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월 20일. 부패한 필리핀 정부의 조셉 에스트라다 대통령이 민중 혁명에 의해 쫓겨났다. 혁명의 숨은 공신은 문자메시지였다. 야당 의원들이 시민들에게 보낸 ‘검은 옷을 입고 에드사 성당으로 가자(Go 2 EDSA, Wear black)’라는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는 1시간 만에 2만여 명의 사람들을 에드사 성당 앞으로 집결시켰다. 나흘간 10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반(反)에스트라다 집회장에 몰려들었다. 결국 에스트라다는 허겁지겁 대통령궁을 떠나야 했다.
사례 2 블로그
2003년 3월 23일. “이라크전 발발 4일째. B-52 폭격기 출격 뉴스를 듣는 순간부터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 보통 출격 후 6시간이면 바그다드에 도착하는데, 어제는 6시간이 지나도 폭격이 시작되지 않았다….”(dear_raed.blogspot.com에서 발췌) 이라크 전쟁 당시 바그다드 폭격 상황을 가장 생생하고 발 빠르게 전달한 것은 CNN도, 알 자지라도 아닌 ‘살람 팍스(Salam Pax)’라는 필명의 이라크인 블로거였다. 당시 29세의 평범한 이라크 청년에게 전 세계는 귀를 기울였다. 전장의 한복판인 바그다드에서 전쟁의 참상을 알린 그의 블로그는 이라크판 ‘안네의 일기’로 불렸다.
사례 3 마이크로블로그(트위터)
2009년 7월 5일. 톈안먼(天安門) 사태 이후 최악의 유혈 시위로 평가되는 중국 위구르 우루무치 사태를 가장 먼저 세계에 알린 것은 마이크로블로그의 일종인 ‘트위터(Twitter)’였다. 당시 우루무치에 있던 미국인이 트위터 메시지로 전한 현장 소식은 중국 관영 신화통신이나 CCTV 보도보다 12시간이나 빨랐다.
왜 ‘소셜 미디어’에 주목해야 하는가
미디어가 사회적 변화에 핵심적 역할을 한 사건은 지난 20세기에도 종종 있었다. 1979년 이란 혁명 때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파리에서 보낸 연설 카세트테이프는 이슬람 혁명의 촉진제 역할을 했다. 1989년 중국 톈안먼 사태 당시 학생들은 팩스로 상황을 주고받으며 조직적 투쟁 활동을 벌였고, 미국 대학생들은 중국 관련 뉴스를 추려 팩스로 다시 중국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뉴스 공수 작전’을 벌였다. 1991년 유고 내전 당시 슬로베니아 대학생들은 유고 군인들의 잔혹 행위와 학살을 e메일과 인터넷을 통해 서방에 알려 국제적인 지지 여론을 이끌어냈다.
하지만 현재 ‘소셜 미디어(social media)’의 영향력은 그 파급력 측면에서 과거 사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20년 전 톈안먼 사태와 비견되는 위구르 사태는 정보기술(IT) 능력의 발전이 중국의 강력한 언론 통제를 어떻게 무력화시킬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정확한 사상자 수조차 알 길이 없는 톈안먼 사태와 달리, 이번 위구르 시위는 사태 발생과 동시에 그 실상이 낱낱이 세계로 알려지며 중국 정부에 대한 국제적인 비난 여론을 불러일으켰다.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은 정보의 생산자와 소비자가 실시간으로 직접 연결된다는 측면에서 더욱 증폭되고 있다. 직접 교류되는 정보는 디지털 기술과 통신 장비의 발달 덕분에 실시간으로 공유할 수 있게 됐고, 이는 공간적 제약을 허물어뜨릴 수 있는 인터넷의 본질적 가치를 더욱 극대화하고 있다. 소비자들은 정보의 생산자로서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시키고, 이는 다시 소셜 미디어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있다.
기업들은 업종과 규모에 상관없이 날로 영향력이 커져가고 있는 소셜 미디어에 주목해야 한다. 이미 미국에선 델, 스타벅스, 사우스웨스트 항공, 뱅크오브아메리카(BOA), 포드 등 유수의 기업들로부터 구멍가게 수준의 소자본 창업자들까지 트위터 등의 소셜 미디어를 마케팅 및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 툴로 적극 활용하고 있다. IT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소비자들의 니즈가 더욱더 세분화되고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국내 기업들도 소셜 미디어의 전략적 활용에 눈을 돌릴 때다.
심현보
- (현) 올리버와이만 서울사무소 시니어 어소시에이트
- 기업 전략 수립 및 신규 사업 개발, 기업 인수합병(M&A) 분야 프로젝트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