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으로 다시 읽는 역사: 중국 왕조 교체 시점의 국가 대전략 실패 (1) 14세기 원명 교체기

고구려 영토 회복의 기회를 잃다

326호 (2021년 08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14세기 원명 교체기에 벌어진 위화도회군은 고구려 영토 회복의 기회를 놓친 사건이었다. 이성계가 내세운 4불가론은 쿠데타에 대한 자기변명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려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야심을 경고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에게 지나치게 큰 권한을 위임하는 결정적 실책을 범했다. 권한을 위양할 때는 그 권한이 잘못 행사될 경우 조직 전체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지 신중히 따져야 한다.



편집자주
본 연재의 콘텐츠는 필자의 저서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2021)』를 기반으로 했습니다.

국가대전략(Grand Strategy)은 국가 생존을 위해 안보 분야에서 중요한 정책을 선택함을 의미한다. 국가대전략은 실패할 경우 국가 소멸, 영토 축소와 같은 비싼 대가를 치르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국가대전략의 대표적인 실패 사례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일으킨 태평양전쟁이다. 일본은 전쟁 패배로 식민지인 조선, 대만, 만주와 쿠릴열도의 4개 섬 등 본토의 일부도 잃었다. 고구려가 백제의 위기를 방관해 멸망 위기를 자초한 것도 국가대전략 실패 사례다.1

조선에도 중국 왕조 교체기에 중원이 혼란한 틈을 타서 고구려의 영토를 회복할 기회가 있었다. 이런 기회는 사리사욕을 앞세운 집단의 빗나간 선택 때문에 번번이 좌절됐다. 서양에도 정실주의(Cronyism)가 존재하지만 우리나라의 제 식구 감싸기는 도가 지나쳐 공정, 정의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고 진실마저도 진영 논리에 따라 부정된다. 이러한 혼돈의 근본 원인은 과거 실패한 역사의 원인과 책임 소재를 제대로 따진 적이 없는 데서 비롯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정 집단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국가와 민족에 해를 입힌 과오를 범해도 영웅 취급을 받는다면 공동의 가치를 위해 헌신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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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원명 교체기, 고려가 요동을 차지했다면?

14세기와 17세기 중국 왕조 교체기의 고려와 조선의 잘못된 의사결정이 가져온 실패의 역사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는 비슷한 과오가 반복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원명 교체기와 명청 교체기는 중국 왕조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데 실패해 민족웅비의 날개를 스스로 꺾는 손해를 봤다는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원명 교체기에는 해볼 만한 싸움인데도 스스로 굽히고 명나라의 신하를 자청해 고구려 영토 회복의 기회를 날렸다. 하지만 명청 교체기에는 막강한 상대에게 무모하게 대들어 무참하게 깨지면서 기회를 잃었다.

1388년 우왕과 최영이 주도한 요동 정벌은 공민왕 시절인 1370년 이미 점령한 바 있던 요동성에 다시 진출해 요동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요동이 고구려, 더 나아가 고조선의 옛 강역으로서 동이의 땅임을 천하에 알리고 인정받기 위한 군사 작전이었다. 요동원정군 사령관에 도원수 최영이 임명됐으나 우왕이 최영의 출전을 만류해 제1 부원수였던 이성계가 병권을 장악하게 됐다. 이성계와 정도전은 요동원정군 병권의 장악을 권력 탈취를 위한 다시없는 기회로 봤다. 그래서 민족의 숙원을 배신하고 쿠데타를 일으켜 우왕과 최영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쿠데타로 집권하기는 했지만 명분이 부족해 고려 권신들의 반발에 직면한 이성계는 명나라를 든든한 뒷배로 삼았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명나라에 다가가 번신을 자청하며 나라 이름까지 지어달라는 굴욕적인 저자세를 취함으로써 요동 진출을 좌절시켰다.

