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년간 글로벌 공급망의 기본 원칙이던 ‘적시 생산’ 시스템이 지정학적 위기, 기후변화, 팬데믹 등 전례 없는 상황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있다. 원재료나 부품 등의 공급과 배송이 제때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속출하면서 모든 게 예상을 빗나가더라도 유연하고 민첩하게 대응할 수 있는 ‘대응 생산’ 시스템이 필요해졌다. 대응 생산 시스템을 구현하려면 기업이 자신이 속한 공급망을 정확히 이해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역량을 뜻하는 ‘공급망 가시성’이 갖춰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공급망의 리더 역할을 하는 기업이 참여 기업들의 인지적, 행태적 변화를 유도하는 게 급선무다. 먼저 글로벌 공급망의 참여자 간 협업 필요성을 인지시켜야 하고, 다음으로 전체 공급망 차원을 넘어 개별 참여자에게 어떤 실익이 있는지를 설득해 인센티브를 일치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실제 협업에 필요한 IT 인프라를 구축해 공급망 내 정보가 원활히 흐르고 위기 상황에서 최적의 의사결정이 내려질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
글로벌 공급망 붕괴와 원인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제품이나 서비스들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과정을 떠올려 보면 거의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에 신선한 과일과 시리얼을 먹을 수 있도록 누군가는 수개월 혹은 수년 전부터 씨를 뿌리고 재배를 시작했을 것이고, 누군가는 몇 번의 계절을 기다려 수확을 한 뒤 이를 가공, 포장하는 공장에 넘겼을 것이며, 수백, 수천㎞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는 트럭이나 기차, 심지어는 배를 운전해 도매점과 가까운 마트에 최종 생산물을 배달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비자는 집 근처 마트에 가서 값을 지불하고 과일과 시리얼을 구매한다. 이 제품이 그곳에서 오늘 아침에 만들어진 것인지 혹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채 이 과정은 진행된다.
하지만 이 과일과 시리얼은 사실 아주 먼 시간과 거리를 거쳐 식탁 위에 올라온 것이다. 그 기나긴 과정을 거치는 동안 수많은 사람과 기업이 땀을 흘리며 노력한다. 또한 소비자가 원하는 장소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만큼의 제품을 건네기 위해 엄청난 양의 정보와 커뮤니케이션, 조정과 협력이 일어난다. 이렇게 제품과 서비스가 만들어져 최종 소비자에게 이르기까지 수많은 참여자의 활동이 이뤄지고,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조정과 협력이 일어나는 거대한 네트워크가 바로 ‘공급망(supply chain)’이다. 오늘날에는 공급망을 형성하는 많은 참여자와 그들의 가치 창출 활동이 전 세계에 분포해 있기 때문에 공급망은 본질적으로 ‘글로벌 공급망(global supply chain)’이다. 즉, 글로벌 공급망은 글로벌 시장에서 가치를 창출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틀(framework)이라 할 수 있다.
공급망은 우리 몸의 혈관과 같다. 소비자가 원하는 제품과 서비스는 혈관 안에 흘러 다니는 피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람이 온전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기 위해서는 신선한 피가 쉴 새 없이 혈관을 타고 흐르면서 순환해야 한다. 심장에서 뿜어내는 새로운 피가 혈관을 통해 뇌와 장기에 도달해야만 우리는 힘차게 삶을 영위할 수 있다. 글로벌 경제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공급망을 통해 시장이 원하는 제품과 서비스가 끊임없이 흘러 다녀야만 경제가 움직인다. 만약 혈관의 어느 한 부위가 끊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내출혈은 사람의 생명을 끊을 수도 있는 심각한 단절이다. 그리고 공급망에 일어난 내출혈이 바로 ‘공급망 붕괴’다.
공급망이 붕괴되면 제품과 서비스를 필요로 하는 곳과 만드는 곳이 단절되고, 이는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로 이어진다. 전 세계에서 생산되는 식량의 총량은 지구상의 모든 인간을 먹여 살릴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하지만 지금도 지구 곳곳에는 기아가 발생해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는 비극이 발생하는 것이 극명한 예다. 이 같은 공급망 붕괴는 늘 있어 왔지만 코로나 팬데믹의 시작과 함께 그 빈도와 강도가 급격히 증가했다. 공급망 붕괴에 따른 비용 상승이나 수익 악화와 같은 어려움은 이제 더 이상 관련 기업들에 국한되지 않는다. 수많은 미디어와 정치 지도자들의 입에 ‘공급망 붕괴’라는 생소한 단어가 수시로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그동안 이 개념을 전혀 인지하지도 못했고 또 그럴 필요도 없었던 일반 소비자들마저 공급망 붕괴에 익숙해졌다. 이와 동시에 대중들이 겪는 고통과 불편도 급격히 증가했다. 코로나 팬데믹이 기승을 부리던 2021년 무렵 수많은 컨테이너선이 LA 항구에 정박한 채 수개월씩 방치된 사진은 이러한 소비자의 고통과 불편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