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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Case Study: 휠라의 턴어라운드 전략

어? 이 신발은 우리 취향을 잘 알아, 10대와 소통한 휠라의 ‘화려한 부활’

이승윤,김현진 | 234호 (2017년 10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휠라는 국내 진출 초기인 1990년 대에는 젊은 이미지의 프리미엄 브랜드로 인식됐다. 하지만 주 고객층이 중장년층으로 바뀌고 주력하던 아웃도어 시장이 쇠락하면서 약 3년 전부터 고전을 겪었다. 쇠락해가던 이 브랜드는 갑자기 지난해부터 중고생을 비롯한 젊은 고객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화제가 됐다. 브랜드 히스토리를 살려 테니스화를 재해석한 ‘코트디럭스’는 무려 70만 켤레가 판매되는 신기록을 세웠다. 휠라가 재기에 성공한 주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혁신적인 생산방식과 유통방식 도입으로 제품의 질은 유지하면서 가격에 들어간 거품을 빼낸 것이 주효했다. 즉 10대, 20대 젊은 고객들이 인지하는 ‘프리미엄’의 정의를 다시 생각하며 이들이 꼽는 핵심 가치인 ‘가성비’를 공략했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김경민(연세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지난 2월11일 오전. 서울 이태원의 휠라 이태원 메가스토어에서 열린 ‘휠라 더블 디럭스 데이’에는 영하의 한파를 뚫고 모여든 사람들로 줄이 약 100m가량 길게 늘어섰다. 휠라의 인기 슈즈 브랜드인 ‘코트디럭스 커플 운동화’ 1+1 세트와 커플 티셔츠가 담긴 스페셜 패키지를 운동화 한 켤레 가격(6만9000원)에 선착순 100커플에게 판매하는 이벤트가 펼쳐진 날이었다.

두 명이 함께 짝을 지어 방문해야 하는 조건이 있었음에도 행사 시작 시간인 오전 11시가 되기 한참 전인 오전 7시부터 긴 줄이 늘어섰다. 준비한 상품은 이벤트 시작 1시간도 되지 않아 동이 났다. 이 모습을 현장에서 지켜본 휠라 직원들은 벅찬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혜택이 많은 이벤트였다 해도 브랜드 충성도가 높은 해외 럭셔리 브랜드 또는 트렌드에 민감한 ‘핫’ 한 브랜드에서나 일어나는 깜짝 매진 행렬은 나름 ‘이변’이었기 때문이다. 이 브랜드가 주최하는 행사에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몰린 것은 최근 수년 새 처음이었다. 오랫동안 근무해 휠라의 흥망성쇠를 모두 지켜본 직원일수록 ‘휠라의 귀환’에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휠라가 처음으로 한국에 소개된 1990년대, 신제품 출시 소식만 알려지면 사람들이 줄을 서기 시작하는 바람에 판매 개시일 당일 오후 5시만 돼도 물건이 동났다던 ‘전설’ 같은 선배들의 증언이 눈앞에서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휠라는 국내 진출 초기인 1990년대, 젊은 이미지의 프리미엄 스포츠 제품, 그것도 잘나가는 해외 브랜드로 인식돼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고루한 이미지가 더해지고 주 고객층이 중장년층으로 바뀌는가 하면 주력하던 아웃도어 관련 시장의 쇠락까지 겹치면서 3년 전부터 매출과 브랜드 이미지 모두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쇠락의 길을 걷는 것처럼 보였던 휠라가 갑자기 지난해부터 중고생을 비롯한 젊은 고객들의 적극적인 지지로 화제의 브랜드가 됐다. 테니스화를 재해석한 ‘코트디럭스’란 운동화는 중고생들 사이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10만 켤레만 팔아도 ‘대박’이라는 국내 운동화 업계에서 70만 켤레 판매(첫 출시 시기인 2016년 9월 말∼올해 9월 중순 누적)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러한 대중적 인기와 더불어 2011년 인수한 미국 골프기업 ‘아쿠쉬네트’가 지난해 뉴욕주식거래소(NYSE)에 상장하고, 이 회사가 휠라의 자회사로 편입된 데 힘입어 올 상반기(1∼6월) 국내 패션 기업 가운데 매출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내놓는 제품 모두 이른바 ‘대박’을 치면서 여전히 불황의 그늘에서 허덕이는 국내 패션 업계 내 경쟁자들조차 “요즘 장사가 되는 곳은 휠라밖에 없다”는 얘기를 할 정도다. 도대체 이 회사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1990년대에 이어 최근 들어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고 평가받는 휠라의 턴어라운드 전략을 DBR이 집중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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휠라의 흥망성쇠 ‘월급쟁이의 신화’.

