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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aphysics on Trend

아방가르드·키치·리바이벌, 순환은 계속된다 선도자 되려면 아방가르드를 주목하라

조승연 | 183호 (2015년 8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기술 주도 R&D를 중시하는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아마도 상품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에 왔는지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원들이 트렌드의 생리를 모르면 상품의 디자인 경쟁력을 판단하기 힘들다. 아무리 미적으로 훌륭한 디자인도 아방가르드-키치-리바이벌 사이클에서 하향선을 타고 있다면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미국의 여피족이미니멀리즘을 차용해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켰지만 이후 보보스족이 등장해 그들만의 문화를 창조하며 여피족의 문화를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밀어냈다. 이런 현상은 늘 반복된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항상 아방가르드 예술이 있다. ‘선도자가 되고 싶은 기업이라면 아방가르드부터 주목하라.

 

편집자주

매해 연말이 되면 ‘20XX년 트렌드 예측류의 책이 서점에 넘쳐납니다. 하지만 대부분 신문기사와 몇 가지 특정한 문화현상을 짜깁기한 것에 그쳐 실망을 줄 때가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영자들은 사회와 문화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 위치한 소비자들의 트렌드 변화를 알고 싶어 합니다. 글로벌 문화 전략가인 조승연 작가가 현재 세계적트렌드 리더와 그들이 만들어내는 해외의 최신 문화 트렌드, 그리고 그것이 비즈니스에 미칠 영향에 대해 소개합니다.

 

 

1. DKNY, Calvin Klein, Giorgio Armani와 미니멀리즘

1980년대 미국 뉴욕에 DKNY, CK, Armani라는 3개의 브랜드가 혜성처럼 떠올라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모든 것이 직각으로 떨어지는 간결한 디자인과 장식 없는 회색·하얀색·검은색 등 무채색이 바로 이 세 브랜드의 특징이다. 매장 인테리어도 다른 브랜드들과 달리 딱딱하고 심심한 편이었는데 구체적으로 보면 회색 콘크리트 배경에 내부 장식이 전혀 없고, 마치 공방처럼 쇠파이프에 옷을 걸어놓았을 뿐이었다. 화려함을 중요시하던 당시에, 이처럼 심플한 디자인과 매장구성은 많은 이들에게 새롭고 낯설게 다가왔다. 결국 이처럼 심플한 뉴욕의 디자인은 1980년대 파리와 런던을 제치고 세계 문화예술의 중심으로 부상한 뉴욕만의 패션 스타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오늘날의 우리나라에서모던한카페, 음식점, 사무실을 꾸밀 때 응용될 정도로 전 세계의 유행을 리드한 글로벌 트렌드로 삽시간에 확장됐다. 마케팅이 중요한 기업들 입장에서, 자신이 세팅한 트렌드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다. ‘트렌드를 만들어 퍼트릴 수 있는 힘의 원천은 무엇일까?

 

뉴욕에 등장했던 위 세 브랜드에 대한 얘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세 브랜드의 디자인은 처음부터 패션 디자이너들이 창작한 게 아니었다. 당시 뉴욕그리니치 빌리지의 아방가르드 예술의 한 분파였던미니멀리즘이라는 예술 경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 미니멀리즘은 1980년대의 뉴욕에서 시작돼 파리, 런던, 도쿄, 밀라노로 이어지는 글로벌 시티의 전반적인 트렌드로 퍼져나갔다.그 근원을 따져 보면, 독일 출신의 건축가 그로피우스(1883∼1969)와 프랑스의 화가 이브 클라인(1928∼1962)이 단초를 놓은 것으로 여겨진다. 두 예술가는 예술 작품에서 장식을 없애고순수한 비율과 상징의 예술로 옮겨가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로피우스는적은 것이 많은 것이다(Less is more)’라는 구호를 내놓았고 이브 클라인은 아무 것도 그려져 있는 않은 파란 캔버스를 전시했다. 이 두 사람의 이러한 예술 활동은 미국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에게 큰 자극이 됐다. 1956, 미국에서 조각가 토니 스미스가 한 변이 180㎝인 거대한 정사각형 철을 출품하면서 뉴욕의 아방가르드를 표방하는 예술가들은줄여 나가는경쟁을 벌였다. 예술이란근본적인 것으로 줄여나가는 것이라는 믿음에 기인한 활동이었다. 예술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점점 빼는 과정이었고, 이는미니멀리즘의 사조로 정착됐다.

