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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얻는 경영 TIP

승패를 가르는 타이밍

최중경,정리=배미정 | 405호 (2024년 1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남북전쟁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로 알려진 게티즈버그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결정적 계기는 바로 뷰퍼드 장군이 이끄는 기병 부대의 선제적인 방어선 구축이었다. 기병들은 준비가 안 된 상태에도 불구하고 전술적 필요성에 따라 보병을 자원해 진지를 구축했다. 이처럼 경쟁이 치열할수록 꼼꼼한 준비보다 적절한 타이밍에 치고 나가는 것이 더 유리할 수 있다. 반면 쿠르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이 패한 것은 공격을 연기하면서 상대편에 방어 역량을 구축할 시간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편집자주 정통 경제 관료 출신이자 책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의 저자로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최중경 한미협회장이 전쟁사에서 인생의 교훈을 발견하는 새로운 연재를 시작합니다. 역사 속 한 장면으로부터 현대인의 삶에 유효한 지혜를 얻어가시길 바랍니다.


당신은 신제품을 출시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 그런데 경쟁사도 비슷한 신제품을 출시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언제 언론을 통해 신제품 출시 계획을 공개해 기선 제압하는 것이 좋을까? 너무 일찍 알렸다가 실제 출시가 늦어지면 신뢰의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더군다나 경쟁사의 신제품이 먼저 시장에 나오면 스타일을 완전히 구기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신중하게 접근해 신제품이 완성 단계에 이를 때까지 기다리면 경쟁사가 먼저 선수를 칠 가능성이 높아진다. 신제품의 생산 시점과 그것을 시장에 공개하는 메시지의 타이밍은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 필요한 행동 규칙은 무엇일까?

최선의 전략은 경쟁사보다 먼저 외부에 공개하고 시장 출시도 먼저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늘 계획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비록 시장 출시가 늦어질 위험이 있더라도 경쟁사보다 먼저 공개하는 것이 시장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때론 충분한 준비가 반드시 정답이 아닐 수 있다. 준비가 부족하더라도 일단 중요한 타이밍에 치고 나가는 게 정답인 경우도 있다.

이번 글에서는 역사상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인 전투 중에서 타이밍을 잘 맞춰 성공한 사례와 타이밍을 놓쳐 실패한 사례를 하나씩 소개하고자 한다. 두 전투 모두 많은 교훈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준비와 타이밍의 관점에서 오늘날 의사결정자들에게 시사점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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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분한 준비보다 과감한 실행:
게티즈버그 전투 승리로 이끈 북군 기병사단

1863년 7월 1일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북군 포토맥군의 제1기병사단 사단장 존 뷰퍼드(John Buford, Jr.) 장군은 사단을 이끌고 게티즈버그에 도착했다. 뷰퍼드 장군은 주변을 정찰하다가 게티즈버그로 집결하는 남군의 북버지니아군의 긴 행렬을 발견했다. 약 7만5000명에 달하는 많은 군인이었다. 이때 통상적인 접근 방식은 후퇴해 북군 지휘부에 정찰 내용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뷰퍼드는 부하 기병들을 말에서 내리게 하고 방어선을 서둘러 구축했다. 기병들에게 보병 역할을 하도록 요구한 것이다. 뷰퍼드 기병사단에는 3000명의 기병과 6문의 대포밖에 없었고 진지를 구축할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에 남군 보병사단을 상대하는 것은 무모한 결정으로 보였다.

하지만 뷰퍼드는 나름 계산이 있었다. 남군 보병사단이 계속 진격해서 주변 고지를 점령하게 되면 뒤따라오는 북군이 고지를 올려다보며 어려운 싸움을 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남군이 고지를 점령한 상태에서 워싱턴 지휘부의 공격 명령이 떨어지면 북군 지휘관들은 사상자가 많이 발생할 줄 알면서도 무조건 공격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뷰퍼드는 중과부적이지만 “남군의 진격을 저지함으로써 북군 부대가 고지를 선점할 시간을 벌어준다”는 목표를 세우고 전투에 임했다.

