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금융상품은 이제 일상재가 됐다(commoditized). 가격도 금융회사가 컨트롤할 수 있는 폭이 크지 않아 더 이상 경쟁 차별화 요소로서 기능하기 어렵다.1 이를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하나은행에서는 고객 경험 차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서비스 전달과정(service delivery process)과 영업점의 차별화가 있다. 즉, 영업점을 통한 긍정적인 고객 경험의 제공이 은행의 시장 경쟁력 확보에 매우 중요한 요소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은행은 업무 공간을 고객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포장하는 데 서툴렀다. 상품 홍보물로 뒤덮인 폐쇄적인 출입구, 기능적이고 사무적인 분위기의 공간이 주는 답답함, 안락하지 않은 대기경험, 상담 프라이버시가 충분히 확보되지 않을 것 같은 공간 구조 등으로 고객들은 방문의 목적만 달성하면 재빨리 빠져나와야 할 공간으로 인식했다. 심지어 시장조사 전문가인 파코 언더힐(Paco Underhill)은 은행 앞을 지나갈 때 사람들의 보행 속도가 빨라진다는 연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2 원인은 간단했다. ‘나’와 관계없는 지루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은행 내부적으로도 영업점을 마케팅의 최접점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공간 기획은 대부분 시설 관점에서 이뤄졌다.
하나은행의 새로운 SI(Store Identity) 작업은 이러한 배경에서 시작됐다. 영업점 공간을 단순히 시설로서가 아니라 고객과의 관계 형성을 위한 공간으로 재정의했다. 관계 형성을 위한 시작도, 그리고 그 끝도 ‘고객의 시각에서 바라보기’였다. 2009년 하반기에 시작한 작업은 2012년 상반기에 완성돼 매뉴얼로 만들어졌다. 처음부터 Design Thinking이나 다른 어떤 거창한 콘셉트를 염두에 두고 시작한 작업은 아니었지만 돌이켜보면 이것이 Design Thinking에서 얘기하는 혁신과 동일선상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객의 시각에서 바라보기’ 위해 시작한 3418명의 고객 관찰 조사와 수많은 설문, FGI는 은행 혹은 은행 공간에 대한 고객의 생각과 요구, 그리고 객장 내 고객 행태 등을 파악할 수 있게 했다. 새로운 SI의 콘셉트 도출과정과 이의 디자인적 구현 사례 중 일부를 소개한다.
고객도 알지 못했던, 기대할 것 없는
은행 영업점에서 궁금한 은행 영업점으로
은행의 디자인은 고객들이 별로 기대할 것도 없을 만큼 은행 간 차별성이 없는 공간이다. 사무적인 분위기에 대한 인식은 있지만 특별히 이에 대한 호불호가 형성돼 있지도 않았다. 다만 딱딱한 분위기 때문에 가뜩이나 어려운 금융에 대한 스트레스가 가중된다는 반응이 일부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동선, 객장 사이즈, 조도, 대기 공간의 배치, 상담창구와 대기공간 간의 거리 등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기대가 명확했다. 기능적 측면에서의 기대 불일치는 고객의 큰 불만요소였다. 요약하자면, 고객들은 은행의 공간에서 기능적인 부분만 충족된다면 정형화된 모습에 대해서는 수용하는 양상을 나타냈으며 업무를 신속하게만 처리할 수 있다면 만족스럽다는 반응이었다. 기존 은행의 구조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공간에 대한 기대치가 높지 않았던 것이다.
새로운 SI 작업의 과제는 고객이 바라는 기능적 효율성, 고객 공간이자 직원 공간인 은행 공간의 이중성, 은행 고유의 보안이라는 특성을 만족시키면서도 편안하고 고객이 기대할 만한 은행 공간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사람이 중심이 되는 친근한 스토어’로서의 공간 구현을 핵심 콘셉트로 정했다. 고객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변화하는 소매업종의 공간적 특성과 고객이 은행에 바라는 기능적 특성을 결합해 콘셉트를 공간적으로 풀어가는 실마리로 삼았다. ‘고객을 환영하는 열린 공간(Welcome)’ ‘고객의 대기시간까지 배려하는 안락한 공간(Comfort Waiting)’ ‘상담에 집중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Private Consulting)’이라는 콘셉트는 이렇게 탄생했다.
이런 콘셉트를 토대로 영업점 개설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은행 맞냐”고 물어보거나 “카페 같다”고 말하는 고객들이 있었다. 과거 은행 영업점에 궁금해서 들어온 고객이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고객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첫발이 내디뎌졌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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