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고는 쌓여 있으나 제품 공급이 불안정한 탓에 매출이 오르지 않고 있는가. 재고를 줄이기 위한 영업 및 마케팅 비용의 출혈이 심각한가. 매출이 늘어남에도 수익성이 악화되는 비정상적인 상황에 처해 있는가. 영업부서와 생산부서 간 불신의 골이 깊어만 가고, 거래처의 불만이 커져 경쟁사에 시장점유율을 빼앗기고 있는가.
한국 제조업체들은 세계 시장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둬왔다. 그러나 성장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제품 ‘밀어내기(push)식’ 사업 방식에 의존해온 기업들이 점차 그 한계를 드러내면서 성장이 침체되고 수익성은 악화되고 있다. 기업의 견고한 성장을 이끌고 수익성을 높이려면, 내부 운영이 얼마나 시장의 수요에 발맞춰(synchronize) 이뤄지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성장을 위한 손쉬운 선택: 밀어내기
성과에 대한 압박에 시달리는 조직은 전년도보다 수십 퍼센트의 성장을 이뤄야 한다는 목표를 정하고 조직원을 한 방향으로 밀어붙이는 손쉬운 방법을 택한다. 즉 단순한 ‘의지’에 기반해 목표를 정하고, 이를 각 조직에 하향식으로 할당해 목표 달성을 종용하는 고전적인 밀어내기식 사업 방식을 사용한다. 이러한 방식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성과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장에 먹혀들지 않는 포화 상태에 도달한다. 밀어내기를 어느 정도 흡수해주던 시장의 경쟁이 치열해지면 성장은 답보 상태에 머문다. 가격 할인이나 유리한 거래 조건 등 인센티브를 점점 더 많이 줘야 매출을 낼 수 있게 되면서 수익성은 나날이 악화 일로를 걷게 된다.
밀어내기식 사업은 한번 들어서면 발을 뺄 수 없는 마약과도 같다. 거래처에 사정하고 윽박질러가며 그달의 목표 물량을 밀어내면, 다음 달에는 밀어낸 유통 재고 때문에 월 중반까지 매출이 극도로 저조하다. 그러다 월말이 되면 밀어내기의 강도를 더 높여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이러다 보니 많은 기업들에는 월말에 매출이 비정상적으로 몰리는 현상이 낯설지 않다. 즉 임시방편의 상황이 매달 반복된다.
밀어내기의 폐해
밀어내기식 사업 방식은 여러 가지로 독이 되어 기업을 위태롭게 한다.
첫째, 수익성 악화다. 시장에 정상적으로 흡수되지 않고 쌓인 재고는 재고 관리 비용, 즉 창고 비용, 취급 비용, 운송 비용 등을 증가시킨다. 또 비효율적인 재고 자산에 자금을 묶어버려 기업의 재무 건전성을 악화시킨다. 재고가 장기적으로 쌓이면 시장 가치의 하락으로 인한 손실이 발생할 뿐 아니라, 장기 재고를 없애기 위해 영업 및 마케팅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재고는 자사의 창고에 쌓여 있건, 거래처의 유통 재고로 쌓여 있건 자사의 비용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즉 적정 수준을 초과한 자사의 재고를 셀인(sell-in·자사로부터 유통 채널로 판매)하려면 리베이트와 같은 영업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유통 채널에 재고가 쌓여 체증이 생기면, 셀아웃(sell-out·유통 채널로부터 소비자로 판매)을 위해 제조업체가 다시 한 번 마케팅 비용을 들여야 판매로 연결된다. 이러한 상황이 반복되면 매출이 증가해도 오히려 수익성이 악화되는 상황에 처한다.
둘째, 마케팅 기능이 약해져 중장기적인 수요 창출 기회를 뺏어간다. 마케팅 예산은 시장의 수요를 만들어내기 위해 투자의 일환으로 집행돼야 하는데, 당장의 성과를 위해 유통 채널로 재고를 떠넘기거나 재고로 막혀 있는 유통 채널을 뚫는 목적으로 사용되기 쉽다. 원래 마케팅 활동은 유통 채널에서 소비자의 니즈를 파악해 상품 기획에 반영하고, 출시 제품을 소비자에게 홍보하며, 수요를 촉진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마케팅 활동이 약화돼 또 다른 밀어내기식 사업의 원인이 된다.
마케팅 기능의 부실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래처와의 관계 약화를 살펴봐야 한다. 셀인과 셀아웃 과정에서 밀어내기로 일관하는 공급자는 거래처와의 협상력이 당연히 떨어진다. 마케팅 활동을 위해 필요한 거래처의 협조를 얻어내기가 더욱 힘들어지고, 거래처는 공급자가 제공하는 리베이트라는 편한 방식을 즐기며 제조업체와 마케팅 협업을 할 필요성을 덜 느끼게 된다. 무엇보다 돈을 얹어 밀어내기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공급처는 마케팅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것이라고 거래처가 단정해버리는 순간, 앞으로 협업의 기회를 가지기는 어려워진다.
이렇게 마케팅 기능이 유명무실해지면, 조직의 관심은 생산 물량을 급히 거래처에 떠넘기고 유통에 쌓여 있는 재고를 소비자에게 밀어내려는 비생산적인 사후 영업 활동에 집중된다. 그리하여 중장기적인 영업 및 마케팅 전략에는 에너지를 쏟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