윤윤수 휠라 글로벌·아쿠쉬네트컴퍼니 회장을 설명하는 수식어로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 언론 기사에 자주 등장했던 표현이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극복하고 영어를 무기로 미국의 유통회사 JC페니 및 국내 스포츠화 전문 브랜드 화승의 수출 담당 이사가 된 그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스포츠 전문 브랜드 시장에 눈을 뜨게 됐다.

이탈리아의 유명 브랜드였던 휠라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0년대 초반 해외 출장길에서였다. 휠라 브랜드로 미국에서 사업을 하면 잘 팔릴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는데 이미 이 브랜드의 미국 내 판매 라이선스는 한 미국인이 갖고 있었다. 사업권을 온전히 갖지 못하니 당장 큰돈이 되지 않더라도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이에 윤 회장은 그와 동업해 미국 내에서 판매 채널을 확대해 나갔다. 그 결과, 휠라 글로벌 전체에서 신발 매출이 의류 매출을 뛰어넘을 정도의 성과를 냈다. 휠라 본사는 윤 회장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고 1991년 이탈리아 본사는 신발 판매 라이선스까지 부여하면서 윤 회장에게 직접 휠라코리아를 설립하라고 독려했다.

휠라코리아의 지분 90%는 이탈리아 본사가 소유하고 10%는 윤 회장이 갖는 조건으로 휠라 본사가 전문경영자로 윤 회장을 낙점한 셈이었다.

당시 연봉 100만 달러를 받은 덕에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렸던 그는 한국 사업은 물론 휠라 본사의 미국 내 운동화 사업도 주도하는 등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나갔다. 1991년, 자본금 3억5000만 원으로 시작한 이 회사는 해마다 평균 80.8%의 높은 매출 성장률을 기록하는 등 본사도 놀랄 정도의 신기록을 경신해나갔다. 한국법인 창립 10년 만에 전 세계 휠라그룹 가운데 가장 높은 매출 대비 순이익을 기록하는가 하면 외형적으로도 미국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글로벌 시장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1


1992년 4월부터 내수 사업을 시작한 윤 회장은 전 세계에 판매하는 휠라 신발 재료 공급에 대한 관리, 즉 수출사업과 국내 비즈니스를 함께 담당했다. 당시 신발 사업은 디자인은 미국이, 개발 및 자재 공급은 한국이, 조립생산은 동남아에서 실시하는 삼각분업 시스템을 도입해 대대적인 성공을 거뒀다. 한국의 신발 사업이 1990년대 들어 완전히 사양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판단될 때 윤 회장은 사양의 양상이 조립 부문에서만 나타난 것이지 자재 부문에선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이에 과감하게 신발개발센터를 국내에 설립함으로써 한국이 전 세계 휠라 운동화의 자재 공급 센터로 자리매김할 수 있게 했다.

국내에서 휠라는 이탈리아 프리미엄 브랜드로 인식되며 큰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사업은 1997년 12월, 외환위기와 함께 위기를 맞았다. 당시 국산품 애용 운동 붐이 불면서 휠라는 고가의 해외 브랜드라는 이유로 국민 정서에 반하는 사치품으로 인식됐다. 윤 회장은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정면 돌파 전략을 썼다.

주요 일간지에 ‘무엇이 진정 국산인가?’ ‘WTO 체제하에서 국산품의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카피가 실린 광고를 실은 것이다.

비록 해외 브랜드 이름을 쓰지만 국내 판매 제품의 98%를 국내에서 생산하고 연간 1조6000억 원에 달하는 신발을 수출하고 있는 휠라 제품을 과연 수입품이라 부를 수 있는지 의도적으로 논쟁을 일으킨 결과 국민들을 설득할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위기 대처 능력은 이후 국내 경영학계에서 기업가정신을 연구할 때 등장하는 단골 소재가 됐다.2


스포츠의류가 주 상품군이었던 브랜드에서 운동화 사업을 적극 전개해 오히려 새로운 상품군이 기존 상품군 매출을 뛰어넘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2007년, 드디어 휠라코리아는 모기업인 휠라글로벌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인수 당시 81년 전통의 이탈리아 브랜드였던 휠라는 전 세계 50개국에 1만여 개의 매장을 갖고 있었으며 나이키, 아디다스, 푸마 등과 더불어 세계 4대 스포츠 브랜드 중 하나로 꼽혔다.

