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권력 교체기, 뛰어난 역량은 오히려 걸림돌?

159호 (2014년 8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HR,인문학

 

16세에 과거급제를 한 뒤 세종의 총애를 받으며 육진 개척은 물론 북방 안정을 비롯한 각종 민생안정책을 세우고 뛰어난 외교정책을 펼쳤던 인물인 김종서. 그러나 그는 결국 문종이 당부했던단종의 보호수양대군 견제라는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권력 교체기의실패한 재상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그는 능력이 뛰어났지만 자부심이 너무 센 나머지 독선적인 행태를 보였고 스스로 모든 일을 도맡아 하려 했다. 권한 위임에 실패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편이 될 수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놓쳤다. 정도전의 실패와 겹치는 부분이다. 권력 교체기의 조직이나 기업에서 2인자는 단호하되 독선적이어서는 안 된다. 조직의 경영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새 리더를 뒷받침해 줄 세력을 양성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1786(정조 10) 어느 가을 날. 한양 백악산을 유람하던 한 선비가 산비탈의 소나무 아래에 낯선 물건이 묻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상하게 여겨 다가가 흙을 헤쳐 보니 그것은 아주 오래돼 보이는 낡은 옥함(玉函)이었다. 함을 열어 본 선비는 깜짝 놀랐다. 거기엔김종서(金宗瑞)’라고 새겨진 위패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을 보고받은 정조는김종서가 북쪽 국경을 넓힌 공적은 지금도 칭송하지 않는가. 더욱이 그 절의는 사육신에 뒤지지 않는다며 불천위(不遷位)1 로 지정해 줄 뜻을 비친다. 영의정 김치인 등 대신들도옛날 충문공(忠文公:성삼문)의 위패도 수백 년을 숨어 있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김 정승의 위패 또한 그러하니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승의 충절은 참으로 탁월하고 더욱이 나라에도 큰 공이 있으니 불천위를 허락해 주시는 것이 지나친 은전은 아닐 것입니다라며 흔쾌히 동의했다.2

 

세조에 의해 역적으로 몰렸던 김종서가 복권된 것은 이로부터 40년 전인 영조 22(1746)이었다. 숙종에 의해 단종이 다시 왕호를 받았고저들이 어찌 천명과 민심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을 몰랐겠는가. 그래도 자신들의 왕을 섬기기를 죽어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는 아무나 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세조께서도 육신을 두고 당대에는 난신이나 후대에는 충신이었다고 말씀하셨다며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쳤던 사육신도 신원됐지만3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죽임을 당한 김종서에 대한 복권은 계속 미뤄지고 있었다. 그를 신원한다면 자칫 세조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세조가 불의(不義)를 저지른 것으로 인정하는 셈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단종으로부터 양위를 받은 문제야 어쨌든 겉으로나마 합법적인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고 사육신도 비록인 세조에게 반기를 들었지만 자신의 왕에게 충성을 바친 신하로 인정해 줄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하지만 계유정난은 세조가대군의 신분일 때 변란을 일으켜 자신의 대권플랜을 방해하는 형제와 고명대신(顧命大臣)들을 공격해 죽인 사건이기 때문에 여기서 김종서를 단종의()’으로 본다면 그를 죽인 세조는 단종의()’이 된다.

 

그러던 1746 12. 마침내 김종서의 관작이 회복됐다. 이때 영조는 세조가 예종에게 당부했던나는 고난을 줬지만 너는 태평을 주라. 나의 행적에 구애돼 변통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에 따라 김종서를 복권한다고 밝혔다. 세조의 유지를 거론함으로써 후대가 선대의 정통성을 훼손한다는 논란을 방어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인 허점은 여전했고 영조 스스로도 매우 조심스러워했다. 그럼에도 영조가 이 결정을 밀어붙인 것은김종서=충신이라는 인식이 당대에 보편화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임금에 대한 신하의충성을 고양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태종이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고 심지어 자신이 직접 죽이기까지 한 정몽주를만고의 충신으로 표상한 것처럼 유교국가에서는 피아를 가리지 않고 충신을 높게 평가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충성을 존경받아야 할 신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동시에 지금의 신하들이 그러한 정신을 본받길 바라서였다. 군주가 정치의 중심이 되는황극(皇極)’을 강조하고, 군주가 주도하는 탕평정치를 추진한 영조로서는 신하들의충성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김종서의 복권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김종서를 불천위로 지정한 정조도 마찬가지였다.