 

뉴욕에서 활동하던 패션 디자이너 도나 캐런, 캘빈 클라인 등은 미니멀리즘의 예술 트렌드를 받아들여 남녀 정장을 다시 디자인했다. 몸의 근본적인 직선을 방해하는 모든 커브와 색상, 패턴이나 버튼 등의 장식을 모두 없앤 패션을 추구했던 것이다.젊은 뉴욕커들은 이미 미니멀리즘 예술 경향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미 색채와 장식은촌스러운 것’, 정사각형, , 직사각형 같은 원천적인 형태와 비율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공간이나 디자인을도회적인 것’ ‘세련된 것이라는 사고가 싹트고 있었다. 따라서 도나 캐런과 캘빈 클라인의 심플한 패션은 뉴욕이라는글로벌 A 시티1 젊은이의 상징으로 부상했다. 글로벌 A 시티인 뉴욕의 디자인은 다시 이들의 삶을 묘사한 수많은 영화와 TV 프로그램, 잡지를 타고 한국의 ‘National Hub’인 서울의 연예인들까지 자극했고, 지금은 한국 시골에 있는 카페도 어느 정도 장식과 색상을 자제해야만세련됐다’ ‘모던하다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우리에게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전 세계 기업들은세련됨이라는 문화권력을 선점하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이처럼 아방가르드 예술은 산업디자이너들이 응용할 수 있는 획기적이고 새로운 인생관을 창조하는 활동 방향을 제시한다. 영국 광고업자 찰스 사치는 상품의 진정한 가치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 만든 스타일을 선점해 문화적 고지를 점령하는 것에서 나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YBA(Young British Award)라는 상을 통해 영국의 아방가르드 예술을 후원한다.

 

실제로 영국 정부의 예술 후원 단체인 ‘British Art Council’의 훈장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다.

 

우리들의 목표는 영국의 창의적 정예부대를 구성해 영국 기업과 국익의 상징적 우위와 장기적 수익성을 극대화하는 데 있다.

- British Art Council 헌장

 

 

 

2. 아방가르드, 트렌드의 R&D 공장

현대 미술평론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아방가르드는 문화 사업의 R&D라고 선언했다. 디자인과 스토리텔링이 기업의 승패를 결정하는 오늘날, 우리는 트렌드 리더로서 아방가르드의 역할을 한번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18세기 산업혁명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기업들은 기술적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사투를 벌여왔다. 산업혁명 초기, (독일) 프로이센 프리드리히 황제는 영국으로 밀사를 보내 제임스 와트의 스팀 엔진 프로토타입을 훔쳐갔다. 기술력은 기업뿐 아니라 국가의 생존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산업시대의 기업들은, 새로운 기술이라는 것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기업들이 앞다퉈 우수한 대학에 많은 돈을 기부해 기초 물리학, 생물학 같은 순수 과학 연구를 지원했다. 이런 기초과학이 발전된 나라에서 기업을 해야만 원자력 발전이나 로켓엔진 개발, 인터넷기술 같은 파괴적 기술이 나올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는 상당 부분 사실로 증명되기도 했다. 트렌드를 기술에 비교하자면 아방가르드는 순수 과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림 2>를 보면서 생각해보자. 기초 과학(Basic Science), 즉 물리학 등에서 전기공학이라는 응용 학문(Applied Science)이 나온다. 예를 들면 전기/기계공학자들은 실험실에서 로봇 같은 것을 만들고, 기업은 이 로봇이라는 상품을 통해 어떻게 소비자들의 니즈를 충족할 수 있는지를 분석해, 그 기능을 가진 상품으로 생산해 시장을 선점하는 것이다. 아방가르드도 마찬가지다. 한 아방가르드 예술가가 작품과 삶의 방식, 세상을 보는 새로운 눈 등을 세상에 제시한다. 만약 다른 예술가들이 이 새로운 예술가의 작품, 생활 방식, 철학 등에 감명을 받게 되면, 그들이 앞다퉈 같은 스타일 작품을 내놓고 새로운 전시, 인스톨레이션 등으로 확대 재생산해낸다. 산업디자이너들은 이런 예술적 움직임을 포착해서 새로운 인테리어, 패션 아이디어를 만들어 낸다. 이것이 비슷한 삶의 패턴을 가지고 있는 한 세대의 디자인으로 채택이 되면세련된새 트렌드를 만들어 내고 옛 트렌드를 밀어낸다.