물론 뷰퍼드가 버티고 있는 동안 북군 부대가 게티즈버그에 진출해야 유효한 작전이고, 적시에 진출하지 못하면 기병사단이 의미 없는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뷰퍼드는 승부수를 던졌다. 뷰퍼드는 게티즈버그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진출한 북군 제1군단 존 레이놀즈(John F. Raynolds) 장군에게 최대한 빨리 진격해줄 것을 요청하고 남군과 맞서서 싸웠다. 남군의 숫자가 워낙 많았기에 북군 기병사단의 방어선이 붕괴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다행스럽게도 레이놀즈 장군이 직접 이끌고 온 선발대가 시간에 맞춰 나타났다. 기병사단이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북군 보병사단이 고지를 선점함에 따라 남군은 불리한 조건에서 전투를 치르게 됐다. 이런 기병사단장 뷰퍼드의 탁월한 판단과 분전은 조지 미드(George G. Meade)가 지휘하는 북군 포토맥군(8만3000명)과 로버트 리(Robert E. Lee)가 이끄는 남군 북버지니아군(7만5000명) 사이에 벌어진 게티즈버그 전투가 북군의 승리로 끝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남북전쟁 당시 기병대의 주된 임무는 기동력을 바탕으로 적의 병력 배치와 이동 상황을 파악하고 보병부대의 측면을 엄호하는 것이었다. 정석대로 간다면 뷰퍼드는 남군의 진격 상황을 보고하는 것이 정찰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므로 기병사단을 철수시키고 후속하는 보병사단들이 전투에 임하도록 하면 됐다. 그러나 뷰퍼드는 고지의 전술적 중요성을 이해하고 준비가 안 된 상태이지만 위험을 감수하고 보병 역할을 자원했다.

‘충분한 준비보다는 일단 치고 나가는 타이밍이 더 중요하다’는 뷰퍼드의 판단은 옳았다. 이에 반해 남군 기병부대는 게티즈버그 전투가 개시되고 이틀이 지나서야 게티즈버그에 도착하는 실책을 범했다. 기병대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북군의 병력 배치, 이동 상황, 게티즈버그 주변의 지형을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투에 돌입한 남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패배했다. 게티즈버그에서 교전 상황이 발생하자 남군 사령관 리 장군도 고지의 전술적 중요성을 알아채고 제2군단장 리처드 유얼(Richard S. Ewell)에게 고지 점령을 지시했다. 하지만 유얼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유얼은 이미 북군이 고지에 진출했다고 판단하고 점령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 버렸지만 사실은 일부 고지가 비어 있었다. 만약 남군이 고지를 점령해 북군 진지에 포격을 가하고 공격해오는 북군을 내려다보며 전투를 하는 유리한 입장에 서게 됐다면 게티즈버그 전투의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남군의 제1군단장 제임스 롱스트리트(James Longstreet) 장군은 이튿날인 7월 2일 아침에 남군 사령관 리에게 북군이 고지를 점령한 상태에서 전투를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게티즈버그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해 유리한 지형을 선점한 다음에 추격해 온 북군을 상대로 전투를 다시 하자고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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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기다리다 반격 허용해 실패:
쿠르스크 전투의 독일 기갑부대

1943년 2월 2일, 건물에서 건물로 이어지는 시가전 혈투가 6개월 가까이 지속돼 역사상 인명 손실이 가장 큰 전투로 기록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끝났다. 소련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간헐적인 항공 보급에 의존하며 버티던 독일 제6군이 항복함으로써 동부전선의 주도권이 소련군에게 기울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이후 소련군의 공세에 밀려서 후퇴를 거듭하다 반격에 성공해 우크라이나 중심 도시 하르코프를 탈환하면서 전선이 일시적인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쿠르스크(Kursk) 전투는 기울고 있는 전세를 뒤집고 다시 독일군이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기획됐다. 쿠르스크 전투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 역량이 투입됐으며 1943년 7월 5일부터 8월 23일까지 진행됐다. 양군 합해서 200만의 병력, 6000대의 전차, 4500대의 항공기가 뒤얽혀서 싸운 쿠르스크 전투는 독일군이 조직력을 발휘해 많은 전술적 성공을 거뒀지만 병력과 물자가 월등하게 풍부한 소련군의 승리로 결론이 났다. 쿠르스크 전투 이후 독일군은 동부전선에서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소련군의 공세에 밀려 후퇴를 거듭했다.