 

소년 급제한 김종서, 세종의 총애를 받다

이렇듯 300년이 지난 후에야 역적의 멍에를 벗고 충신의 명예를 안은 김종서. 1383, 고려 우왕 9년에 태어난 그는 16세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했다. 이는 조선시대를 통틀어서도 손꼽을 만큼 빠른 기록이다. 그의 자()나라의 재상이라는 뜻의국경(國卿)’이며, 호는절재(節齋)’. 흔히 김종서 하면대호(大虎)’라는 그의 별명처럼 장대한 체격을 가진 무장을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그의 체구는 작았다고 기록돼 있다. 또한 그는 문신(文臣) 출신으로 학문적으로도 남다른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경연에서 참찬관(參贊官)으로 <시경(詩經)>을 논했고4 지경연사(知經筵事)로서 주자의 <근사록(近思錄)>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보여주는 모습이 실록에 등장한다.5 집현전과 춘추관의 총책임자가 돼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편찬 작업을 주도했으며 유생들이학문이 경전과 사기(史記)에 통달하고 도덕과 문장을 본받을 만하니 신하들의 영수요, 사림의 표준이라 할 만하다며 그로 하여금 영성균관사(領成均館事)6 의 임무를 맡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7

 

김종서는 세종의 즉위와 함께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행대감찰로 강원도에 파견돼 백성들의 기근상황을 살폈으며 같은 해 9월에는 충청도로 가서 수령들의 백성 구호사업 실태를 점검했다. 이어 황해도 등 각 지방의 경차관(敬差官) 업무를 차례로 수행한 것으로 보아 그의 업무능력이 세종의 합격점을 받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그는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이조정랑 등의 요직을 두루 거쳤고 좌대언이8 돼 세종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좌대언 시절 김종서는 세종의 남다른 총애를 받았는데 국정의 핵심 사안이나 극비안건들에 대한 조사와 조율을 도맡았고 정승들에게 자문을 구할 때도 항상 김종서를 보냈다. 임금을 대신해 행사에 참석하고 사신들에 대한 접대도 담당했다. 실록에 보면 세종이 김종서의 의견을 묻고 직접 설명해주며 부족한 점을 깨우쳐 주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가령 세종 14 69일에는 세종이 최윤덕의 인품을 논하며 인재를 어떻게 봐야 하는지, 정승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해 김종서에게 가르쳐주는 대목이 나온다. 흡사 부자나 사제 간 같은 면모를 보인 것이다. 세종이 김종서를 미래의 재상감으로 생각하고 직접 교육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던 세종 15 129. 세종은 김종서를 관찰사로 삼아 함길도에 파견했다. 이어 함길도의 군권을 총괄하는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직을 옮겨서 국경방어를 담당하게 한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문신이 군의 통수권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임금의 비서업무를 담당하던 대표적인 측근을 갑작스레 척박한 변방으로 보낸 것은 의아한 일이었다.9 결과론적으로 보면 김종서를 국경을 어지럽히는 야인(野人)을 단속하고, 북방개척을 통한 영토 확장의 숙원사업을 이뤄낼 최적임자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후 김종서는 세종 22 123일 형조판서로 제수돼 한양으로 돌아올 때까지 무려 7년 동안이나 변방의 삭풍을 맞서며 북방을 개척하고 조선의 영토를 지켜냈다. 함길도 도절제사로 재임할 당시 올린건치육진소(建置六鎭疏, 육진을 설치하라는 상소)’는 당대의 명문으로 평가받는데 훗날 유성룡은 여기에 대해유치한 지혜와 얕은 꾀를 가지고 입만 살아 국가의 일을 망친 자들은 이 상소를 보면 기가 죽어 함부로 입을 놀리지 못할 것이라고 극찬하기도 했다.10

 

김종서가 중앙 조정으로 복귀한 이후에도 세종은앞으로 함길도의 사변과 방어하는 등의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형조판서 김종서와 같이 의논하라11 며 그로 하여금 안보 문제에 계속 관여하도록 했고 세종 23 11월에는 그를 예조판서로 임명해 외교를 총괄하게 했다. 이어 세종 31년에는 우찬성 겸 판병조사(判兵曹事)12 로 삼았으며함길도 변경의 일과 왜인, 야인을 접대하는 일은 우찬성 김종서와 더불어 의논해 시행하라고 지시한다.13 이 분야의 최고책임자이자 전문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몽고의 달달 야선이 요동에 침입해14 국경에 위협이 닥치자 그는 노구를 마다하지 않고 다시 평안도 도절제사로 부임했다.

