 동안의 목표를 공식적으로 정합니다. 우리 회사의 계획 과정은 여느 기업들과는 차이가 있어요. 우리는 지난 3년간 성과가 아무리 좋았다 하더라도, 단순히 판매 및 수익 목표를 세우거나 지금껏 해온 방식을 그대로 고수하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는 그 대신 새로운 계획 기간의 시작을 기존 비즈니스 모델의 전면적 변화를 시작하는 시기로 삼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마치 아예 새로운 회사를 설립하는 것처럼 행동하지요. 사소한 부분 하나하나까지도 모두 다시 점검합니다.”
 
여러 해 동안 리&펑을 이끌어오면서, 펑은 미래 세상을 예견하는 데에는 3년이란 기간이 가장 이상적이란 결론을 내렸다. 3년은 그의 회사가 미래의 형성 과정에서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데도 적합하다. 펑은 모든 사내 운영 부서로부터 정보를 전달받고, 고위 경영진과 협력해 향후 몇 년 후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를 그려나간다. “저는 계획을 세울 때 우리 회사가 앞으로 3년 후에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할지를 가장 먼저 생각합니다.”
 
리&펑이 현재 추진하고 있는 계획의 유효 기간은 2008년에서 2010년까지이다. 리&펑 경영진이 이번 계획을 세울 당시 던졌던 질문은 다음과 같다. △미국과 유럽, 일본의 시장 상황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중국은 생산 국가에서 소비 시장으로 변화할 것인가? △인터넷은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인가?
우리는 기본적으로 시나리오를 세운 다음, 그 시나리오 속에 우리를 끼워넣어 봅니다. 즉 리&펑이 이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원하며,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이지요.” 펑은 물론 이 과정에서 회사의 현재 상황과 미래 비전 사이에 격차가 발생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당연히 그 다음의 논리적 단계는 격차를 좁히기 위한 전략 개발이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전략은 구체적인 매출액과 이익률, 리&펑의 각 시장 및 부문별 활동, 리&펑이 확보하고자 하는 시장점유율 등의 명확한 목표를 정하기 위한 근거가 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목표들은 개별 영업 부서에 단계적으로 하달되며 결국 조직 전체에 적용된다. 이 과정이 모두 끝나고 나면, 모든 라인 관리자는 자신이 3년 후에 어떤 결과를 내놓아야 할지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목표 달성 방법은 각 영업 부서 및 라인 관리자들이 결정해야 한다.
 
이런 방식은 윌리엄 펑의 형이자 현재 리&펑 회장인 빅터 펑이 ‘느슨하면서도 빈틈없는 원칙(loose-tight principle)’이라고 묘사한 리&펑의 정신과 일치한다. 회사는 구체적이지만 동시에 광범위한 경계를 제시하고, 모든 임원들은 그 범위 내에서 결정 및 행동에 관한 최대의 자유를 갖는다. 바로 이런 방식 때문에 150개가 넘는 리&펑의 이익중심점(profit center)을 담당하는 리더들은 모두 강력한 기업가 정신을 갖고서 마치 자신이 담당하는 조직이 자신이 소유한 회사인 것처럼 행동한다.
 
윌리엄 펑이 리&펑의 보상 문화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중앙 집중식 계획 방식의 배경과 접근법, 결과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중앙 집중식 계획의 결과는 무기력함이나 경직된 행동 방식, 규정의 답습이 아니라, 정확하게 그 반대인 기업가 정신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와 자기 결정’이다. 이는 현재 리&펑이 활동 중인 40여 개 경제권에서 젊은 인재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이들은 자신이 직접 회사를 운영할 역량이 있지만, 글로벌 기업이 제공하는 업무 범위와 시장 지배력을 선호하는 사람들이다.
 
급진적인 변화
펑 형제는 지난 20여 년 동안 전통적인 가족 기업을 세계적인 공급망 관리 회사(2008년 연간 매출액 140억 달러)로 바꿔놓았으며, 그 과정에서 3개년 계획을 수립해왔다. 리&펑은 1906년 중국 광저우에서 펑 형제의 할아버지가 창립했다. 당시 중국에서 수출 업무를 진행하는 무역업체들은 모두 외국인 소유였다. 그러나 펑 형제의 조부는 영어와 중국어를 동시에 구사할 수 있다는 차별화된 경쟁 우위를 갖고 있었다. 그는 극동의 제조업체들과 서양 고객들을 이어주는 중개인 역할을 하기에 이상적인 사람이었다. 설립 초기의 리&펑은 주로 비단과 도자기, 옥, 대나무, 등나무 수공예품, 폭죽 등을 취급했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리&펑은 본거지를 홍콩으로 옮겼고 의류와 장난감, 전자제품, 플라스틱 조화 등도 취급하게 됐다.
 