특히 한국에 진출한 해외 브랜드를 운영해 온 한국 지사가 다국적 기업 본사를 인수한 국내 첫 사례라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휠라 측은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에서 성공의 기틀을 쌓은 뒤 글로벌 브랜드로서 세계 시장 장악에 나서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국내외에서 새로운 날개를 달고 탄력을 받아 비상하던 휠라는 그러나 2011년 즈음, 소비 침체와 트렌드 변화에 밀려 고전하게 됐다. 2000년대 중반까지 나이키, 아디다스와 함께 국내 스포츠의류 시장에서 ‘빅3’ 자리를 지켜왔지만 경쟁 브랜드의 약진 속에 부진의 늪에 빠진 것이다.

대한민국을 강타한 아웃도어 열풍에 가세해 2010년 ‘휠라 스포츠’란 이름으로 아웃도어 사업을 시작하기도 했다. 2013년에는 브랜드명을 ‘휠라 아웃도어’로 바꾼 뒤 사업을 본격 확장했지만 결국 시장 포화와 불황으로 영업을 중단했다.

한때 젊은이들이 사랑했던 브랜드는 이제 중장년층의 브랜드로 인식되며 경영진의 바람과 달리 빠르게 노쇠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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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를 삼킨 지사, 그 이후

윤윤수 회장의 장남, 윤근창 부사장(42)은 휠라코리아가 막 글로벌 본사를 인수한 시점인 2007년, 미국에서 MBA(경영학석사) 과정을 마쳤다. 자연스레 미국 뉴욕 맨해튼에 위치한 미국 현지법인, 휠라USA에서 사업개발 및 라이선싱·소싱담당자로 근무하며 현장 경험을 쌓았으며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속수무책으로 붕괴되는 미국의 신발 시장을 지켜봤다. 2008년 이후 사람들은 지출을 자제했고 가격 대비 품질, 즉 가성비를 꼼꼼히 살피며 보수적으로 소비하기 시작했다.

휠라로서는 지금까지의 상품 전략을 전면적으로 수정하지 않으면 안 됐다. 2007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 내 주식시장도 호황이었고, 사람들의 씀씀이도 컸던 만큼 휠라뿐 아니라 많은 글로벌 브랜드들이 미국 시장에서 고가 제품 위주의 프리미엄 마케팅 전략을 썼다. 하지만 비싼 제품에 지갑을 닫은 고객들은 고가 제품을 외면하기 시작했고 각 업체는 ‘프리미엄 포지셔닝’ 대신 ‘가성비(price value)’ 전략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상가에서 일부 마진을 희생하고 할인을 하는 디스카운트 전략은 마진에 미칠 타격이 커 보였다. 장기적으로 브랜드 가치를 훼손시킬 위험도 있었다.

윤 부사장을 비롯한 경영진은 이에 소싱 전략에 손을 대기로 했다. “원가 관리로 소비자가는 낮추되 마진도 최대한 보호하는 방식을 택해 판매 사이드(Sell side)에서뿐 아니라 구매 사이드(Buy side)’에서도 가격 혁신을 도모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판매처인 휠라도 마진을 낮추지 않을 수 있었고, 소비자로서도 좀 더 저렴한 가격에 상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같은 구조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운동화의 전통적 제조 모델을 흔드는 ‘혁신’이 필요했다.

전통적으로 운동화 생산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통해 이뤄진다. 머천다이저(MD)가 신발을 기획하면 특정 공장에 비용을 지불하고 샘플을 제작하거나, 구매단가에 샘플제작 비용을 추가한다. 그리고 나선 결국 이 샘플을 만든 공장에 생산을 의뢰한다. 자기 자본을 들여 공장을 짓고, 스스로 샘플을 제조하는 것보다 투자비가 덜 들고 인력시장 불안에 따른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세계 유수 브랜드들도 모두 이 방식을 택한다.

하지만 이러한 선(先) 샘플 제작, 후(後) 주문 방식을 택할 경우 묘한 갑을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 딜레마였다. 여러 가지 편의상 샘플을 제조했던 공장에 관행적으로 대량 생산을 의뢰하다 보니 주문을 넣은 브랜드 입장에서는 생산과 관련한 협상 파워를 잃게 된 것이다.

특히 불황기에 이러한 생산 구조가 불리했다. 공장 측은 생산 단가를 낮추려 하지 않았고 소비자는 저렴한 제품만 찾으니 ‘마진의 덫’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싸게 사려는 소비자들이 많은 ‘Sell side’와 생산가를 낮추지 않으려는 생산 공장이 포진한 ‘Buy side’에서 모두 압박을 받았다. 휠라는 글로벌 선두주자들이 세운, 전통적 제조 구조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2008년, 오랜 현장 조사 끝에 기존 역학구조를 바꾸는 패러다임 전환을 시도했다. ‘통 큰 투자’로 샘플 제작 공장 역할까지 수행하는 소싱센터를 중국과 홍콩지역에 설립하고 신발 샘플을 100% 자체 개발하기로 한 것이다. 직접 개발한 샘플을 들고 공장들을 돌아다니며 거꾸로 가격을 제시하게 하는 입찰(bid out) 방식을 택하니 생산단가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었다. 이렇게 ‘Buy side’에서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고, 이 경쟁력을 소비자가에 그대로 반영해 판매가를 낮춤으로써 ‘Sell side’에서도 가격 혁명을 이룰 수 있었다.

