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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으로 다시 읽는 역사

이순신의 영웅적 면모와 아쉬움

최중경 | 354호 (2022년 10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이순신 제독의 전술가로서의 위대함은 총통과 신기전을 활용한 선체 파괴에 중점을 둔 전술, 평저선의 특성을 응용한 전술, 조란탄과 거북선 등 신무기의 활용, 병참선의 중요성을 이해한 점 등에서 드러난다. 또한 경영자로서 이순신은 작전 계획 단계에서부터 부하 장수들을 참여시키면서 그들의 재능을 최대한 활용했으며 군영 안에서 자급자족하는 경제를 실현했다. 다른 한편,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목숨을 잃지 않고 한양에 올라와 역성혁명을 꾀했다면 조선의 미래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순신 제독1 은 지난 40년간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1위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영웅 중 영웅이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순신 제독의 영웅적인 면모를 익히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의 업적을 요약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일방적으로 조선군이 일본군에게 밀리고 있을 때 첫 승전보(옥포해전 승리)를 의주로 피난 간 조정에 알렸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내내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또 군수물자와 무기를 중앙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해결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조정에 생활필수품을 공급하기도 했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기개가 높았던 이순신은 무과시험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한 후에도 불의와 타협하지 않아 모함도 당하는 바람에 하급 무관으로 전전했다. 임진왜란 직전에 전라좌도 수군통제사로 발탁됐는데 종6품 벼슬에서 정3품 벼슬로 승진한 것이어서 당시 기준으로 극히 예외적인 발탁이었다. 포병장교였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툴롱(Toulon)전투에서 공을 세운 후 대위에서 소장으로 승진한 것과 비견될 정도로 이는 조선을 구한 신의 한 수가 됐다. 모함을 받아 삼도수군통제사 자리에서 물러나 모진 고문을 당했는데 극적이게도 풀려나서 백의종군하다 다시 선조의 부름을 받고 삼도수군통제사로 돌아왔다. 그리고 단 12척의 전함으로 서해를 통해 한양으로 가려는 대규모 일본함대를 격멸해 일본군의 전투의지를 꺾고 전쟁의 흐름을 바꿨다.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뒀지만 정작 본인은 전사함으로써 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이번 글에서는 이순신의 위대성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역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그의 한계 또한 짚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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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영웅적 면모

1. 전술 혁신

이순신은 해전의 전술 개념을 바꿔 일본 해군을 질 수밖에 없는 궁지로 몰아넣는 천재적인 군사적 재능을 보였다. 그 당시의 해전 전술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다 같이 적선에 올라가 일대일로 겨루는 단병접전 개념이었다. 대포를 쏘아 돛대를 부러뜨린다거나 물이 새게 해서 적선의 기동력을 떨어뜨린 후, 적선에 갈고리를 걸어 끌어당겨 적선에 올라타고 격투를 통해 적군을 제압하는 방식(소위 월선 공격)이었다. 그런데 이순신은 공격의 주안점을 대포와 불화살로 적선의 선체를 부수거나 태워서 침몰시키는 데 뒀다. 인명 살상이 아니라 선체 파괴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러한 전술 혁신은 파괴력 있는 대포와 장거리를 날아가는 대형 화살이 필수적이었는데 조선군의 총통과 신기전이 제 구실을 했다.

이순신의 전술은 단병 접전에 능한 일본 해군이 제 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들었다. 조선 해군은 조총 유효 사거리 밖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조총보다 유효 사거리가 긴 총통과 신기전 불화살로 선체를 공격했다. 유효 사거리가 짧은 조총은 아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없어 일본군은 거의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다 사면에 총통을 장착한 돌격선으로 거북선을 운용해 근거리 포격전까지 구사하면서 일본 해군의 전투 의지를 꺾어 버렸다. 군사 천재로 평가받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창안한 군사 전술인 중앙 배치 전략(Strategy of Central Position)은 적군을 두 덩어리로 분리한 후 화력과 기동력을 이용해 각개 격파하는 전술인데 적군이 속아줘야 작동할 수 있다. 하지만 이순신의 새로운 전술은 적이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훨씬 탁월했다.