 

김종서는 문종이 즉위하면서 좌찬성에 올랐고 문종 1 10월에는 우의정에 임명됐다. 재상이 된 그는 북방의 상황을 점검하고 해안 경계태세를 확립하는 등 국방에 최우선의 힘을 기울인다. 당시는 명나라 황제가 몽고의 포로로 붙잡히는 등 국제 정세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권력 교체기를 맞은 조선의 내부 또한 안보 기강을 확립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문종이 승하한다. 2년 만에 또다시 국상을 맞은 조선의 정국은 혼돈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세자가 왕위를 계승했지만 그의 나이는 불과 열두 살이었고 야심만만한 수양대군이 호시탐탐 보위를 노리고 있었다.

 

원래 임금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 그가 성인이 될 때까지 왕실의 어른인 대왕대비나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돼 있다. 왕이 국정을 배우고 안정적으로 권력을 계승할 수 있도록 할머니나 어머니가 후견인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단종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세종의 후궁인 혜빈 양씨가 생존해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녀는 후궁이었고 정사에 관여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래서 문종은 죽기 전에 김종서, 황보인 등 정승들을 불러 어린 아들의 앞날을 부탁한 것이다.

 

고명대신(顧命大臣)15 이 된 김종서는 비록 일흔의 늙은 나이였지만 자신을 알아줬던 주군 세종의 손자이자 자신에게 유명(遺命)을 내린 문종의 아들인 단종을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국정을 안정시키고 신하들의 기강을 다잡았으며 안평대군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써 왕위를 위협하는 수양대군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런데 김종서는 재상으로서 연이은 실수를 범한다. 세종과 같은 훌륭한 임금이 다스리는 태평성대의 재상과 살얼음판 같은 권력 공백기의 재상에게서 요구되는 자질이 엄연히 다르다. 김종서는 문종, 단종으로 이어지는 힘의 공백기와 치열한 권력투쟁 상황에서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했다. 그래서 세종 대에는 명신으로서 이름을 날렸지만 단종 대에는 실패한 재상으로 남게 된다.

 

