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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차고 길게…” 日 내수 산업의 장수 전략

이지평 | 41호 (2009년 9월 Issue 2)
성장 한계와 업계 구조 재편성
최근 경쟁 관계에 있는 일본 기업끼리 사업을 통합하거나 업무 제휴를 시도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우선 일본 식품 산업 1위인 기린홀딩스와 2위 산토리홀딩스가 합병을 위한 협의를 진행 중이다. 편의점 업계 2위 로손과 드럭스토어 업계 1위 마쓰모토기요시홀딩스는 사업 제휴를 체결, 공동 출자 법인을 통해 편의점과 드럭스토어가 융합된 형태의 새로운 점포를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맥주 대기업인 삿포로홀딩스는 음료 기업인 포카코퍼레이션의 지분 20%를 인수해 제휴를 맺고, 유업·제과 대기업인 메이지홀딩스와 3사 연합을 형성하기로 했다. 이들은 상품 공급과 개발, 시장 개척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협력할 예정이다.
 
일본 기업들이 사업 통합 및 제휴를 통한 업계 재편에 주력하는 이유는 최근의 경기 부진과 함께 일본의 인구가 감소기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인구 감소는 특히 각종 내수 산업의 성장에 큰 제약 조건이 될 전망이다. 일본의 총인구는 2005년 1억2778만 명을 정점으로, 2030년(1억1500만 명)에는 무려 1200만 명 이상이나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식품, 유통 등의 전통적인 내수 기업은 인구 감소와 시장 축소 압력 속에서 살아날 방법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사업 통합 통한 글로벌화
이 기업들은 덩치를 키운 후 일본 시장을 넘어 해외 시장에 적극 진출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다. 기린과 산토리는 양사 모두 수익 상황이 양호하다. 게다가 그동안 일본 주류 시장에서 극심한 경쟁을 해왔다. 이런 상황에서도 통합 협상을 시작한 것은 글로벌 기업과 비교할 때 뒤떨어지는 매출 규모를 늘려 세계 시장에 유리한 조건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다. 기린과 산토리 합병 법인의 총 매출액은 무려 3조8000억 엔에 이르러 코카콜라를 능가한다. 순식간에 세계적인 주류·음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업을 통합할 예정인 일본의 내수형 기업들은 성장하는 아시아 시장을 일본에 버금가는 ‘제2의 홈그라운드’로 개척해나갈 계획이다. 이들은 현지 대기업과의 경쟁을 염두에 두고 몸집을 불리는 등 경영 자원 보강에 주력하고 있다. 이것은 특히 한국의 내수 기업들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산토리는 중국 상하이 맥주 시장에서 40%의 점유율을 자랑한다. 이 회사는 2002년 이후 세계 최대 규모로 성장한 중국 시장에 사활을 걸고 있다. 그런데 최근 중국 1위 맥주회사인 화룬쉐화(華潤雪花)가 상하이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산토리 입장에서는 중국 현지 기업의 대두를 경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니혼게이자이 신문, 2009년 8월 23). 일본 기업들은 중국 등 아시아 각국의 현지 기업들이 장기적으로 현지는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 위협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의 육성 모색
다만 일본 내수형 기업이 기업 규모를 확대하더라도 코카콜라나 디즈니, 맥도널드 등 유명 브랜드보다는 인지도가 낮다는 지적이 있다. 특히 제조업과 달리 문화 경쟁력이 매우 중요한 서비스업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하다는 분석이다. 일본 기업들은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글로벌 브랜드 강화 전략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들은 우선 아시아 시장에서 브랜드 파워를 확립하고, 점진적으로 미국과 유럽 시장을 개척할 것으로 보인다. 신흥 시장에서 글로벌 전략을 시험하며 경험을 축적한 후 선진 시장에 도전한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식품 등 이미지가 중요한 분야에서는 현지 기업이나 선진 브랜드 인수에 나서는 일본 기업이 늘어날 가능성도 있다.
 