2. 평저선(平底船)의 특성 응용

조선 해군의 주력 전함인 판옥선은 풍력과 함께 보조 동력으로 노를 저어 배를 움직이는 일종의 갤리선(Galley)으로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이었다. 판옥선은 조선 초기부터 주력 전함으로 활약한 맹선(猛船)이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판단하에 왜구의 침략이 빈번했던 명종 때 개발한 신형 전함이라고 알려져 있다. 당시 배의 바닥이 뾰족한 역삼각형 형태인 첨저선(尖底船)이 일반적인 형태였으며 일본 해군의 주력 전함도 첨저선이었다. 평저선은 첨저선에 비해 물의 저항이 많아 속도가 상대적으로 느렸다.

하지만 임진왜란의 해전에서 평저선은 크게 위력을 발휘했는데 평저선과 첨저선의 차이점을 최대한 활용한 이순신의 혜안 때문이었다. 우선 평저선에는 배의 4면 모두에 대포를 많이 장착할 수 있었다. 바닥이 평평해 대포를 쏘아도 배가 크게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4면에 대포가 많이 장착돼 있다 보니 적 함대 가운데로 들어가는 돌격 전투가 가능했고 철갑으로 에워싼 거북선이 적의 월선 공격과 근거리 조총 사격을 차단하며 맹활약할 수 있었다. 첨저선의 경우 물의 저항이 적어 속도는 빠르지만 대포를 쏠 때의 진동으로 배가 심하게 흔들리기 때문에 측면에 많은 대포를 장착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었다.

평저선의 또 다른 강점은 제자리에서 360도 회전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 회전 기능은 조선 해군의 기동성을 강화했는데 이순신은 반복된 진형 훈련을 통해 회전 기능을 필살기로 연결했다. 1592년 8월 한산도대첩에서 이 회전 기능이 빛을 발했다. 일본 해군의 추격을 피해 일렬종대로 기동하던 조선 해군의 판옥선들이 재빨리 회전하면서 양옆으로 돌아서고, 매복해 대기하고 있던 다른 조선 전함들도 일본 해군의 진출 방향에 맞춰 회전 기동하면서 순식간에 일본 해군 전함들의 측면을 에워싸 포위망에 가둔 것이다. 측면이 노출된 일본 전함들은 곧 조선 전함으로부터 빗발치는 총통 사격 화망에 갇혔고, 전멸에 가까운 대패를 당했다. 이 조선 해군의 전투 대형이 유명한 학익진(鶴翼陣)이다. 학이 날개를 펴고 품는 듯한 모양을 연출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한산도 앞바다에서 시현된 조선 수군의 회전기동은 300년 넘게 지난 시점에 러일전쟁의 고비가 된 쓰시마해전(1905년 3월)에서 일본 해군이 응용해 역사적인 승리를 기록한다. 일본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원수의 이름을 따 도고턴(Togo Turn)이라고 불린다. 일본군은 러시아 함대의 이동 경로를 예상해 매복하고 있다가 회전 기동을 통해 러시아 전함의 측면을 노출시키고 집중 포격을 가해 대승을 거뒀다.2

3. 신분을 넘어선 발탁

이순신은 인재를 활용하는 데도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 한산도에 있을 때 운주당(運籌堂)을 짓고 부하들과 군사 작전에 관한 의견 교환을 활발하게 했는데 병졸의 의견도 들어주는 소통 방식을 택하는 파격을 보였다. 아무리 훌륭한 작전 계획이라고 해도 일방통행식으로 결정되면 부하 장수들의 이해도가 낮아 실전에서 차질을 빚을 수 있다. 작전 계획 수립 단계에부터 부하 장수들이 참여하면 다양한 의견과 합리적인 토론을 통해 작전 계획의 완성도를 높이고, 부하 장수들의 숙지도를 높여 실전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순신은 전쟁 중인데다 조정이 멀리 떨어져 있는 점에 착안해 수군통제사가 무과 시험을 독자적으로 시행할 수 있는 권한을 선조 임금으로부터 위임받았다. 이를 통해 그는 신분이 낮아도 장교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줌으로써 병사들의 분발을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부하 장수의 특별한 재능을 활용해 전투력을 높이는 노력도 기울였다. 어영담은 물길에 밝아 중용됐는데 이순신이 이끄는 함대가 기동 능력을 발휘하며 개전 초기에 연전연승하고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부산포해전에서 전사한 정운은 화포를 잘 다루는 능력을 갖추고 있어 원거리 포사격을 주특기로 하는 이순신 함대의 전투력을 극대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태종 때 이미 제작됐다고 알려진 거북선도 군관 나대용이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에 제작을 건의했고 이순신이 받아들여서 개전 초기부터 실전에 투입해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어영담, 정운, 나대용 모두 선무공신 대열에 끼지 못했다.3