이와 달리 17세기 명청 교체기에는 싸움이 되지 않는 상대인 청나라에 오히려 크게 대립함으로써 큰 피해를 봤다. 우리나라 사람들이라면 역사 교육의 영향으로 청군에 대해 대체로 무식하고 야만적인 오랑캐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데 사실 이들은 당시 세계 최강의 철갑기병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포병부대 역시 세계 최고 수준의 화력을 지녔다. 또 명나라에서 귀순한 정규 수군을 운용하는 일류 군대로 세계 어디에 내놔도 부족함이 없는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유했다. 만일 조선 조정이 이런 현실을 직시하고 청군과 연합해 명군을 공격했더라면 고구려 영토 회복의 기회를 엿볼 수 있었을지 모른다. 당시 북경을 점령한 만주족은 모두 만주를 떠나 중원 각지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정으로 집권한 인조와 추종 세력들은 반정의 명분인 친명배금을 부정하고 청나라와 타협하는 것은 정치 생명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이유로 타협을 거부하고 청군의 침입을 자초했다.

이처럼 14세기나 17세기나 결정적인 시기에 그릇된 의사결정을 한 배경은 동일하다. 안보 문제를 국내 정치에 입각해 풀고 민족보다는 특정 집단의 이익을 앞세웠다는 점이다.2 이번 글에서는 먼저 14세기 원명 교체기에 고려와 조선이 선택한 국가대전략을 검토하고 그 공과를 따져보고자 한다.

위화도회군의 4불가론

이성계와 정도전은 요동 정벌군의 지휘권을 갖게 되자 이를 정권 탈취의 다시없는 기회로 판단해 요동 정벌을 중단하고 개경을 점령했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의 명분으로 ‘4불가론’을 내세웠다. 이로써 고려왕조를 대신한 조선왕조에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했다. 다음에서 ‘4불가론’이 왜 이성계의 자기변명에 불과한지 그 내용을 하나씩 뜯어보자.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칠 수 없다.

첫 번째 주장은 요동 정벌의 성격을 왜곡하는 문제가 있다. 요동 정벌은 원명 교체기의 혼란을 맞아 우리의 옛 땅을 찾고 주변 민족과 중국에 인정을 받겠다는 목적이 우선이었지, 명나라와 전면전을 하자고 대립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까지 역사적 상황을 살펴보면 고려가 요동에 대한 권리를 주장할 명분은 충분했다. 1370년 공민왕 때 요동성을 거의 무혈 입성해 점령했던 역사가 있다. 또 원나라 지배 시기에도 요동을 다스리는 심양왕에 반드시 고려 왕족을 임명했고, 1345년부터 1351년까지 6년간은 고려왕이 겸직했다. 당시 요동 지역에서는 요동을 고려가 차지하는 것에 대해 저항감이 적었다. 공민왕의 요동성 점령 시에는 수많은 요동 거주민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며 내응하기도 했다.

명 태조 주원장은 1388년 북경을 점령하기는 했으나 원나라가 몽골 초원 지역에 여전히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앙아시아에 킵차크칸국, 차가타이칸국과 같은 몽골 계통 왕국들이 건재하고 있었다. 새 제국의 기틀을 다지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명의 주원장 입장에서는 요동을 향한 고려의 군사 행동을 저지할 실익도, 명분도, 여력도 부족한 상태였다. 주원장은 북경을 점령하기 전 1387년 강계에 철령위를 설치하겠다고 통고했는데 강계에 온 명나라 군대는 1000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만큼 주원장에게 군사 운용의 여유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원장 입장에서는 원나라가 고려와 합세해 명나라를 공격하는 것이 가장 신경 쓰이는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그 때문에 주원장으로서는 고려가 요동을 점령한 후 요동이 우리 옛 땅이라 되찾은 것이라고 정중하게 설명하고 명과 조공 관계를 맺는다 해도 일단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정도전이 조선 건국 후 명나라가 조선을 심하게 몰아붙이자 요동 정벌을 주장했던 것도 첫 번째 주장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2. 농번기에 거병하는 것은 백성에게 불편하다.

두 번째 주장은 고려판 정치 포퓰리즘이라고 볼 수 있다. 전쟁을 개시하는 데 농번기는 결정적인 고려 요소가 아니다. 적군의 움직임과 준비 상황, 아군의 비교 우위 등을 고려해 개전 시점의 합당한 타이밍을 정하는 게 맞다. 그런데 농번기 운운하는 것은 베테랑 무장으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다. 새로운 지도자로서 백성을 사랑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한 정치 구호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3. 요동 정벌 기간 중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기 어렵다.

