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친구와 적이 뒤섞인 세상... 힘의 균형 유지시켜라

59호 (2010년 6월 Issue 2)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다. 친구가 적으로 돌변할 수도 있고, 한 때 적이었던 사람이 둘도 없는 친구로 변할 수 있다. 한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임을 강조했던 메디치 가문의 후계자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는 세상사는 이치가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문의 영향력이 커지고 접촉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세상을 경륜한다는 것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체득하게 된다. 아무리 나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신의를 굳게 지켜 나간다 해도 상대방이 그 신의를 저버리고 내게 해를 끼치는 말과 행동을 일삼을 때,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한다. 그렇다. 나 자신에게만 손해를 끼친다면 그래도 참을 수 있다. 그러나 악의적인 행동으로 내가 이끌고 있는 조직이나 기업에 피해를 준다면 그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나를 지도자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위협을 느끼는 것은 막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들을 책임지고 있는 지도자이기 때문이다.
 
코시모 데 메디치는 1429년에 가업을 승계했다.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가 안목이 탁월했던 사업가였다면 메디치 기업의 제2대 회장이었던 코시모는 한 시대를 이끌었던 탁월한 지도자였다. 그는 피렌체에서 제일가는 기업가였을 뿐만 아니라 도시국가 피렌체의 정치적 운명을 책임진 정치가였으며, 이탈리아 반도의 평화를 지켜내야 했던 국제적 인물로 성장했다. 그가 가진 부의 규모와 정치적 가능성을 견제하던 피렌체 귀족 가문들의 모함을 받고 투옥과 추방이라는 시련을 겪으며, 한 기업의 리더에서 한 시대의 지도자로 거듭났다. 그는 친구의 배신이라는 쓰라린 경험도 했고, 어제의 적을 오늘의 동지로 만들어야 하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코시모는 친구와 적이 뒤섞여 있는 세상에서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이라는 독특한 외교정책을 고안해냈다. 사람 관계에서, 비즈니스 관계에서, 나라 간에 발생한 분쟁의 틈바구니에서 코시모는 힘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한 시대를 이끌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코시모를 평화를 가져다 준 ‘나라의 아버지’로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코시모에게 닥친 시련
 
1429년은 메디치 기업의 첫 번째 승계가 이루어진 역사적인 해였다. 메디치 가문의 실질적인 창업자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는 가문의 이름을 딴 은행을 피렌체에서 세 번째 가는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됨으로써 사업의 일대 전기를 마련하고 전 유럽으로 은행 지점을 확장시킨 것은 그의 아들 코시모였다. 그의 아버지가 피렌체 평민들 사이에 인기가 높았다면 코시모는 여기에 귀족 가문들로부터 호감과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피렌체 하층민들을 지지했던 메디치 가문의 전력을 문제 삼아 경계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았던 니콜로 우짜노도 결국 코시모의 지지 세력으로 바뀌었다. 메디치 가문의 급부상을 우려하던 다른 귀족 가문들이 코시모를 제거하려는 시도를 펼쳤으나 피렌체 시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던 우짜노는 코시모의 든든한 방패막이가 됐다.
 
그러나 젊은 코시모의 지지자였던 우짜노가 1433년 사망하자 상황은 급변한다. 당시 피렌체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알비찌(1370∼1442)는 코시모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아뇰료 판돌피니의 당시 기록에 의하면, 피렌체의 보수기득권층을 대변하던 알비찌는 성급하고 지나치게 냉정했을 뿐 아니라 ‘비판을 참지 못하고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는 데 신경질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다. 1
지도자가 갖춰야 할 미덕이 결여됐던 그의 일관성 없는 정책으로 피렌체 시민들의 불만은 높았지만 그는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세습 귀족 세력의 힘을 규합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피렌체 시민들은 코시모에게 점점 친근감을 느꼈다. 피렌체 시민들은 코시모의 장점을 알비찌의 단점과 자주 비교하곤 했다. 질투심에 치를 떨던 알비찌는 귀족 세력의 힘을 빌려 코시모를 제거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다. 피렌체의 국가원로였던 우짜노가 없었다면 젊은 코시모는 권력을 쥐고 있던 알비찌에게 희생당했을 확률이 높다.
 