4. 신무기 활용

이순신의 승리에는 군사 기술의 우월성도 한몫했다. 세계 최초의 산탄 대포라고 할 수 있는 조란탄은 총통에 탄환 대신에 60개 정도의 쇠구슬을 장전해 쏘는 방식을 취했는데 일정 면적의 탄막이 형성돼 인마 살상에 효과적인 무기였다. 병력 규모 면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명량해전에서 조란탄이 큰 위력을 발휘해 일본군의 전투 의지를 꺾어 놓았다. 서양에서 산탄대포가 18세기 말에 개발되기 시작했고 공식적인 전투 기록은 1815년 워털루전투에서 영국군 포병대가 사용했던 것으로 알려지는 점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창의력이다. 세종 때 개발된 세계 최초의 로켓인 신기전도 무게가 많이 나가는 큰 불화살을 멀리 추진할 수 있어서 적선이 근거리로 진입해 조총 사격을 하기 전에 적선을 화공으로 불태우는 위력을 발휘했다.

조선이 세종 때 개발한 화약 무기 중에 9㎝ 길이의 소형 총통이 있었는데 권총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이 소형 총통은 원래 조선 기병의 돌격 무기였다. 적군 기병대로 돌격하기 전에 장전하고 적군 기병대에 접근했을 때 발포하면서 적군 선봉을 쓸어버리는 위력을 발휘했다. 이 소형 총통은 탄환을 장전하는 것이 아니라 소형 쇠 화살을 장전하는 방식이었는데 이순신은 이 개념을 대형 총통에 대형 쇠 화살(또는 쇠를 입힌 나무 화살)을 장전하는 개념으로 응용해 대형 쇠 화살이 적선의 선체를 부수거나 구멍을 내어 침몰하도록 했다. 이게 대장군전이라는 공용 화기이다. 화약 무기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개인의 용맹이 전투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우수한 화기 체계를 더 효율적으로 운용하는가에 승패가 결정됐다.

이순신은 화기 체계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지휘관이었다. 돌격선 역할을 한 거북선도 기술과 아이디어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쇠못을 입힌 장갑을 덮어씌워서 일본군의 조총 사격을 무력화시키면서 동시에 적 한가운데서 전투할 때 일본군의 장기인 월선 공격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 일본 해군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4면에 장착된 총통으로 근접 포격을 가하는 거북선은 일본 해군에게는 악마와 동일한 존재였다. 탁월한 아이디어와 기술이 결합돼 등장한 거북선은 당시 세계 최첨단 전투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병참선의 중요성을 이해

우수한 전력을 갖고도 병참에 실패해 패전한 사례가 꽤 있다. 먼저 촉나라와 위나라 간의 가정전투(228년)를 들 수 있다. 물이 없는 산꼭대기에 진을 친 촉군은 위군의 포위 전술로 마실 물을 구할 수가 없게 됐고 투항병이 속출하면서 스스로 무너졌다. 식수 부족으로 전투에 진 사례는 또 있다. 십자군전쟁 때 하틴전투(1187년)에서도 예루살렘 군대는 사막에서 전투하면서 물을 충분히 휴대하지도 않고 우물 기술자도 데려가지 않아 전투력이 급감하면서 무슬림 군대에 대패하고 말았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1812년), 히틀러의 소련 침공(1941년)도 결국 겨울의 맹추위 속에서 병참선이 유지되지 못해 실패한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임팔전투(1944년)에서 일본군이 패배한 이유도 병참선을 생각하지 않고 화력과 병력 규모만 믿고 험악한 지형으로 진출했다가 식량 부족으로 극심한 고통을 겪었기 때문이었다. 현대 전투에서도 식량, 기름, 탄약, 장비가 제대로 보급돼야 승리의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임진왜란 시절에는 내연기관이 없어서 기름은 필요하지 않았겠지만 식량과 탄환과 화약이 제대로 공급돼야 일본군의 작전이 가능했다. 일본군 입장에서 식량은 일부 현지 조달이 가능할지 모르나 탄환과 화약은 일본으로부터 보급돼야 했기에 병참선의 확보는 큰 과제였다. 한국의 산악 지형과 협소한 도로망, 그리고 조선 관민의 저항 때문에 수로로 전라도 해안을 돌아 서해를 통하는 보급로의 확보는 전쟁 승리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버티고 있는 한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4 이순신은 서해안을 통한 수로 병참선의 중요성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산도에 수군통제영을 설치하고 해상 척후선과 지상 염탐꾼을 운용해 일본 해군의 동태를 세밀하게 감시함으로써 일본 군함과 보급선이 서해를 향해 항해할 경우 즉시 대응할 수 있는 체제를 완비했다. 일본 해군의 서해 진출이 불가능한 체제였기 때문에 굳이 부산포를 중심으로 남해안에 출몰하는 일본 군함과 보급선을 찾아다니며 요격할 이유가 없었다. 부산포 등 항구에 내린 보급품을 북상하는 일본군에게 안정적으로 보급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한양을 도로 내준 이후에 남해안을 중심으로 성을 쌓고 웅거하고 있었다.