실패한 재상이 된 이유

그는 자긍심이 매우 강했다. 한번은 신숙주의 능력을 칭찬하며나는 본래부터 내 재주를 자부하고 있지만 자네도 드물게 보는 큰 재주일세라고 말했다고 한다. 자기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자처하고 있는 것이다. 예조판서 시절말씨가 광패하다고 탄핵을 받은 것도 그래서였다.16 이런 김종서의 성격을 우려한 황희는 생전에 그를 엄하게 단속하며내가 종서를 아껴서 제대로 된 인물을 만들고자 한다. 종서는 성격이 강직하고 기세가 날카로워 일을 처리하는 데는 과감하나 훗날 재상의 자리에 올랐을 때 스스로 신중하지 않는다면 일을 그르칠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그 기세를 꺾어서 스스로를 경계하며 뜻을 가다듬고 조심히 하고자 함이다. 일에 임했을 때 신중하자는 것이 나의 뜻이다라고도 했다.17 하지만 김종서의 성격은 달라지지 않았던 것 같다. 함길도에서, 그리고 조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믿고 독선적이고 오만한 모습을 보였고 이는 많은 사람들을 적으로 돌렸다. “영의정 황보인이영의정은 손님이라며 국가의 중요한 일을 김종서에게 미뤘기 때문에 김종서 홀로 의정부에 출근할 때가 많았다라는18 실록 기사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김종서의 뛰어난 능력을 보고 황보인이 양보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김종서의 독선에 화가 나서 태업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흔히 재능이 매우 뛰어난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믿지 못하고 모든 일을 자신이 처리해야 마음을 놓는다. 이런 사람들이 중요한 사명을 받아 높은 위치에 올라갔을 때 그 정도는 더욱 심해진다. 자신이 아니면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여기고 모든 업무를 직접 다 관장하려 든다. 물론 한 사람에게 업무가 집중되기 때문에 효율성은 높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스템을 붕괴시켜버리는 만기총람의 폐해는 머지않아 분명히 찾아온다. 더욱이 모든 권한과 업무가 그 사람에게 집중돼 있기 때문에 만약 그 한 사람이 쓰러진다면 조직 자체도 일거에 무너지거나 혼란에 빠지게 된다. 대표적인 예가 태조 때의 정도전, 그리고 바로 김종서다. 태종이 정도전 한 사람을 제거하자 세자 방석과 정도전의 세력이 일거에 흩어졌고 세조가 김종서 한 사람을 제거한 것만으로 계유정난은 성공을 예약할 수 있었다. 이는 정도전과 김종서 두 사람의 역할이 워낙 중요했기 때문이지만 동시에 이 두 사람이 권한을 위임하지 않고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만약 김종서가 자신을 도와 단종을 지켜줄 수 있는 세력의 힘을 강화시키는 데 힘썼더라면 김종서 한 사람을 죽였다고 해서 수양대군의 정변이 곧바로 성공하지는 못했을 것이다.수양대군이설사 계획이 누설되더라도 저 편에 모의하는 자는 아홉 사람도 못 된다. 그중 김종서가 가장 교활하니 먼저 이 사람만 죽이면 나머지 적은 없애기 쉽다라고 자신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음으로 종친을 적으로 돌린 점도 잘못이었다. 수양대군의 정변에는 양녕대군을 비롯해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제외한) 다른 대군들의 지지 혹은 묵인이 있었다. 세종의 형제들과 문종의 형제들이 단종의 보위를 위협할지도 모를 이 사건을 찬성한 것이다. 가문이라는 차원에서 보자면 왕위 또한 집안의 대를 잇는 자리다. 문중이 합의하고 집안 어른들이 동의하면 봉사손19 의 지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얼마든지 가능해진다. 물론 왕위야 천명(天命)을 받드는 공적인 영역이기 때문에 대의명분과 함께 구성원들의 동의가 따라야 하지만 종실의 지지도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토대다. 그런데 당시 김종서를 위시한 집권그룹은 종친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어린 임금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종친의 활동을 제약하고자 했다. 물론 틀린 방향은 아니지만 세종에 의해 이미 정국운영에 활발히 참여한 경험이 있던 대군들로서는 재상들의 독주가 불만이었을 것이다. 재상권이 강화되는 모습도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사극에서 자주 나오는 대사처럼 ‘이 나라는 이 씨의 나라지, 김 씨의 나라가 아니다는 식의 불만이 터져나왔으리라 생각된다. 더욱이 김종서는 수양대군을 견제한다는 이유로 안평대군 한 사람에게만 힘을 실어줬다. 다른 종친들로서는 이 또한 못마땅했을 것이다. 김종서가 종친들을 단종을 지켜주도록 적극적으로 포섭하고 적절히 다독이면서 힘을 분산해 서로가 서로를 제어하는 구도를 만들었다면 아마도 역사의 결과는 달랐을지도 모른다. 특히 종실의 큰 어른인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을 반대편으로 서게 만든 것은 뼈아픈 실수였다. (같은 편이 못되더라도 최소한 수양대군의 편을 들지 못하도록 만들어놨어야 했다.) 왕위 계승에 절차적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대비가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이 두 대군이 훗날 세조의 찬탈을 합리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류는 조선 건국 초기 정도전이 범한 실책이기도 하다. 그는 세자 방석의 안정적인 권력 승계를 위해 종친들을 과격하게 코너로 몰았다. 그 과정에서 정안군 등 세자 방석의 이복형제들뿐만 아니라 태조 이성계의 동생인 의안군 이화, 조카 완산군 이천우, 의제인 이지란 등 종실의 주요 인사들까지 적으로 돌렸다. 중전이 부재한 상황에서 세자의 보호막이 돼줄 수 있었던 후견인들을 활용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김종서의 가장 큰 실수는 뭐니 뭐니 해도 수양대군을 제대로 견제하지 못했다는 점일 것이다. 얼마 전 종영한 사극정도전에 보면 왕자의 난을 일으킨 정안군을 보고 정도전이너를 죽였어야 했다. 죽일 수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았다고 탄식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렇다면 정도전은 정안군을 죽였어야 했고, 김종서도 수양대군을 죽였어야 했을까. 그렇게 했으면 정변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말은 쉽지만 신하로서 그렇게 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재상의 이상적인 모델로 숭상되는 주공(周公)이 왕위를 찬탈하고자 했던 왕의 숙부 관숙과 채숙을 죽인 사례가 있지만 그것은 주공 또한 왕의 숙부였고 이들의 형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대의멸친(大義滅親)의 명분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유학을 숭상하는 신하로서 임금의 아들, 임금의 형제를 죽이는 것은 그 자체로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더욱이 역모를 일으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제거하는 것은 설령 그것이 왕을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 할지라도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무력화시키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했으리라고 본다. 그런데 김종서는 그러지 못한 것이다. 단종 즉위 초기 대군과 재상들의 세력화를 방지하기 위해 분경(奔競)20 을 금지한 적이 있었는데 수양대군이 자신들을 의심하는 행위라며 강력하게 반발하자 김종서는 대군에 대한 분경 금지를 철회했다. 합법적인 세력화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또한 수양대군이 명나라의 사신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하고21 수양대군의 인사 개입을 통제하지도 못했다. 수양대군이 사적으로 관리를 매질하는 참람한 행동을 보였을 때도 유야무야 넘어갔다. 수양대군의 측근을 제압하고 무력을 해체하는 등 선제적으로 대처하기는커녕 합법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기회조차도 놓쳐버린 것이다.