 

1) 아방가르드에서 트렌드로: Appropriation

하지만 모든 아방가르드가 소비 트렌드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한 도시에도 수많은 종류의 아방가르드 예술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특정한 아방가르드 예술이 소비 트렌드로 이어지려면 Appropriation(전용 혹은 차용)이라는 현상이 나타나야만 한다. 즉 그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미적 스타일이 한 세대 또는 같은 라이프스타일을 공유하는’(히피족, 여피족, 폭주족)의 자기 표현 수단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CK DKNY 같은 브랜드가 새로운 패션 트렌드를 리드한 상황을 보자. 1980년대 미국 뉴욕에 여피(Yuppie, Young Urban Professionals)라는 새로운 계급이 생겨났다. 당시 미국에서 폭발적으로 발전하던 금융, 부동산, 광고업 종사자들은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추고 20∼30대에 억대연봉(six-figure salary)을 받는 신흥 부유층으로 떠올랐다. 이들은 이전까지 지식인들과 비즈니스맨이 서로 다른 계층으로 구분됐던 시대와 다른 시대를 만들어냈다. 지식과 돈을 겸비한 새로운 엘리트로 부상한 것이다. 뉴잉글랜드의 부잣집 아들들(프레피족)이나 캘리포니아의 신흥 부자들과는 다른 가치관을 가진 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표현해 줄 새로운 스타일이 필요했다. 수학과 컴퓨터를 이용한 논리적인 경영 철학으로 무장한 여피 세대는 이미 존재하는 미니멀리즘이라는 예술 속에서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을 찾았다. 미니멀리즘의 무채색과 간결한 선, 심플한 디자인은 감정이나 인간 관계 따위에 흔들리지 않고 오직 효율과 논리만 따지는 자신들의 가치와 잘 맞아 떨어졌다. 수학과 컴퓨터로 인간 조직을 만들어 나가는 새로운 세대의 비즈니스맨들은 미니멀리즘의 수학적 비율과 기하학적 단순함을 자기들의 철학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미니멀리즘은 빠른 속도로 여피족들의 상징으로 차용됐다. 이들이 전 세계의 소비 트렌드 리더로 자리매김하면서 그들의 미적 선택은 전 세계세련됨의 기준이 된다. 이렇게 미니멀리즘은 여피들에게 Appropriation 됨으로써 글로벌 시장의 트렌드를 재편성하게 된 것이다.

 

많은 디자이너나 마케터들이 착각하는 것은 아방가르드의 예술적 스타일과 이것을 자기들의 스타일로 Appropriate 하는 그룹이 비슷한 철학과 스토리,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할 거라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설명하겠다. 뉴올리언즈 음악가 루이 암스트롱의 성공과 함께 미국 남부의 흑인 음악인재즈가 널리 확산됐다. 더불어재즈와 맞는스윙댄스도 인기를 얻었다. 재즈와 스윙댄스를 자신의 스타일로 승화시킨 소위플래퍼’족들은 미국 동부의 부유층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스콧 피츠제랄드의 소설 <위대한 게츠비>에 나오는 재벌 2세 부인 데이지는 오늘날까지플래퍼를 상징하는 문화 캐릭터다. 플래퍼들에게 재즈는 흑인들의 한이 서린 노래라기보다 여성의 활동을 억압하는 답답한 유럽 고전 문화에 반기를 든 활동적이고 주도적인새로운 미국여성들을 위한미국 음악으로 재해석됐다.재즈와 스윙에서 파생된 트렌드는 수많은 소비 트렌드를 변화시켰다. 먼저 스윙댄스를 출수 있는 활동적인 여성복에 대한 욕구는 샤넬, 비요네, 랑방 같은 디자이너들이 추구한 활동적인 여성복의 전성기를 열어줬다. 점차 여성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디스플레이할 수 있는카바레라는 공간이 생기고, 공공장소에서 메이크업을 고치는 행동이 유혹의 상징으로 떠오르면서 화장품의 케이스가 고급스러워졌다. 먼저 이 시장을 선점한레블론같은 브랜드의 수익이 올라갔다. 이와 관련한 새로운 시장도 창출됐다. 또 여성들이 남성들만의 공간이었던클럽에서 남자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풍조가 자연스러워지면서 여성 취향에 맞는 칵테일 시장이 발전됐다. 럼주의 매출이 늘었고, 여성을 겨냥한보그같은 담배가 출시된다. 앞서 언급했듯 재즈 자체는 흑인들의 예술 행태였지만 재즈를 자신들의 음악으로 Appropriation한 플래퍼족은 미국 동부의 부유층 여성들이었다는 게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20세기 초의 이탈리아 예술가 마리네티는미래주의 선언문이라는 글을 통해서움직임의 아름다움이라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선포했다. 마리네티는 20세기가 됐는데도 이탈리아의 예술은 여전히 로마시대부터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굳건히 서 있는 고대 미술의안정성’, 즉 대칭과 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서 ‘20세기의 이탈리아 예술은 파괴와 재건이라는 변화와 움직임을 포착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의 아방가르드적인 이 선포는미래주의(Futurismo)’라는 예술 경향을 낳았다. 이 미래주의를 자기 스타일로 Appropriation한 그룹은 놀랍게도 무솔리니가 이끌던파시스트당원들이었다. 당시 산업화를 견인하던 영국, 프랑스, 독일에 비해 크게 뒤처진 이탈리아를 열강의 반열로 끌어올리겠다는 구호를 외치던 그들은 마리네티의 미래주의 선언문에서움직임과 변화의 아름다움을 제시한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자동차와 비행기가아름답다라고 재해석해 자동차 산업을 육성해 경제를 활성화하겠다고 선언했다. 마리네티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이것이 국가주의적으로 해석돼 차용된 것이다. 그 결과 미래주의적인 테마를 응용한 수많은 브랜드가 지금까지도 이탈리아의 산업디자인을 대표하게 됐다. 대표적인 상품들이 페라리와 람보기니 등의 스포츠카, 라바차 에스프레소 기계, 베스파 오토바이 등이다.