6. 군영 안에 자급자족 경제를 실현

통상 장군은 국가가 보급하는 군수 물자를 가지고 전투 임무를 수행하지만 이순신은 무기와 식량을 스스로 만들어 가면서 전투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 수군이 장악하고 있는 바다에서 어획 활동을 자유롭게 하도록 보호하면서 일종의 통행세를 현물로 받고, 병영 내에 농경지를 만들어 곡식과 채소를 직접 재배하고 수확해 식량을 충당했다. 인근의 대장장이들을 모집해 곡식을 주고 화포와 창검, 화살촉과 탄환을 만들게 했다. 전쟁 중의 무질서와 농민들의 농토 이탈로 사실상 국가의 조세 징수 체계가 무너져 내린 상황을 감안할 때 불가피한 선택이기는 했지만 최대 3만에 이르렀던 조선 수군과 이순신을 보고 몰려든 피난민들을 부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순신은 이 어려운 과제도 원만하게 풀어내고 오히려 조정에 필요한 물자를 보낸 점을 감안했을 때 경영자로서의 자질도 매우 수준급이었음을 알 수 있다.5

자급자족형 장군은 역사에 흔하지 않다. 갈리아와 게르마니아를 정복한 로마의 카이사르나 로마를 공포에 떨게 했던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원정 과정에서 본국의 지원이 부족하거나 전무한 상태에서 현지에서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면서 승리한 경우를 들 수 있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전술적 측면뿐 아니라 경영자로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보적 존재였다는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순신은 영웅인가?
노량을 버리고 한양에 갔다면

이처럼 이순신이 명장임에는 이의를 달 수 없겠지만 그를 영웅 반열에까지 올릴 수 있을까? 영웅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없고, 사회적 합의가 있더라도 개인의 관점에 따라 평가가 다를 것이다. 필자는 이순신이 죽지 않고 노량해전 끝에 한양으로 갔다면 조선의 미래가 달라질 수도 있었을 거란 관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이순신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 섬멸해 민족의 원수를 갚고자 했고, 노량에서 크게 이겼다. 이는 분명 의미가 있는 성과이긴 했지만 이순신이 전란이 끝난 후 조선에서 펼쳐질 세상에 대해 좀 더 관심을 뒀더라면 다른 선택을 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게다가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따져보면 전란이 끝난 후 이순신의 목숨이 위태로웠으므로 살기 위해서는 어떤 조치가 필요했다. 이순신이 백성들로부터 받는 신뢰를 선조는 크게 경계했고 의병장들을 박해했듯이 이순신도 박해할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이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의 역사가 반복될 것이었고 이미 무너진 왕조의 권위도 회복되기 어려웠다.

임진왜란 이후 역사 전개를 보면 조선은 계속 뒷걸음질 쳤다. 아무런 명분도 없는 병자호란을 스스로 불러들여 조선의 신민과 조선의 땅을 피곤하게 했다. 중농주의에 입각한 사농공상이라는 건국 이념도 17세기부터 중상주의가 힘을 얻고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시대착오적 이념이 되고 말았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소위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망령에 사로잡힌 조선 지배층은 조선이 한족의 문화와 정신을 계승한다는 소중화론(小中華論)에 빠짐으로써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잃고 기층 국민과 완전히 유리돼 표류했다. 특히 소중화론에 입각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발달한 청나라 문명과 일본의 발전상을 오랑캐의 것이라 해 백안시하는 오류를 범했다.