세 번째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현실과 맞지 않다. 왜구가 대규모 병력을 상시 대기시키는 것도 아니다. 또 침략을 하려면 바다를 건너와야 하는데 요동 정벌로 인한 빈틈을 보고 공격하기엔 군사 모집, 군수물자 확보, 수송선 마련에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사이에 요동 정벌이 종료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왕은 요동 정벌군을 편성할 때 경기도 병력을 제외함으로써 만일의 가능성에 대비하는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다른 한편 왜구는 1380년 최무선의 화포가 맹활약한 진포해전에서 궤멸적 타격을 입고 난 뒤 고려 수군을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세 번째 주장은 백성들이 이런 전후 사정을 잘 모른다는 점을 악용한 정치 선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4. 장마가 와서 활의 아교가 풀어져 활을 쏠 수 없다.

마지막 네 번째 주장도 논거가 약하다. 국운을 건 전쟁을 두고 날씨 탓을 한다는 게 왠지 어색하다. 활이 젖지 않게 관리하거나 젖은 활을 말리는 방법이 없었을까. 또 우리가 활을 쏘지 못하면 적군도 쏘지 못한다. 전투력은 상대적인 것이므로 악천후가 이유가 될 수 없다. 게다가 이성계는 행군 속도를 느리게 가져가며 장마철을 오히려 기다린 정황이 있기에 설득력이 더욱 떨어진다. 평양을 출발한 원정군은 평양에서 신의주까지 200㎞를 20일을 걸려 하루 평균 10㎞의 속도로 행군했다. 우왕이 수차례 파발을 보내 장마가 오기 전에 압록강을 건너라고 재촉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신의주에 도착한 후에도 비가 오길 기다렸다가 압록강이 불어난 후에야 빈약한 도하 장비로 강을 건너다 병사들이 빠져 죽고 군심이 동요하자 군사들을 선동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하지만 위화도회군 후 진군 속도는 4배로 빨라졌다. 신의주에서 개경까지 400㎞를 단 10일 만에 주파(하루 평균 40㎞)하는 기염을 토했다.3

또 활 이야기에는 이성계의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관점이 반영돼 있다. 잘 알다시피 이성계는 날아가는 새를 떨어뜨릴 정도의 명궁이었다. 여기에는 ‘명궁인 내가 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면 전투에 진다’는 논리적 비약도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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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지 팩터(Hinge Factor):
우왕이 최영을 요동에 보냈더라면

우연적인 요소가 역사의 흐름과 전쟁의 승패를 결정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군사학에서는 이를 힌지 팩터(Hinge factor)라고 한다. 예컨대 나폴레옹 황제가 이끄는 프랑스군과 웰링턴 공작이 이끄는 유럽연합군이 격돌한 1815년 워털루전투에 비가 오지 않아 아침 일찍 전투가 시작됐더라면 프로이센군이 영국군과 합류하기 전에 나폴레옹이 영국군을 궤멸시켜 승리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유럽의 역사가 달라졌을 것이다. 워털루전투의 힌지 팩터는 개전 시기를 늦춰 나폴레옹의 승리를 앗아간 ‘비’이다.

위화도회군에도 힌지 팩터가 있었다. 우왕은 요동 정벌군 사령관에 장인인 최영을 임명한 후 마음이 바뀌었다. 갑자기 불안감을 호소하며 최영에게 개경에 남을 것을 종용하게 됐고 최영이 마지못해 개경에 남자 제1 부원수인 이성계에게 병권이 넘어갔다. 우왕과 최영은 군대와 멀어진 장군은 무력한 존재임을 뒤늦게 깨달았다. 명령을 어기고 개경으로 들어온 반란군은 장군, 사병 할 것 없이 모두 역적으로 몰려 죽게 될까 두려워 존경하던 최영까지 제거 대상으로 삼았다.

요동 정벌군 사령관 교체라는 의사결정을 힌지 팩터라고 보기는 어려우나 갑자기 우왕이 이유 없는 불안감을 호소한 것은 우연적 요소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어 보인다. 우왕과 최영은 안이했고 이성계의 야심을 경고했던 측근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만일 이때 우왕이 이유 없는 불안감을 호소하지 않았다면 최영이 출정해 요동을 접수했을 것이고 우리 민족의 강역과 역사가 달라졌을지 모른다.

