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정부 주도로 형성된 ‘선단식 경영’ 체계는 그룹사가 비관련형 다각화와 수직적 계열화에 집중하며 빠른 성장을 거두도록 도왔다. 그러나 글로벌 경제가 휘청이고 경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선단식 경영이 주효한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패러다임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해야 하는 상황에는 자원의 분산과 모기업 의존성 등으로 인한 단점이 더 커질 수 있다. 비핵심/비주력 사업은 매각 또는 축소하고 핵심/주력 사업에 자원을 더욱 집중해야 한다. 중장기 저성장 기조엔 내실 경영을 우선하지만 여력이 생기면 신성장 동력 창출에도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편집자주 이 글은 송재용 외(2023), 『패러다임 대전환(부제: 한국 기업, 전략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라)』을 기반으로 작성됐습니다.
포스트 팬데믹 패러다임 대전환, 사업 포트폴리오 재조정을 요구
지난달 31일부터 사흘간 경기도 이천 SKMS 연구소에서 열린 ‘2024 SK그룹 CEO 세미나’의 최대 화두는 ‘포트폴리오 재조정’이었다. 이 자리에서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수년간 잦은 인수합병으로 비대해진 SK그룹의 계열사들을 합병하거나 매각하는 방식으로 계열사 간 중복 투자, 과잉 투자를 막는 리밸런싱에 속도를 내야 한다”고 언급하며 운영 개선 드라이브의 강도를 높이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SK그룹뿐만 아니라 삼성그룹, 두산그룹 등 거의 모든 국내 그룹사가 최근 구조조정과 포트폴리오 재조정에 나서고 있다.
사실 한국의 대기업은 심각한 부실화 우려에 직면한 기업들을 제외하고는 선진 기업들과 비교해 볼 때 자발적이고 선제적 사업 포트폴리오 조정에 상당히 소극적인 편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2010년대 국내 1위 기업집단인 삼성 그룹은 화학, 방산과 프린터 사업 등을 매각해 자발적, 선제적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조정했다. 하지만 정작 삼성보다 경쟁력이나 재무적 여건이 열악했던 국내 대부분의 대기업은 그렇지 않았기에 이 점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기업은 국내외 경제의 저성장, 지정학적 리스크 고조와 글로벌 공급망의 대전환, 디지털 대전환과 AI 혁명의 본격화 등을 특징으로 하는 포스트 팬데믹 시대의 거대한 메가 트렌드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이는 기업 전략 패러다임의 근본적 재검토와 수정을 요구한다.
실제 세계 경제는 저성장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부채가 급증한 상황에서 주요 선진국들이 양적 완화로 돈을 너무 많이 푼 결과가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돌아왔다. 여기에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양적 긴축과 함께 기준금리 인상이 빠르게 이뤄지면서 주요국의 경기 침체가 우려되는 상황이 생겨나고 있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부채가 큰 상황에서 보호무역주의 대두, 지정학적 리스크 고조, 글로벌 공급망 재조정 등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구조적 인플레이션이 상당 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이에 기준금리가 인하되더라도 초저금리 시대로 돌아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디레버리징(부채 정리) 과정에서 개인은 소비를 줄이고, 기업은 투자를 줄이며, 정부는 재정지출을 줄이거나 증세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됐다. 세계 경제의 중장기 저성장 기조 고착화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송재용jsong@snu.ac.kr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
송재용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는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컬럼비아대와 연세대 교수로 재직했으며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Academy of International Business의 석학종신회원(Fellow), 미 경영학회(Academy of Management) 국제경영분과(International Mana-gement Division)와 한국전략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