이성계는 역성혁명이라는 명분으로 고려왕조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새로이 창업했지만 임진왜란을 겪으며 전환점을 맞이했다. 조정을 엎을 만한 무력을 갖춘 이순신은 역성혁명을 꾀할 수 있었다. 역성혁명의 명분은 충분했다. 조정은 수많은 경고와 징후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강요했다. 조선 초기에 큰 격차로 뒤처져 있던 일본이 조선보다 우월한 국력을 보이는 상황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반성, 그리고 국정 혁신이 필요했다. 왕조 교체를 통해 국정 혁신을 도모하는 것이 백성을 위하는 길이었다.

두뇌 회전이 빨랐던 선조는 역성혁명의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나름 대응에 나섰는지도 모른다. 의병장들을 박해하고 공신 목록에 단 한 명도 올리지 않았다. 군사 전술상 무모하기 짝이 없는 부산포 공격을 명하고, 불가함을 주장했던 이순신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6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는 정여립 모반사건을 계기로 일본군을 함경도에서 몰아낸 의병장 정문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을 죽였다. 광해군에게 임금 자리를 내주겠다는 선위 파동을 주기적으로 일으켜 조정 대신과 사림에 긴장감과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치졸함을 보여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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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훌륭한 제독이고 일본 측 인사들이 세계 최고의 해군제독으로 평가7 하고 있지만 진정 영웅이라면 군사적 성과를 넘어 백성의 염원을 읽고 백성을 위한 길로 주저 없이 나가야 한다. 이성계는 고구려 고토 회복이라는 백성의 염원을 뒤로 하고 본인의 권력을 추구하기 위해 위화도회군을 하고 조선을 세웠지만 조선은 세종 시대에 잠깐 반짝한 후 내내 답보 내지 퇴보를 거듭했다. 공업과 상업을 천시해 기술의 축적과 상용화가 불가능했고, 반도국가로서 상당한 수준의 해양 역량을 축적했던 조선이 해양을 포기하는 어처구니없는 실책(소위 해금정책)을 범하는 등 기본 시스템 설계에 중대한 결함이 있었다. 역성혁명을 통한 궤도 수정이 시급한 상황이었기에 전란 종결을 계기로 이순신이 거사했다면 성공할 확률이 매우 큰 상황이었다. 실로 아쉬운 역사의 한 장면이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이순신이 노량해전을 마무리한 후 역성혁명을 시도할 의지를 이미 갖고 있었을 수도 있다. 의지가 있었다면 노량해전이라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전투 역량을 오롯이 보존해 한양으로 올라가 본인의 혁신 역량을 조선 백성을 위해 발휘하는 것에 우선 순위를 두면 어땠을까? 이성계는 요동 정벌에 나서면서 본인의 사병 집단을 따로 빼서 개경으로 보낸 데 반해 이순신이 노량해전에서 전력을 다한 것을 보면 이순신에게 역성혁명의 의도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혁신의 기회를 놓치면 안 돼

조선이 새롭게 거듭날 기회는 단 한 번,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였다. 그러나 구심점이 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이순신이 죽음으로써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 곧 명청 교체기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문자 그대로 중국의 변방 제후국으로 전락해 가녀린 명맥을 유지하다가 신해혁명으로 중국 왕조의 수명이 다하자 같이 사망 신고를 받게 됐다. 조선 왕조의 수명이 길었다고 해서 조선의 시스템이 훌륭했다고 자랑하는 이들도 있는데, 이는 개인이 오래 살았으니 무척 행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 수준의 논리 비약이다.

기업의 혁신도 마찬가지이다. 기업 활동의 결과치인 이익이 발생하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고 개선될 전망이 없으면 즉시 구조조정에 들어가야 기업이 살 수 있다. 회계가 투명하지 못해 이익을 자의적으로 부풀리기 시작하면 구조조정의 타이밍을 놓칠 수밖에 없다. 대우조선해양의 구조조정 실기 원인도 회계 투명성이 확보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업의 매출 추이와 영업이익 추이를 분석하면 기업이 돌아올 수 없는 실패의 경로로 들어섰을 가능성을 탐지할 수 있다. 그러한 가능성을 탐지했을 때 기업이 제공하는 상품과 서비스의 고객 만족도, 기업 종사 인력의 스킬 믹스(skill-mix)가 기술 발전 수준을 소화할 수 있는지 여부 등을 외부의 전문가 집단과 함께 면밀히 분석해서 구조조정의 타이밍을 놓쳐서는 안 된다.


최중경 한미협회장 choijk1956@hanmail.net
필자는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Heritage 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단체인 한미협회의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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