 

그래서 결국 1453(단종 1) 1010. 김종서는 수양대군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이날 밤 김종서의 집에 도착한 수양대군은 방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사양하고 읽어보실 편지가 있다며 김종서를 어두운 뜰 아래로 이끌었다. 김종서가 달빛에 비춰 편지를 읽으려는 찰나 수양대군의 가노 임어을운의 철퇴가 머리 위를 내리쳤고 그는 피를 흘리며 땅으로 쓰러졌다.22

 

이제 수양대군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었다. 김종서가 영의정 황보인 등과 함께 안평대군을 옹립하려고 역모를 꾀했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살생부를 가지고 궐 안에서 반대파 대신들을 살해했다. 유배를 보낸 대신들과 그 (남자) 가족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형에 처했다. 그들의 집과 재산은 정난공신들에게 분배됐으며 아내와 딸은 원수나 다름없는 이들의 노비가 됐다. 그리고 1455년 윤611. 수양대군은 마침내 단종으로부터 선위를 받는다. 형식적으로는 절차를 지킨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강압적으로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찬탈이나 다름없었다. 이로써 조선은 세종-문종-단종으로 이어지는 적통질서가 붕괴되고 세조의 자손들이 왕위를 계승해 가게 된다.

 

현대 경영자와 리더들에게 주는 교훈

권력 교체기에 2인자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리더의 교체는 대부분 예상치 못했던 순간에 찾아온다. 리더가 갑자기 죽거나 병에 걸릴 수도 있고 어떤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날 수도 있다. 이때 리더의 빈자리가 곧바로 채워지지 않으면 조직은 위기를 맞는다. 리더의 부재는 결정과 책임의 공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2인자는 후계자가 전임 리더의 권력을 원활하게 계승하고 업무와 조직을 장악해 안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보좌할 의무가 있다.

 

그런데 후계자가 존재하더라도 리더의 자리를 노리는 또 다른 강력한 세력이 존재한다면 2인자의 책임은 더욱 막중해진다. 치열해질 권력투쟁 속에서 아직은 유약한 새 리더를 지켜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호해야 하지만 결코 독선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기 상황에서 조직을 이끌어갈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에 권한과 업무를 독점하다 보면 새 리더를 지지하고자 했던 다른 임원들의 반감을 사서 협조를 이끌어내지 못한다. 심지어 ‘2인자가 허수아비를 내세워 전횡을 휘두른다든가, ‘리더의 자리를 노린다는 오해까지 살 수 있다. 특히 혼자서 모든 핵심 업무를 손에 쥐고 있어서는 안 된다. 반대파의 공격이건, 사고에 의한 것이건 간에 혹시라도 유고 사태가 발생할 경우 조직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2인자는 조직의 경영을 안정시킴과 동시에 새 리더를 뒷받침해 줄 세력을 양성하는 데 집중할 필요가 있다. 대주주들의 지원을 받는 것도 중요하다. 조직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실력자나 주주들에게 적절한 권한을 위임하며 협력을 이끌어내야 한다. 이들이 서로를 견제하며 반대자로부터 리더를 지켜주는 강한 보호막이 돼줄 것이다. 이러한 노력들을 전제하면서 2인자는 반대 세력을 차근차근 무력화시켜야 한다. 자칫 성급하게 제거를 시도할 경우 유혈 충돌이 일어나 조직 전체가 치명상을 입게 된다. 방치하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리더의 자리를 빼앗길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나아가 조직까지 위태롭게 만들고 만다. 김종서의 교훈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김준태 성균관대 동양철학문화연구소 연구원 akademia@skku.edu

필자는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외교학과 한국 철학을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를 거치며 10여 년간 한국의 정치사상과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트위터에서 세종(@SejongDaeWang)과 정조(@King_Jeongjo)의 가상 계정을 운영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저서로 트위터에 게재한 내용과 주간지에 연재한 역사 칼럼세종과 정조의 대화를 보완해 엮은 <왕의 경영>, 올바른 리더십의 길에 대해 다룬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51호 Diversity in Talent Management 2022년 08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