리&펑의 비즈니스 모델은 1989년 윌리엄과 빅터 펑 형제가 사업을 완전히 이어받을 때까지 별로 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모두 미국에서 유학을 했고, 빅터는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도 있었다. 펑 형제는 리&펑이 오랫동안 중개상 역할을 해왔지만 미래에는 국제 무역에서 중개상의 중요성이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당시 새롭게 부상 중이던 인터넷이 변화의 원인이 될 것이란 사실을 정확히 예측했다. 펑 형제는 품질과 취향, 환경 보호, 제조 환경 등 여러 부문에서 서양 고객의 기대를 100% 충족시키지 못하는 완제품 수출을 지속하기보다 공급망 전체를 관리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회사를 넘겨받은 초창기에는 성장성이 높은 직물 부문에 집중했다.
 
리&펑은 주요 고객들에게 구매 조달 서비스를 제공하는 파트너로 성장했고, 현재는 고객들을 대신해 공급망 전체(방적용 실 구매에서부터 생산 및 완제품을 소매업체로 운송하는 일까지를 포함)를 관리하고 있다. 리&펑은 생산 과정의 각 단계에서 가장 적합한 파트너를 선택한다. 단 파트너를 선택할 때는 그 업체가 어디에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는다. 아프리카에서 티셔츠 제작에 필요한 면사를 만든 다음, 그것으로 인도에서 옷감을 짜고, 싱가포르에서 재단을 한 후, 중국에서 마감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리&펑은 세계 각국에서 약 1만 개의 공급업체와 계약을 맺고 있다. 150개가 넘는 리&펑 이익중심점의 라인 관리자들이 이들과의 협력이 원활하게 진행되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 작업은 교향곡 연주에 비유할 만하다. 교향곡 연주자들은 전체 악보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잘 알고 있지만, 각기 다른 스타일과 음색을 갖고 있는 자신만의 악기를 연주한다.
끝없이 돌아가는 러닝머신에서 내려서기
윌리엄 펑은 자사 임원진들에게 주어지는 자율성이 심리적 측면의 이점도 제공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근거로는 리&펑이 10여 년 이상 구가해온 두자릿수 성장률을 들 수 있다. 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러닝머신처럼 끝없이 돌아간다고 느끼지요. 기업 임원들도 당연히 예외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기대에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매년 더 나은 성과를 내고, 더 높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렇지만 결코 끝이 보이지는 않지요.”
 
반면 리&펑이 제시하는 3년이라는 기간은 자사 임원들에게 스스로가 자신의 운명을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준다. 이는 그들의 결단력과 활동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펑은 3년이라는 기간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리&펑은 관리자들과 암묵적인 합의를 하는 겁니다. 관리자들은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상사가 꼬치꼬치 캐묻거나 비난하려 들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지요. 회사는 일단 목표를 세우고 나서, 관리자들에게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만한 시간적인 여유를 주는 겁니다. 3년이라는 기간은 무언가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물론 (사업이 잘 되지 않을 때) 자신이 ‘시베리아’로 쫓겨난 처지라고 생각하게 될 만큼 긴 시간은 아니지요.”
 
이게 바로 펑 스타일의 3개년 계획이다. 세계적인 경제위기를 겪는 동안에도 리&펑의 중앙 집중식 계획 방식은 뛰어난 성과를 나타냈다. 펑은 “우리 회사는 최근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수정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대신 리&펑의 임원들 중 상당수는 중도에 전술을 수정하는 등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 있다. “리&펑의 접근 방법은 직원들로 하여금 혁신을 추구하고 진부한 사고방식을 벗어 던지도록 만들지요.”
 