우짜노가 사망하자 알비찌는 평소 소원대로 코시모 제거 작전에 돌입한다. 정치적 감각이 뛰어 났던 코시모는 낌새를 알아차리고 피렌체를 빠져나와 자신의 별장이 있는 무젤로에 은둔한다. 1433년 5월, 칩거에 들어가 숨죽이며 피렌체의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다. 알비찌는 자신의 측근을 시뇨리아(피렌체 행정부)의 대표인 곤팔로니에리 자리에 앉히고 코시모 제거를 주도하게 한다. 2 피렌체 시뇨리아는 시골에 은둔 중인 코시모에게 소환명령을 내린다. 결국 그해 9월7일, 코시모는 시뇨리아 정청의 종탑 감옥에 투옥된다.
 
갑작스러운 투옥이었지만 코시모는 냉정함을 유지했다. 먼저 감옥에서 주는 음식을 먹지 않고 버텼다. 독살의 가능성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마침 간수가 메디치 가문의 은덕을 입었던 사람이라 코시모는 그를 이용해 바깥세상과 소통했다. 코시모의 동생 로렌초와 사촌 아베라르도는 체포를 면했고, 평소 코시모의 재정지원을 받았던 용병대장 토렌티노는 급히 군대를 조직해 구출작전을 전개할 채비를 하고 있었다. 또한 알비찌의 후원을 받고 있던 곤팔로니에리를 1000플로린의 거금을 들여 매수해 코시모에게 유리한 판결이 나오도록 유도했다. 피렌체 시뇨리아는 코시모의 처벌수위를 놓고 극심한 분열 조짐을 보였다. 결국 친() 메디치로 입장을 바꾼 곤팔로니에리의 주도로 코시모는 5년 추방형이 내려졌다. 약 4주간 감옥에 투옥됐던 코시모는 파두아를 거쳐 베네치아로 망명을 떠나야만 했다.
 
코시모는 망명지 베네치아에서 칙사 대접을 받았다. 전통적으로 피렌체의 우방 국가였던 베네치아는 코시모가 곧 복권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코시모는 망명자인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석호(潟湖)의 도시에 예술 후원자다운 멋진 선물을 기증했다. 코시모는 총애하던 신예 건축가 미켈로초에게 산 조르조 성당의 도서관을 건축하도록 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코시모에게 매혹 당했고,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했다. 한 피렌체 시민은 이렇게 탄식했다. “코시모와 같은 탁월한 지도자를 추방하다니! 그야말로 피렌체의 기둥이며, 지혜의 샘이고, 모든 이탈리아의 깃발인 동시에, 모든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가 아니던가!” 3
 
 
 