 

이 사례는 또한 미래의 트렌드를 남보다 먼저 포착하고 거기에 걸맞은 상품을 시장에 내놓으려면 아방가르드 예술가의 의도와 이 예술을 자기 스타일로 응용하는 그룹 사이의 동학(dynamics)을 정확하게 읽는 눈을 길러야 한다는 교훈도 준다.

 

 

 

 

2) 아방가르드에서 키치(kitsch), 키치에서 리바이벌(revival)

미국 코미디언 마이클 밀러는한 세대의 하드코어 음악은 항상 다음 세대의 엘레베이터 음악이라고 말했다. 한때 부모들 몰래 듣던 괴상한 음악이던 펑크 메탈이나 힙합 음악들이 지금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놀이공원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으니 말이다. 아방가르드 예술이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힘은 생소함이다. 사람들은 낯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신선하기 때문에 이에 끌린다. 그런데 너무나 낯설고 새롭던 것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보편적인 것으로 변해 버린다. 그런 인간의 속성 때문에 원래 그것을 창조했던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모든 사람들의 것이 된 그 디자인/스타일/소리는 더 이상 사람들에게 어떤 가치도 창출하지 못하게 된다. 마치 매일 보는 화분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을 피워도 보는 것이 신선하지 않은데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freshness’가 없어졌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에 1970∼80년대 건축된 고급 예식장 전면을 장식한 파사드는 대부분 그리스 로마풍의 페디먼트(삼각형 지붕)와 기둥이 붙어 있는 모양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서양 영화에서나 보던 새로운 건물 모습이었다. 비싼 대리석이 아닌 대체품으로 건물 전면의 파사드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질감을 낼 수 있는 새로운 건축 자재 기술 혁명 덕분이다. 신기술의 상징까지 돼 버리니 그 자체가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또한 당시는 대한민국이 급속한 경제발전을 이루던 시절이었던 만큼 우리나라 젊은층들도 부유한 서구인들과 비슷한 건물에서 호화로운 결혼식을 치를 수 있게 됐다는 환희와 즐거움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보다 10년 정도 늦게 우리나라에도 CK DKNY 브랜드가 추구하고 미국 여피들이 즐기던 미니멀리즘 스타일이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 매김하면서 상황이 바뀐다. 미니멀리즘 디자인을모던하다라고 받아들인 후에 자란 젊은 층들은쓸데없는 장식을 촌스럽게 여기게 됐다. 그래서 한때 부유층을 위한 고급 예식장으로 여겨지던 고대 그리스, 로마풍의 파사드가 있는 예식장 건물들은 서울이 아닌 한적한 시골 예식장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낡고 촌스러운 스타일이 됐다.

