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아날로그 매체가 디지털화에 밀려 ‘마지막 숨결’을 몰아쉬고 있다. 비디오와 카세트테이프는 이미 ‘멸종’ 직전이며, 최근에는 CD도 MP3 같은 디지털 음원에 밀려나는 추세다. 하지만 유독 책만은 여전히 막강한 위력을 떨치며 아날로그의 ‘마지막 성역’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물론 책도 디지털 기술을 앞세운 신 매체의 도전을 받았다. 소니 등 전자 기업들은 2000년대 초반 의욕적으로 전자책 단말기(e-Book Reader)를 내놓으며 종이책을 대체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전자책은 주류 시장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종이책에 비해 가독성과 사용 편의성이 떨어질 뿐 아니라 가격도 비쌌고, 콘텐츠마저 부족했기 때문이다. 최첨단 기술을 자랑했던 전자책은 ‘구닥다리’ 종이책의 아성을 넘지 못하고 ‘캐즘(chasm)’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아마존의 킨들, 전자책 부활의 불 밝히다
종이책은 앞으로도 계속 디지털의 공격을 막아내고 지배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을 것 같다. 전자책이 다시 주류 시장에 도전하고, 전자책 콘텐츠 매출이 증가하는 등 상황이 크게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책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주인공은 세계 최대의 온라인 서점 아마존이다. 아마존은 2007년 1월 전자책 단말기 ‘킨들(Kindle)’을 선보였다. 이 제품은 전문가들의 부정적 예상을 뒤엎고 멋지게 성공해 다소 비싼 가격(350달러)에도 불구하고 2008년 한 해 동안 무려 50만 대가 팔려나갔다. 디스플레이 제작사 PVI가 패널 공급 부족 문제를 겪지 않았다면 더 많이 팔릴 수도 있었다.
관련 매출도 호조세다. 2008년 킨들용 전자책 콘텐츠 매출액은 7000만 달러에 이르렀다.(같은 기간 단말기 매출은 1억7000만 달러) 이런 성공에 고무된 아마존은 2009년 2월 업그레이드판인 ‘킨들2’를 시판했다.
시장의 호의적 반응을 감안할 때, 킨들의 성공 행보는 앞으로도 계속될 전망이다. 씨티투자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킨들의 2010년 판매액은 8억9000만 달러(350만 대)에 이를 전망이다. 전자책 판매 전망치도 무려 6억1000만 달러나 된다.
킨들의 성공은 전자책에 대한 시장의 관심을 다시 불러일으켰다. 많은 해외 기업들은 이미 발 빠른 행보로 다양한 단말기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단말기 시장에서는 경쟁 체제가 빠르게 형성되고 있다.
‘전통의 강자’ 소니는 2008년 10월 새로운 단말기 PRS-700을 발표하며 과거 실패를 설욕할 채비를 갖췄다. 후지쓰는 흑백의 한계를 넘어 컬러 구현도 가능한 단말기를 공개했고, 필립스에서 분사한 아이렉스(iRex)는 A4 문서를 실제 크기로 볼 수 있는 10.5인치 단말기를 내놓았다. 유럽의 벤처 기업 폴리머비전과 플라스틱로직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플렉서블 디스플레이(flexible display) 단말기를 개발 중이다. 삼성전자도 올해 6월경 전자책 ‘파피루스’를 내놓을 예정이다.
전자책 콘텐츠 시장도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우선 아마존의 공격적 사업 확대에 자극받은 업계 2위 반즈앤노블이 전자책 시장을 새롭게 주시하고 있다. 반즈앤노블은 온라인 전자책 기업인 픽션와이즈(Fictionwise)를 인수했으며, 전자책을 블랙베리 스마트폰 용도로 개발·공급하는 등 나름대로 차별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편 인터넷 업계의 강자 구글도 전자책 콘텐츠 시장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구글은 이미 2004년부터 디지털 도서관 프로젝트를 통해 700만 권이 넘는 콘텐츠를 확보해놓았다. 또 올해 2월 소니와 전자책 제휴 계약을 맺으며 본격적인 사업화 행보를 보이고 있다.
e-Book이 재조명 받는 이유
이처럼 전자책이 다시 각광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 이유는 단말기의 발전이다. 가장 대표적 사례인 킨들을 살펴보자. 킨들은 가독성과 사용 편의성 부족이라는 기존 전자책의 한계를 성공적으로 극복했다. 우선 e-잉크(e-ink)라는 신기술을 적용해 가독성을 크게 높였다. e-잉크는 전기 자극에 따라 검은색과 흰색 잉크 알갱이를 적절히 섞어 나타내는 신기술이다. 기존 LCD 화면은 장시간 이용하면 사용자의 눈을 쉽게 피로하게 만들었지만, e-잉크는 마치 진짜 책을 읽는 것처럼 편안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킨들은 폰트 크기를 마음대로 조절하고, 무선으로 책 콘텐츠를 받아볼 수 있는 장점도 가졌다.
사용 편의성도 뛰어나다. 킨들은 연필만큼 얇고, 책보다 가벼우며, 매뉴얼을 읽지 않고도 쓸 수 있을 정도로 사용법이 쉽고 직관적이다. 최신 시판된 킨들2는 텍스트를 읽어주는 TTS(Text-To-Speech) 기능도 갖추고 있다.
구매 경제성 역시 좋은 편이다. 킨들 단말기 가격은 350달러로 다소 비싼 편이지만, 전자책 콘텐츠 가격은 종이책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다. 20달러 정도 하는 종이책 대신 10달러짜리 전자책을 30∼40권만 사면 단말기 가격이 빠진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