 
그러나 코시모는 평소처럼 말이 없었다. 그는 망명지인 산 조르조 섬에서 베네치아의 정부청사 건물(두칼레 궁전)과 산 마르코 성당을 바라보면서 사색에 잠기곤 했다. 코시모는 투옥과 추방이라는 위기를 겪으면서 오히려 더 큰 인물로 성장했다. 망명 이전의 코시모가 피렌체의 인물이었다면 망명 생활 이후의 코시모는 이탈리아적인 인물로 성장한다. 이제 코시모는 한 시대를 경륜해야 하는 지도자로 거듭난다. 개인의 욕망이 서로 충돌하고 집단과 사회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전투구(泥田鬪狗)하는 혼란의 와중에 지도자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피렌체 시민들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예상했던 대로 코시모는 정확하게 1년 만에 피렌체로 귀환했다. 코시모의 투옥과 추방을 사주했던 알비찌는 피렌체를 이끌 만한 능력이 없었다.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던 알비찌는 오히려 역풍을 맞았다. 이번에는 알비찌가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됐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피렌체로 귀환한 코시모는 짐짓 보복 정치를 하지 않겠다고 천명했지만, 아랫사람들이 정적을 차례로 제거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반() 메디치 음모에 가담했던 총 20 개 가문에 속한 80여 명이 추방됐고 알비찌를 포함한 주동자 11개 가문은 피렌체에서 영구 추방됐다. 베네치아에서 귀환한 코시모가 정적을 제거하고 명실상부한 피렌체의 지도자가 된 1434년을 기점으로 메디치 가문은 본격적으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1435년 1월에는 코시모가 직접 곤팔로니에리에 취임하기도 한다. 피렌체 시민들은 코시모의 귀환을 소리 높여 환영하고 알비찌 가문에 대한 피의 보복을 외쳤다. 그러나 정작 코시모 본인은 피렌체 시민들의 열광에 동조하지 않았다. 대중들의 환호성과 야유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지도자의 덕목이 아니라고 여긴 코시모는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가 이끌어야 할 15세기의 유럽은 난세(亂世)였고, 이탈리아는 분열돼 있었으며, 피렌체는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피렌체를 이끌어가야 할 책무를 지게 된 코시모는 이탈리아의 지도를 펼쳐 놓고 장고(長考)에 들어갔다.
 
밀라노의 미래와 거래하다
 
코시모가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하기 시작한 1434년의 정치적 상황은 실타래처럼 꼬여 있었다. 복잡한 15세기 전반의 이탈리아 정치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북부지역의 맹주인 밀라노 왕국과 남부 나폴리 왕국이 서로 동맹을 맺고, 공화국 세력(피렌체·베네치아·교황령 연합)과 대치하고 있었다. 코시모가 망명지를 베네치아로 선택한 것도 피렌체와 오랜 동맹국 관계였기 때문이다.
 
당시 밀라노를 통치하던 필리포 비스콘티(1392∼1447)와 나폴리 왕국 아라곤의 왕 알폰소( 1396∼1458)는 동맹을 맺고 이탈리아 북쪽과 남쪽에서 영토 팽창을 꾀하고 있었다. 이들은 강력한 무력을 앞세워 자주 피렌체 영토에 대한 도발을 감행했다. 결국 코시모의 절친한 친구이자 피렌체의 용병 대장이었던 토렌티노가 비스콘티 군대에 굴복하고 살해당하는 비극도 벌어졌다. 위기에 처한 피렌체가 내릴 수 있는 외교적 선택은 제한적이었다. 베네치아와 맺어온 기존 동맹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밀라노와 나폴리 세력을 견제할 수밖에 없었다.
 
피렌체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코시모는 새로운 외교정책을 펼친다. 그것은 기존 동맹과 대결 구도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코시모는 도시국가로 분열된 이탈리아의 현실을 인정하고, 어떤 정치적 환경에서도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을 유지시키는 외교정책에 착수한다. 베네치아와 동맹 관계이지만 힘의 균형이 베네치아로 쏠리면 코시모는 밀라노와 연합해 힘의 균형을 유지시키는 유연한 전략을 선택했다. 밀라노에 지나치게 힘이 쏠리면 이번에는 밀라노를 무력화하기 위한 대책을 내놓았다. 당시 이탈리아의 5개 도시국가(밀라노, 베네치아, 피렌체, 교황령, 나폴리) 중에서 가장 군사력이 미약했던 피렌체로서는 외교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코시모는 힘의 균형이라는 새로운 정책으로 15세기에 펼쳐진 이탈리아의 난세로 뛰어들게 된다.
 
전통적으로 동맹관계를 맺어 오던 베네치아와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코시모의 행동은 충격적이었다. 코시모가 망명자였을 때 베네치아는 그에게 환대를 베풀었던 고마운 도시였다. 메디치 은행이 가장 빠르게 성장하던 곳도 베네치아였다. 그러나 코시모는 피렌체의 미래를 위해 기존 관계를 과감히 청산하고, 친() 밀라노 정책으로 선회한다. 코시모의 도박은 당시 밀라노를 통치하던 필리포 비스콘티와의 관계 수립을 위한 것이 아니다. 코시모는 밀라노의 미래와 거래했다. 바로 비스콘티의 사위이자 호전적인 용병 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1401∼1466)의 미래에 피렌체의 운명을 맡기는 게 낫다고 판단한 것이다.
 