사실 일부 일본 기업들(전자, 자동차 등 이미 글로벌화된 기업을 제외한)은 이미 아시아를 중심으로 굳건한 브랜드 인지도를 쌓아올리고 있다. 편의점 업계의 세븐일레븐과 캐주얼 의류 제조업체인 유니클로가 대표적인 예다. 유니클로는 저렴한 가격과 빼어난 품질로 큰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 회사는 해외의 위탁 공장을 관리하면서 대량 주문과 신속한 물류 관리로 원가를 절감하는 한편, 디자인에도 지속적인 투자를 해왔다. 상품 가치와 가격의 차이에서 오는 ‘소비자 부가가치’를 극대화한다는 전략이다.
 
각종 운동화를 소매 판매하는 ABC마트는 일본식의 세밀하고 친절한 서비스로 일본 시장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해 불황기에도 계속 매장을 확장했다. 또 한국 등 아시아 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진출했다. ABC마트는 거대 매장보다는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에 매장을 여러 개 확보한 후 근처 매장끼리 재고를 공유하는 독특한 운영 체계로 유명하다.
시장 축소 추세에 맞춘 안정 경영
내수형 기업이 해외로 눈을 돌리는 전략은 인구 감소와 내수 침체를 극복할 수 있는 훌륭한 대안이다. 하지만 모든 내수 기업이 글로벌화에 성공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글로벌 진출이 어려운 수많은 일본 내수 기업들은 무리한 확장을 피하면서 안정적인 매출을 유지해 장기간 생존을 모색하는 ‘분수에 맞는 안정 경영’을 지향하고 있다. 실제로는 이런 기업이 글로벌화를 추구하는 기업보다 많으며, 이들은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국의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들에게 큰 시사점을 준다.
 
일본 나가노 현에 본사를 둔 이나식품은 우뭇가사리로 만든 젤리 형태의 식품인 한천(寒天) 하나로 일본 시장의 80%, 세계 시장의 15%를 차지한 경이적인 기업이다. 이 회사는 지난해까지 연평균 10%의 경상이익을 올려왔다.
 
하지만 이나식품은 자신의 능력을 넘는 확장을 자제해 장기간 살아남는 데 경영의 주안점을 두고 있다. 결코 고성장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경영 방침 때문에 히트 상품의 생산량을 늘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와도 거절한다. 전국 슈퍼마켓 체인의 납품 요구를 거부했으며, 급한 주문도 받지 않는다. 기업의 외형을 키우면 종업원들의 초과 근무 부담이 늘고, 품질 관리에 무리가 생기며, 과잉 설비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나식품은 무리 없이 안정적인 매출 규모를 유지하며 늙어가는 일본 경제에 적응하고자 한다. 심지어 ‘대박’이 터질 신제품의 시판을 미루기까지 한다. 대신 이 회사는 항상 먼 미래를 내다보고 연구개발(매년 이익의 10% 투자)에 주력하면서 새로운 사업의 씨앗을 끊임없이 뿌리고 있다.
 
지역이나 도시의 특정 상권에 밀착해 건재함을 과시하는 토착형 슈퍼마켓들의 사례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들은 점포망 확대나 정보기술(IT)을 이용한 일반적인 경영 상식과는 다른, 지역 소비자의 생활 패턴에 맞는 비즈니스로 호평을 받고 있다.
 
오오제키는 도쿄의 세타가야 등 조용한 주택가를 중심으로 점포를 내고 있는 슈퍼마켓 체인이다. 이 회사는 종업원의 80% 이상을 정규직으로 고용하면서 지역에 맞는 조달과 판매 노하우 고도화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재미있는 점은 원가 절감을 위해 본사가 일괄적으로 상품을 주문하지 않고, 종업원들이 각자의 전문가적 시각에서 제품을 골라 확실히 팔리는 물건만 들여놓는 시스템이다. 종업원들은 지역 고객에 대한 전문가라는 책임감을 갖고 제품을 선택한다. 때로는 예상 고객 한 명을 염두에 두고 제품을 조달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개인 점포와 달리 같은 지역 점포의 종업원끼리 일주일에 한 번 미팅을 갖고 정보를 교환하는 한편, 일괄 구입이 가능한 제품은 함께 구매하는 등 조직적인 지식도 활용하고 있다.
 
오오제키의 사례는 최근 기업형 슈퍼마켓(SSM)의 진출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국내 중소 상인들에게도 좋은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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