개혁인가, 쿠데타인가

위화도회군은 역사의식을 망각한 권력 추구 집단이 주도한 명분 없는 군사 쿠데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위화도회군이 사전에 기획된 쿠데타라는 점은 이성계 가문 사병 집단이 이상한 행보를 보였다는 사실이 방증한다. 이성계가 전쟁터에 나갈 때 함께 따라다니며 큰 활약을 하던 약 2000명의 사병 집단은 요동 정벌에 참여하는 대신 개경으로 침투해 이성계 등 원정군 장수들의 가족을 관리했다. 이성계의 회유에 원정군 장수들이 가족의 안위까지 고려해 회군에 가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 것이다. 특정 집단이 민족의 염원이 담긴 국가의 명령을 거부하고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움직인 것이다. 이로써 고구려 영토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갔다. 오늘날 중국이 자랑하는 석유, 철광석, 희토류 등 중요 자원은 모두 요동 지역에 집중돼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14세기 이성계와 정도전이 주도한 고려의 정변은 많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해동육룡이 나라샤’로 시작되는 용비어천가가 과연 얼마나 감동적인지는 역사 교실에서 제대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역사 수업은 조선 건국이 부패하고 부도덕한 고려왕조를 갈아 치우고 신진사대부가 유교 이념을 받아들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대주의 조공 외교를 국시로 해 중국에 예속된 제후국을 스스로 선택한 왕조인 조선은 고구려를 계승해 고구려 고토 회복을 추구한 고려에 비해 자주성이 현저히 떨어졌다. 민간에 널리 퍼져 있었을 뿐 아니라 왕실은 물론 이성계 본인도 믿던 불교를 억압한 것은 새로운 출발을 강조하기 위해 어색하기 그지없는 억지를 부린 것으로 보인다. 중국보다 훨씬 더 교조적인 유교 질서를 강조하고 사농공상이라는 엄격한 신분 질서를 내세운 것은 사회계층의 상향이동성(social upward mobility)을 억제해 사회의 역동성을 낮추고 인재의 풀을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사농공상 신분 질서는 공업과 상업에 종사하는 인력을 천시함에 따라 기술의 개발, 축적, 상용화를 어렵게 만들었다. 또 해금 정책은 농토가 부족한 반도 국가가 무역 활동을 통해 식량을 확보하는 길을 원천 봉쇄했다. 조선의 새로운 질서가 고려에 비해 어떤 부가가치를 창출했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할 방도를 찾기 어렵다.4

어떤 교훈을 얻을 것인가?

명청 교체기에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은 이성계 일파의 책임이 크지만 우왕과 최영의 책임 또한 적다고 할 수 없다. 민족의 운명을 건 대사를 앞에 놓고 우왕과 최영이 내린 결정은 너무나 감성에 치우쳤고, 이들은 지나치게 사람을 믿었다. 자신의 마음이 불안하다고 출정을 앞둔 장수, 그리고 고려에서 가장 존경받는 장수이자 스스로도 가장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장수를 붙잡은 우왕의 처신은 이해하기 어렵다. 또 우왕을 달래지 못하고 고려의 거의 전체 병력을 움직이는 병권을 이성계에게 넘긴 최영도 이해하기 어렵다.

조직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을 할 때는 철저하게 냉정한 이성과 정교한 논리에 의존해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아랫사람에게 지나치게 의존하지 말고 객관적인 위험 평가에 입각해 가급적 직접 챙겨야 한다. 특히 권한을 위양할 때는 위양된 권한이 지나치게 큰 나머지 이 권한이 잘못 행사될 경우 조직 전체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지를 신중하게 따져야 한다. 우왕과 최영은 이성계의 야심을 경고하는 목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에게 지나치게 큰 권한을 위임하는 결정적 실책을 범했다. 이성계를 경계할 방도가 없는 것도 아닌데 너무 단순하게 일을 처리한 것이다. 예를 들어 문관인 정몽주를 최영을 대신할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이성계를 1군 사령관, 조민수를 2군 사령관으로 대등한 지위를 갖도록 편제해 서로 견제하도록 했다면 위화도회군은 없었을 것이다. 우왕과 최영은 권한 위양과 관련된 위험을 관리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다음 연재 글에서는 14세기와 양상은 다르지만 본질은 같았던 17세기 명청 교체기의 공과를 따져보도록 하겠다.


최중경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 choijk1956@hanmail.net
필자는 지식경제부 장관, 대통령 경제수석, 필리핀 대사 등 고위 관료와 외교관으로 33년간 근무했으며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Heritage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단체인 한미협회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 가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47호 New Look at Gen X 2022년 06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