스포르차는 비스콘티의 사생아였던 비앙카와 결혼해 장차 밀라노 왕국을 상속받으려는 야심 찬 용병 대장이었다. 그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일개 용병대장에서 이탈리아 중부 지방을 차지한 강력한 군주로 변신하던 중이었다. 그의 모친이 토스카나 지방 출신이었고, 그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도 토스카나(이탈리아 중북부 지방으로 피렌체가 중심도시)였기 때문에 스포르차는 피렌체에 늘 우호적이었다. 1435년 겨울 피렌체에서 코시모와 몇 차례 회동한 후부터 그는 메디치 가문의 수장을 아버지로 불렀고, “코시모의 생각이 바로 나의 생각”이라고 늘 강조했다. 4 코시모는 이탈리아의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스포르차와 비스콘티를 분열시켰다. 실제로 비스콘티의 밀라노 군대가 피렌체를 공격했을 때(1440년), 스포르차 군대가 피렌체를 도와 앙기아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장인과 사위 사이를 갈라놓았던 코시모의 전략 때문에 피렌체는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힘의 균형을 유지시켜라
 
이번에는 남쪽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나폴리 왕국의 알폰소가 교황령 군대와 손을 잡고 스포르차가 차지하고 있던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알폰소와 동맹관계를 맺고 있던 밀라노의 비스콘티가 이 연합군에 가세해 스포르차를 몰아낼 기세로 협공을 시작했다. 5 그러나 스포르차 군대는 막강한 전력을 갖고 있었다. 알폰소 연합군이 전열을 채 가다듬기도 전에 스포르차 군대가 공격을 감행해 큰 승리를 거뒀다. 이번에도 코시모가 힘의 균형을 조정하는 중재자로 나섰다. 페루지아에서 열린 휴전협정을 뒤에서 주도한 사람도 코시모였다. 원래 스포르차의 영토였던 땅은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 사항은 추기경단과 코시모, 그리고 코시모의 참모였던 네리 카포니에게 위임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또 한 번 코시모의 힘의 균형 정책이 이탈리아에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비스콘티는 자신의 사위였지만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던 스포르차가 나폴리 왕국과의 전투에 집중하자 이탈리아의 북쪽에서 세력 확장을 시도했다. 남쪽에서 벌어졌던 갈등을 힘의 균형으로 중재했던 코시모가 또 다시 나섰다. 이번에는 베네치아를 움직여 밀라노를 견제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1446년 9월, 외교상 결례 문제를 놓고 베네치아와 밀라노가 충돌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전쟁의 결과는 의외였다. 카살마조레에서 베네치아 군대가 밀라노 군대를 대파했다. 베네치아 군대의 대승은 15세기 후반 이탈리아 정치의 분수령을 이루게 된다. 밀라노와 비스콘티의 갑작스러운 몰락은 베네치아에 이탈리아 패권에 대한 의욕을 불러일으켰고, 베네치아의 급부상은 장차 밀라노의 국왕이 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던 스포르차에게 경각심을 일깨웠다. 결국 카살마조레 전투 이후 스포르차는 베네치아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베네치아로부터 일격을 당한 비스콘티도 스포르차와의 연대를 모색하게 된다. 물론 이런 모든 움직임은 코시모의 주도면밀한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이탈리아의 패권을 놓고 서로 충돌하고 있던 비스콘티, 스포르차, 베네치아, 알폰소는 모두 코시모에게 정치적인 자문을 구하게 된다. 코시모는 모든 갈등의 중재자가 됐고, 서로 죽이듯이 싸우던 사람들도 코시모가 나타나면 투쟁을 멈추고 그의 지혜를 구하게 됐다. 
 