 

레이스 커튼, 그리스 로마식 가짜 기둥과 삼각 지붕, 바닥에 깔린 붉은 카펫, 유럽의 19세기 스타일로 그려진 서양화 등은 한때 우리에게는 부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움의 상징으로 전락했다. 이렇게 도태된스타일적 언어를 문화학자들은키치(Kitsch)’라고 부른다. 새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는 옛날 기계들이 쓰레기 통에 버려지듯이 키치한 물건들 역시 쓰레기통에 버려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상품을 마케팅하는 사람은 새로운 상품을 출시할 때 반드시 두 가지 혁신을 동시에 포함해야 한다. 기술적으로도 새롭지만 문화적으로도 첨단인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하지만 키치로 전락한 스타일이 대중들의 머리에서 잊혀질 정도로 시간이 더 많이 지나면 오히려 그 진가를 알아보는 새로운 그룹이 생긴다. 그래서 쓰레기통에 버려진 트렌드를 다시 끄집어내서 새로운 형태로 부활시키기도 한다. 이것을리바이벌이라고 한다.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스타일 리바이벌 트렌드는 다름 아닌 중세 이후의르네상스. (참고로리바이벌 - 다시 살리다르네상스 - 다시 태어나다는 어원적으로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 중세기에 새로 생겨 고딕 스타일로 절정에 이룬 유럽의 북방 건축과 미술 스타일이 키치해지기 시작하자 오히려 그보다 훨씬 먼 옛날 스타일인 그리스 로마 시대의 스타일이 고루함이 아닌 젊음을 대표하는 스타일로 부상했다. 이후에도 르네상스 스타일이 바로크, 로코코 등으로 진화하자 18세기 말 젊은 혁명파들이 르네상스 시대의 순수함을 되찾자는 새로운 문화 트렌드를 만들기도 했다. 이것을신고전주의(Neo-classical)’라고 한다. 19세기에는 신고전주의에 질린 젊은이들이 르네상스 시대 이후로 버려진 중세 스타일을 자신들의 아이콘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바로 고딕 리바이벌 스타일이다. 이처럼 미적 트렌드는아방가르드 생성키치화리바이벌의 사이클을 이루는 패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유행은 돌고 돈다라는 말이 생긴 것 같다. 더 근시안적으로 봤을 때 1970년대 스타일의 셔츠와 바지가 오늘날 다시 유행하거나 사람들이 아날로그 시대 스피커 모양의 아이폰 스피커를 구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3. 네 종류의 엘리트 혹은 선도자

아방가르드를 Appropriation한다는 것은 어떤엘리트 라이프스타일 그룹이 예술가들의 생소한 비전을 자기들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이 과정을 통해 한 그룹을 대표하는 새로운 스타일이 생겨나고 이 스타일을 이용하는 그룹이 글로벌 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면서 글로벌 트렌드를 이끌게 된다. 지금 한 스타일을 글로벌하게 퍼트릴 수 있는 대부분의 Gatekeeper들은 뉴욕, 파리, 런던, 도쿄라는 소위 4개의글로벌 A 도시에 집중돼 있다.

 

각 도시에서도 서로 분리된 엘리트가 존재한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다음과 같은 표를 이용해서 트렌드 리더들의 취향을 분석했다.

 

 

 

이 표를 사용해서 1980년대 뉴욕의 상황을 소비 그룹()별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나온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로 바뀐 상황은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다.

 

 

< 2> < 3>을 들여다보자. 1980년대에는 다양한 문화 산업들이 부흥하면서보헤미안들이 신흥 부유층으로 떠올랐다. 그래서 1990년대에는부르주아화 된 보헤미안이라는 뜻에서 보보스 라는 단어가 생겼다. 이들은 1980년대에 활약하던 보헤미안 예술가들의 라이프스타일을 Appropriate 하게 된다. 페인트가 묻은 청바지, 구겨 신은 컨버스 운동화, 조금 지저분한 머리 스타일과 마치 예술가의 스튜디오처럼 그림을 걸지 않고 바닥에 기대 놓은 인테리어 등이 보보스라는 트렌드를 만들어 냈다. 이때 발빠른 패션 사업가들은 디젤 같은 고가 청바지, 케네스 콜처럼 정장으로 보이지 않는 가죽신발을 출시했다. 그리고 음식 사업에서는 벨기에 레스토랑 사업가 장-쥬르지가 허름한 뉴욕의 골목 지하 어두운 곳에 Mercer Kitchen이라는 레스토랑을 열고 내부에 긴 테이블을 놓고 모르는 사람끼리 같이 앉아서 밥을 먹는 분위기를 만들어 크게 성공했다.

