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수의 한국 중소기업들은 기술력을 기반으로 시장에서 승부하고 있다. 하지만 기술 역량을 축적하면서 성장을 지속하는 사례는 많지 않다. 가장 큰 걸림돌은 인력 및 자원 부족이다. 또 한국 중소기업의 대다수는 대기업 틈바구니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중소기업의 기술경영 전략과 관련해 최고의 연구 성과를 내온 김영배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를 만나 한국 중소기업의 생존과 번영을 위한 기술전략 방향을 들어봤다.
김 교수는 중소기업들이 “외부와의 적극적 협력을 통해 기술 역량을 축적해야 하며, 고객과 시장의 요구 사항에 항상 눈과 귀를 열어둬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기존 역량을 이용하는 데 그치지 말고 새로운 분야와 영역에서 적극적으로 성장 기회를 모색하기 위해 ‘양손잡이형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교수님께서는 2002년 <Research Policy>에 실린 논문을 통해 대기업 하청에 의존하던 한국 중소기업들이 새로운 기술이나 시장을 개척해 진화하는 경로(표1)를 제시하셨습니다.
이 연구 결과에 따르면 전자부품 업종에서 과거의 전략적 포지셔닝을 바꾼 기업은 30% 정도였고, 70%는 과거 지위를 유지했는데, 이를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까요.
“우선 전략군의 변화 자체가 무조건 긍정적인 것은 아니란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단순 조립에 의존하던 업체가 기술혁신형 기업으로 진화할 수도 있지만, 사업의 실패 혹은 환경 변화에 대한 소홀한 대응으로 기술혁신군에 있던 업체가 한계기업군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30%란 수치가 작게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 전자부품 산업의 전략군(strategic group) 변화 비율은 다른 산업에 비해 상당히 높은 수준입니다. 이는 산업 자체의 특성 때문입니다. 전자부품 산업은 급격한 기술 변화가 나타나는 역동적인 초경쟁(hyper-competition)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따라서 전략군 간의 이동장벽(mobility barrier·기존의 산업 간 진입장벽 즉, entry barrier의 산업 내 버전)이 상대적으로 낮습니다. 또 전자부품 산업에서는 레드퀸(Red Queen·자신이 움직이지 않아도 다른 경쟁기업이 계속 앞으로 빠르게 움직이면 결과적으로 뒤로 후퇴하는 현상) 효과가 매우 빈번하게 나타납니다.
사실 중소기업이 전략적 포지셔닝을 바꾸는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사업의 불확실성이 높고 기술 개발 여력이나 여유 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입니다.
중소기업들은 대기업이 신제품을 개발할 때 많은 관련 부품을 함께 개발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상당한 불확실성을 감수해야 합니다. 기술뿐만 아니라 시장이나 고객의 불확실성도 크기 때문에 실패할 확률이 높습니다. 품목을 잘못 선택할 수도 있고, 품목은 잘 정했더라도 기술 개발에 실패하거나 품질 혹은 납기 측면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는 기술을 개발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고객을 확보하지 못하면 중소기업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이나 기술, 고객을 개발할 수 있는 조직 역량과 자금 및 인적 자원이 부족한 중소기업에게는 한 번의 실패가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중소기업들이 과감한 기술혁신에 대한 도전을 망설입니다.
현재 대부분의 중소기업은 여유 자원(slack resource)이 매우 빈약한 편입니다. 게다가 기존 사업의 가격경쟁이 심하고 수요업체들로부터 지속적인 단가인하 압력을 받는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2, 3년 이상이 소요되는 신규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 여력은 당연히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중소기업들이 자원의 제약을 극복하고 새로운 기술 역량을 축적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합니까.
“물론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고경영자(CEO)가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고 지속적인 연구개발(R&D) 투자를 하는 기업도 있습니다. 이들은 정부의 R&D 지원 과제를 적절히 활용하고, 대학이나 외부 연구소, 혹은 고객 기업과 공동으로 신제품·신기술을 개발해 지속적으로 혁신 성과를 내기도 합니다. 이렇게 회사의 미래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과 적극적인 환경 변화 탐색, 올바른 혁신전략의 선택과 실행이 있다면 중소기업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휴대전화 사업의 성장을 예견하고 이에 필요한 카메라 모듈 사업을 새로 시작한 중소기업이 여럿 있다고 합시다. 이들 모두는 관련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기업이 가장 우수한 외부 엔지니어가 누구인지 파악하고, 이들을 영입할 만한 성장 비전을 제시했다고 하지요. 이 회사가 영입한 인재들과 성과를 공유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으며, 그 인재들이 자유롭게 기술개발에 몰입할 수 있는 조직 환경을 만들어주고 과감하게 지원한다면, 당연히 다른 기업보다 성공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게다가 고객 기업과의 인맥과 신뢰를 통해 시장 개척에 앞장선다면 신기술 확보를 통한 성장이 충분히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은 실제 성공한 중소기업의 사례입니다. 이 사례는 중소기업의 성공에 특정 분야의 기술능력(technology capabilities)이 필요하긴 하지만, 변화하는 환경에서는 기술 개발 역량(technology development capa-bilities)을 갖추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기술 개발 역량에는 △시장 기회가 큰 기술을 선택하고 △기술을 개발하기 위한 투자(자체 R&D뿐 아니라 관련 기업 인수나 외부 전문가의 영입, 공동개발 등)를 확대하며 △이런 투자가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오도록 인력 및 조직관리 시스템을 갖추고 △이렇게 개발된 기술을 고객 요구에 맞게 상업화하는 노력 등이 포함됩니다.”
중소기업의 성장과 도약을 위해서는 품목과 시장 다변화가 필수적입니다. 교수님께서는 핵심 역량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활용형 신사업’과 기존 핵심역량과 무관한 ‘탐색형 신사업’의 균형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활용형(exploitation) 신사업은 기존 기술능력이나 생산설비, 시장지식 등을 활용해 신규 사업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비교적 불확실성이 낮아 제품 개발 기간이 짧고 비용도 적게 들어가며 성공 확률이 높습니다. 그러나 활용형 신사업에만 전념하면 회사에 새로 축적되는 기술능력이나 시장지식 등은 별로 없습니다. 특히 기술이나 시장의 변화가 심하다면 기업이 장기적으로 성장의 한계에 봉착하거나 어려움에 처할 수 있습니다. 브라운관(CRT) 모니터에 들어가는 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들은 과거에 급속히 성장했지만 액정표시장치(LCD) 모니터로 시장 주도 품목이 변하면서 지금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