펑이 고위 관리자들에게 기대하는 기업가적인 자질이 연봉, 특히 변동급에 적극 반영된다는 사실은 무척 당연해 보인다. 펑은 리&펑이 여느 기업들과 달리 보너스 금액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리&펑이라는 조직 내에 기업가들이 넘쳐나기를 바란다면, 목표를 초과 달성한 사람들에게 상한선을 두지 않고 회사가 추가로 얻은 수익 중 일부를 지급해야 합니다.”
 

윌리엄 펑 런(William Fung Kwok Lun·馮國綸)
 
올해 60세가 된 윌리엄 펑 런은 1986년부터 리&펑의 사장을 맡아왔다. 그는 프린스턴대 공대를 졸업한 후 1972년 리&펑에 입사했다. 이후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받았으며, 홍콩과학기술대에서 명예 경영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윌리엄 펑은 현재 리&펑의 회장을 맡고 있는 형 빅터 펑과 함께 3대에 걸쳐 이어온 전통적인 가족 기업을 다국적 무역업체로 탈바꿈시켰다. 또 리&펑의 글로벌 소싱 네트워크를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즈니스위크>는 1996년 윌리엄 펑을 세계 최고의 관리자 25명 중 1명으로 선정했으며, 2000년에는 ‘아시아의 스타 50인’ 목록에 윌리엄 펑을 포함시켰다.
 
윌리엄 펑은 무역 분야와 기업계의 주요 단체에서 중요 역할을 맡는 등 공공서비스 분야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다. 그는 홍콩총상회(香港總商會)와 홍콩-태평양 경제협력협회의 전임 회장을 역임했다.

 
전통적인 장점
리&펑은 유기적인 성장만을 거듭해오지 않았다. 1990년대부터 인수합병(M&A)도 추진해왔다. 리&펑은 1996년 홍콩의 경쟁업체인 도드웰을 최초로 인수했다. 두 회사는 규모가 비슷했지만 각기 다른 특성을 갖고 있었다. 펑의 설명에 의하면 리&펑은 중국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반면, 도드웰은 전형적인 영국 무역업체였다. 하지만 이때도 계획 목표(planning targets)와 개인적 자율권이라는 요소들은 새로운 직원들을 빠르게 통합하고 응집하는 ‘접착제’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리&펑은 항상 다른 기업의 문화가 갖고 있는 긍정적 측면에 개방적 태도를 취해왔다. 이와 관련해 윌리엄 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리&펑이 조금씩 다른 기업 문화를 가진 사업부로 구성된 ‘복합 기업’이 되어야 할지, 회사를 하나로 묶어주는 동질적 문화를 가진 ‘하나의 기업’이 되어야 할지를 오랫동안 심사숙고했습니다. 그 결과 후자가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지요.” 이와 같은 결론을 바탕으로 리&펑의 경영팀은 혹시 피인수 기업이 더 나은 문화를 갖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자사에서 인수하는 모든 기업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관찰을 통해 긍정적인 특성을 찾아내면, 그것을 회사 전체를 위한 기준으로 삼았다.
 
흥미롭게도 윌리엄 펑 사장은 리&펑의 보상 문화에 대해 대화를 하는 동안, 임원들이 높은 성과를 내도록 자극하기 위한 특별한 비결이나 방법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동기부여가 리&펑의 독특한 문화(야심 찬 전체 계획을 공유하지만, 실무 차원에서는 권한이 분산된)에 주어진 행운의 부산물인 것처럼 보였다. 펑 형제는 전통적인 뿌리를 잃지 않고서 현대적인 기업을 구축하는 데 성공했다. 창립 후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족 의식과 충성심은 리&펑에서 중요한 가치로 여겨진다. 윌리엄 펑의 마지막 한마디가 이를 대변한다. “리&펑의 직원들은 우리를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번역 |김현정 jamkurogi@hotmail.com
 
편집자주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글로벌 인사 전략 컨설팅사 ‘이곤젠더 인터내셔널(Egon Zehnder International)’이 발행하는 매거진 <포커스(The Focus)>의 주요 콘텐츠를 번역해 연재합니다. 이곤젠더는 1964년에 설립됐으며, 세계 37개국에 63개 사무소를 두고 있습니다. 주 업무는 다국적 기업을 위한 임원급 인재 채용과 리더십 평가 및 관련 연구입니다. <포커스>는 경영 전략과 리더십, 임원급 인재 채용의 최신 트렌드 및 세계 최고 전문가들과의 인터뷰를 주로 게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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