 

 

이들의 스타일이올라(Come up)’오면서 여피들의 미니멀리스트 스타일은 촌스러워졌고, ‘It’s too yuppy’ 라며 무시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여피들이 선호하던 차갑고 기하학적 공간을 기피하는 현상도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의 시기에 글로벌 A 도시에서는 이미키치해져서폐기된여피 스타일이 동아시아를 비롯한 BRICS 국가에서뉴욕 스타일로 포장돼 널리 퍼졌다. 그러나 이미 뉴욕에는 힙스터라는 새로운 소비족이 생겨는 중이었다. 이들은 스칸디나비아 예술가들의 공동체 위주, 친환경적 아방가르드 라이프스타일을 Appropriation하게 된다. 그래서 미국의 친환경 음식 상표인 Whole Foods와 기업의 공동체 정신을 테스트하는 Fair Trade 등등의 인증사업이 성장하게 됐다. 점점 이들의 친환경과 공정 무역의 정신 등이 보이지 않는 문화권력이 되면서 ‘Muji’(말 그대로 브랜드가 없다는 뜻) 같은 브랜드가 커졌고, 디자인보다는 만드는 과정에서 피해본 사람이나 동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 Campers 같은 브랜드가 글로벌 시장으로 퍼져나갔다.

 

이렇게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스타일을 Appropriate하는 그룹은 대체로 자신들이 새로운 삶의 방식들이 기성세대들 보다 낫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방법으로 일하고, 돈 벌고, 살아가는 젊은 미래의 엘리트들이다. 그래서 모든 기업은 앞장에 소개한 < 1, 2, 3>의 하단 왼쪽에 있는 그룹(아방가르드 예술가, 도시 보헤미안, 힙스터)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를 찾아내는 것에 집중한다.

 

 

예를 들어 한 재단에서는 <그림 3>과 같은 도면을 만들어 캘리포니아 주 내의 식품사업 트렌드를 분석하려 했다.

 

우측 상단은 기성세대의 부유층을 상징한다. 이들은 주로 유럽의 고메(Gourmet) 음식, 즉 전통적으로럭셔리하다고 인정된 상품을 선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송로버섯, 프로슈토(이탈리아의 하몽), 와인, 스테이크 등을 선호한다. 좌측 상단은 지금 사회적 성공과 새로운 문화를 둘 다 가지고 있는 서 있는 전성기의 엘리트, 즉 일반 캘리포니아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다. 이들은 식자재와 요리 스킬에 많은 신경을 쓰기 때문에 슬로푸드, 유기농, 아니면 통구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미슐랭 가이드 평가에 많은 것을 의존하고, 프렌치 런드리(캘리포니아의 유명한 음식점)를 음식의 최고로 친다는 것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많은 지식과 문화 자본으로 미래의 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젊은 계층들은 (좌측 하단) 어떨까? 이들은 집에서 직접 사우어크라우트(발효 배추)나 요구르트를 발효시키고 빵을 구워 먹는다. 음식점보다 또래 집단을 통해 유지되는 언더그라운드 저녁식사 동아리를 통해서 새로운 요리를 맛본다. 이런 트렌드를 포착한 회사는 한국의 고유 발효 배추인 김치 시장의 세계 시장 진출 가능성을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발효 배추를 이미 선호하고 있는 그룹에 판매하는 것이 좋으며 그러려면 유명 셰프가 아닌 언더그라운드 음식 클럽이나 푸드 트럭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실제로 한 캘리포니아의 교민은김치 타코트럭이라는 이동식 식당을 만들고 위치를 트위터 등으로 공개하고 언더그라운드 느낌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뒀고 미국의 유명 셰프 안토니 볼데인의 TV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우측 하단은 금전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이 둘 다 낮은, 그야말로평범한중산층이다. 이들의 취향은 아버지 세대나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트렌드를 따른다는 것 자체가 돈과 정보를 과시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자본이 없는 사람이 새로운 트렌드에 둔감한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그림 3>에서 이들은 패스트푸드, 튀김 음식, 맥주 등전형적인취향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예를 들어서 한식이라는 새로운 음식을 캘리포니아에 마케팅한다면 이런 계층에게 새로운 문화, 음식, 상표를 마케팅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4. 결론