휠라코리아가 휠라글로벌을 인수해 처음으로 미국 법인을 운영하던 당시 매출액은 3500만 달러, 영업적자는 3500만 달러였다. 그러나 지난해 7월, 휠라USA의 최고재무책임자(CFO)까지 지낸 윤 부사장이 미국에서의 직함을 모두 내려놓고 귀국하던 당시에는 매출이 3억2000만 달러로 인수 당시 대비 10배가량 뛰었다. 순영업이익 역시 2200만 달러로 5700만 달러에 달하는 개선효과를 봤다. 신발 생산과 관련된 ‘패러다임 시프트’ 전략이 주효했다는 뜻이다. 이런 생산 구조가 안착되고 미국 사업이 흑자 전환되기까지는 약 3년이 걸렸다.

특히 샘플의 개발 거점을 자체 운영하는 ‘Buy side 전략’은 휠라의 성공 사례를 지켜본 경쟁업체들조차 쉽게 모방하지 못하는 휠라만의 경쟁력이 됐다. 이들은 샘플 개발에 따른 투자비와 그 리스크를 온전히 한 브랜드가 감당하기에는 버겁다고 판단했기에 쉽사리 추격자로 나서지 못했다. 이처럼 자체 샘플 제작을 통해 제조의 역학관계를 바꾼 휠라의 ‘Buy side 전략’은 이 브랜드의 재기에 있어 혁신의 단초가 됐다.

휠라코리아 역시 이 무렵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했다. 윤 부사장도 2016년 7월부터 휠라코리아 운영에 전력을 다하면서 기존의 틀을 깨는 브랜드 리뉴얼 및 혁신 작업이 급물살을 타기 시작했다.

윤 부사장은 미국에서 경험했던 성공 공식을 한국에도 똑같이 적용했다. 마침 국내에서도 2008년 무렵의 미국에서처럼 가치소비 트렌드가 전파되고 있었다. 미국에서 이미 성공이 검증된, 그리고 중국 내 샘플 공장이 이미 가동을 시작해 바로 변화를 시도할 수 있었던 ‘Buy side 전략’은 시작 6개월 만에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운동화 생산 프로세스를 따르자면 신발 부자재에 들어가는 원가뿐 아니라 인건비, 공장 측 마진까지 합쳐 공장이 제시하는 가격을 받아들이는 것밖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

휠라는 운동화 생산과 관련한 오랜 노하우로 공장 측에도 적정 이윤을 보장할 수 있는 가격을 제시하고, 소비자 가격을 낮춰 많이 팔 요량으로 생산 물량을 늘린다. 따라서 공장 입장에서도 ‘규모의 경제’ 효과를 볼 수 있어 휠라의 발주 내역이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다.

특히 휠라가 전 세계에 보낼 운동화를 생산할 목적으로 국내 공장에 생산을 의뢰하는 물량은 그 양이 압도적이다. 한국이 이 글로벌 브랜드의 본사가 위치한 곳이다 보니 국내 판매 물량뿐 아니라 일부 해외 부문 물량도 생산하게 되는데 그 물량이 연간 3000만 켤레에 달한다. 그 뒤를 잇는 2위 발주 업체와도 격차가 극심하기에 협상력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경쟁자들이 따라 하고 싶어도 이 정도의 가격 협상력이 없어 마진 구조를 형성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모방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게 패션업계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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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윤 이승윤 |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

    필자는 영국 웨일스대에서 소비자심리학으로 석사 학위, 캐나다 몬트리올의 맥길대에서 경영학 마케팅 분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비영리 연구 기관 디지털마케팅연구소(www.digitalmarketinglab.co.kr)의 디렉터로 디지털 및 빅데이터 분야에서 다양한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저서로는 『공간은 경험이다』 『디지털로 생각하라』 『바이럴』 『구글처럼 생각하라-디지털 시대 소비자 코드를 읽는 기술』 『커뮤니티는 어떻게 브랜드의 무기가 되는가』 등이 있다.
    seungyun@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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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현진 김현진 | 동아일보 편집장·경영학박사
    brigh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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