코시모 리더십의 현대적 의미
 
코시모란 인물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피렌체의 실권을 장악했던 정치의 귀재였을까? 아니면 권모술수를 통해 이탈리아의 패권을 차지했던 마키아벨리적인 인물이었을까? 물론 코시모의 리더십을 해석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그를 현명한 지도자로 볼 수도 있고, 반대로 권력을 장악하고 유지하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던 정치 도박사와 같은 면모도 엿보인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코시모의 리더십으로부터 어떤 교훈을 얻는가에 있다. 코시모란 인물은 1429년부터 1446년까지의 행적을 통해 세 가지 교훈을 남겼다.
 
첫째, 그는 현실을 직시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는 언제나 보고 싶은 것만을 골라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정말로 보고 싶지 않는 것은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냉혹한 현실인지 모른다. 코시모는 아버지 조반니 디 비치의 가르침에 따라 유약겸하(柔弱謙下)와 여민동락(與民同樂)의 가치를 추구하던 선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가 꾸며지고, 독살 위험을 감지하면서 단식을 해야만 하는 심각한 위기를 겪으면서, 그리고 타지에서 고독한 망명자의 삶을 살면서, 개인의 도덕적 삶이 불한당과 같은 시대의 환경 속에서 독야청청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평범한 개인으로서 산다면 모를까, 지도자로 한 시대를 이끈다는 것은 갈등의 현실을 직시해야 하는 용기를 요구한다. 개인과 욕망이 충돌하고, 집단과 국가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며 투쟁할 때, 지도자는 각기 다른 개인과 집단이 추구하는 힘의 역학관계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때로 친구를 내쳐야 할 때도 있고, 어제의 적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해야 할 때도 있다. 물론 괴로운 일이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코시모는 지도자가 져야 할 십자가를 졌다. 개인의 도덕적 호불호(好不好)를 넘어선 지도자로서의 선택, 그것은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로부터 비롯된다.
 
둘째, 그는 위기의 순간에도 미래를 생각하는 지도자였다. 코시모는 위기가 닥쳤을 때 주저하지 않았고, 기회가 왔을 때는 호들갑을 떨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망에 빠졌을 망명지에서 코시모는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미래를 놓고 중요한 결정을 내린다. 이탈리아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해 힘의 균형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코시모는 친 베네치아에서 친 밀라노로 외교정책을 수정했다. 피렌체로 귀환했을 때 코시모는 복수를 부르짖으며 날뛰는 측근들을 진정시키면서 피렌체의 미래를 위한 귀족 명문가의 숫자를 줄이는 작업을 은밀히 진행시켰다. 그는 위기가 왔을 때나 기회가 찾아 왔을 때, 언제나 냉정하게 미래를 내다보는 지도자의 덕목을 보여줬다.
 
마지막으로 그가 제시한 힘의 균형 정책은 조직과 집단에 활력을 불어넣는 리더십의 모범을 보여준다. 코시모에 의해 탄생한 힘의 균형 정책은 유럽 정치사에서 지금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물론 프랑스 혁명(1789년) 이후부터 유럽 각국의 패권주의가 발호하면서 코시모의 외교이론이 빛을 바래긴 했다. 그러나 사회적 절대강자의 등장을 반가워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코시모의 힘의 균형 정책은 여전히 강력하고 유효한 리더십의 모델을 제공해 준다. 지도자는 이끌고 있는 조직이나 집단의 힘을 최대화하고 최적화할 책임을 지고 있다. 상이한 생각과 집단이 서로 경쟁해야만 그 조직은 생명력을 유지한다. 그렇다면 코시모의 리더십이 보여준 힘의 균형 정책은 조직의 생명력을 유지시키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요소이다. 건강하게 힘의 균형이 유지된 집단에서 창조적인 에너지가 분출되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연세대 김상근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283호 Future Food Business 2019년 10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