기술의 전파 속도가 빨라지면서 경쟁자들 사이의 기술적 우위는 점점 구분이 어려울 만큼 비슷한 수준을 가지게 됐다. 그렇기 때문에 소비자들은 점점 더 브랜드의 문화적 우위를 보고 상품 구매를 결정하는 경향이 뚜렷해졌다. 기술적 우위를 만들어 내려면 기초 과학이 필요하듯 문화적 우위를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신선한 시각이 필요하다. 이런 시각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 바로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다. 이런 아방가르드는 Traction(견인력)이 생기면 점점 하나의 예술적 집단으로 커지고, 이것이 어떠한 엘리트 그룹에 의해서 Appropriate되면 새로운 트렌드로 발전하는 패턴을 가지고 있다. 이런 과정을 모르는 기업들은 자기 제품이 왜 소비자들에게 외면받는지를 파악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세계의 기술 혁명을 이끄는 애플, 구글 등의 기업들은 원천 기술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관계를 돈독히 하고 새로운 기술 트렌드를 만들어 내는 벤처 기업들을 인수한다. 같은 이유로 세계의 유행을 이끄는 기업들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예술 에이전시들을 인수하는 경우가 많다.

 

프랑스 F&B와 의류 사업가 베르나르 아르노는 1999년 런던에서 가장 전통 있는 갤러리 중 하나인 필립스 갤러리를 인수했다. 이 회사는 1796년부터 2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한다. 얼마 후 스위스 취리히의 갤러리인 드 퓨리 에 룩셈부르그와 M&A를 한 후 전체 회사의 본사를 처음에는 뉴욕 업 타운으로, 이후에는 뉴욕 첼시로 옮겼다. 이를 통해 그는 런던, 취리히, 뉴욕이라는 3개 글로벌 시티의 아방가르드를 융합할 수 있는 막강한 문화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됐을 뿐 아니라 그 새로운 아방가르드를 1선에서 관찰하고 디자이너들과 관계를 맺어줄 수 있는 막강한트렌드 분석팀을 가지게 됐다.

 

베르나르 아르노의 라이벌 프랑수아 피노(PPR 유통 그룹) 1998년 크리스티 옥션의 대주주가 됐다. 베네치아에 있는 그라치 궁(palazzo grazzi)을 인수한 후우리는 어디로 가는가?(2006)’ ‘Sequence 1(2007)’ ‘포스트 팝(2007)’ 등의 전시회를 열어 본인의 개인 컬렉션을 자랑했다. 베네치아시와 함께 Punta di Dogana를 거대한 컨템퍼러리 아트 센터로 개조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일본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디자인을 맡아 파리와 도쿄라는 글로벌 A 시티의 아방가르드가 얼마나 밀접한지를 보여줬다.

 

기술 주도 R&D를 중시하는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아마도 상품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에 왔는지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임원들이 글로벌 트렌드의 생리를 모르면 상품의 디자인 경쟁력을 판단하기 힘들다. 아무리 미적으로 훌륭한 디자인도 아방가르드-키치-리바이벌 사이클에서 하향세를 보이고 있다면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문화적 경쟁력은 공짜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 트렌드를 이끄는 CEO들은 이런 문화 R&D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기업가도 아방가르드 예술에 더 큰 관심을 가지면 예측 없이 오고 가거나 돌고 도는 것 같은유행의 경제적, 사회적 의미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조승연 문화전략가 scho@gurupartners.kr

필자는 고교 시절 미국전국라틴어경시대회에서 우수상(Magna Cum Laude)을 받았으며 미국 고등학생 문예지에 시와 단편소설을 싣기도 했다.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NYU Stern School)을 졸업한 뒤 프랑스 최고 미술사 학교인 에콜 드 루브르에서 2년간 수학했다. 영국계 컨설팅회사 UnfrZenMind에서 외부 상임이사를 지냈으며 한국무역협회 등에서 주관한 국제 마케팅 리서치에 참여했다. <피리부는마케터> <이야기 인문학> <비즈니스 인문학>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 조승연 | -(현)오리진보카 대표
    -(현)문화전략가
    -UnfroZenMind 외부 상임이사
    -국제 마케팅 리서치 참여
    -<피리부는 마케터>, <이야기 인문학>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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