독일군이 쿠르스크 공세 작전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쿠르스크 지역이 전선에서 ‘ㄷ’ 자 모양(남북으로 250㎞, 동서로 160㎞)으로 크게 돌출돼 있어 “남쪽과 북쪽에서 공격해 포위해 섬멸한다”는 작전 목표를 비교적 쉽게 달성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런 지형적 특성이 소련군 지휘부의 관심을 끌기는 마찬가지여서 소련군 지휘부도 쿠르스크 돌출부에 주목하고 독일군의 공세를 예상하고 있었다. 독일군을 이끄는 에리히 폰 만슈타인(Erich von Manstein) 원수는 자타가 공인하는 독일군 최고 엘리트였고 전차부대를 활용한 기동작전 수립의 대가였다. 소련군을 이끄는 게오르기 주코프(Georgy Zhukov) 원수도 만슈타인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지략을 갖추고 있었다. 1938년 7월에 있었던 할힌골 전투에서 탱크와 전투기를 입체적으로 활용해 일본 관동군에게 크게 한 방 먹였고 스탈린그라드의 90%를 장악해 승리를 눈앞에 둔 독일군을 기습적으로 포위해 완전하게 고립시키며 일거에 전세를 뒤집었다. 주코프 원수는 상대방의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인내심이 탁월했다. 상대방의 공세를 견뎌내며 상대방이 보급 문제와 피로감 등으로 공세 종말점에 이르길 기다렸다가 대규모의 병력과 장비를 투입해 반격을 가하는 것이 주특기였다. 주코프는 이미 모스크바 공방전과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자신의 전투 스타일을 잘 보여 준 바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탈린그라드 전투 승리 이후 작전 수립과 시행에 있어 스탈린이 주코프에게 자율권을 부여한 반면 소련군에게 밀리고 있던 만슈타인은 히틀러의 간섭을 받고 있었다. 만슈타인은 소련군도 쿠르스크 돌출부의 전술적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소련군의 방어 태세가 갖춰지기 전에 신속하게 공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 1943년 5월 상반기 이내에 공격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쿠르스크 전투가 동부전선의 주도권 향방을 결정하는 중요한 전투이므로 1개월 동안 준비를 철저히 해서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새로 개발된 독일 신형 전차 티거의 성능에 매료돼 티거 전차를 충분히 생산해 쿠르스크에 투입하는 것이 승리의 관건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티거 전차의 생산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자 히틀러가 다시 1개월을 더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독일군의 공격은 만슈타인이 생각했던 시점보다 2개월이나 지난 1943년 7월 초에 시작됐다. 그러나 공격이 연기된 2개월 동안 소련군도 가만히 앉아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주코프 원수는 민간인 여성들까지 동원해 독일군 탱크가 건널 수 없는 깊은 도랑을 팠다. 도랑과 도랑이 연결되는 지점에는 대전차지뢰를 촘촘하게 매설했다. 도랑과 지뢰로 강화된 탱크 저지선에 막혀 속도가 떨어진 독일 탱크부대가 우왕좌왕 혼란에 빠지자 소련군이 급강하폭격기의 공중 폭격과 포병부대의 철갑탄 포격으로 강타했다. 소련군의 공중 폭격과 포격으로 기갑부대가 큰 피해를 입는 바람에 독일군의 기동 포위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독일군의 힘이 빠지길 기다리던 주코프 원수가 예비 부대를 투입해 총공세로 전환했다.

마침 연합군이 시칠리아섬에 상륙해 이탈리아를 위협했으므로 이탈리아에도 추가 파병을 해야 하는 독일군 지휘부는 쿠르스크에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웠다. 독일군은 기약 없는 퇴각의 길로 내몰렸다. 히틀러는 철저히 준비하기 위해 2개월을 연기했지만 2개월 동안 소련군의 방어 역량이 더 강화된다는 측면을 고려하지 않았다. 소련의 무기 생산 속도가 독일보다 빨랐기 때문에 시간이 갈수록 소련군의 전투력이 상대적으로 강화됐다. 상대방이 뻔히 예상할 수 있는 공격을 2개월이나 연기해 탱크 저지선을 구축할 시간까지 허용한 꼴이 되고 만 것이다. 만슈타인 원수의 판단대로 준비가 부족해도 가급적 빨리 5월 초에 공격을 개시했어야 했다.

쿠르스크 전투는 인명과 장비 손실 측면에서 볼 때 전술적으로는 독일군이 진 전투가 아니었다. 소련군의 인명 손실은 독일군의 5배였고, 파괴된 소련군 탱크의 수가 독일군의 7배였으며, 격추된 소련군 항공기의 수가 독일군의 3배였다. 하지만 잘 싸운 독일군은 준비가 잘된 소련군의 인해전술과 물량 공세에 밀려났다. 진정한 승자도 진정한 패배자도 없었던 쿠르스크 전투의 패배자는 아돌프 히틀러였다. 군사 작전에 무모하게 개입해 군사 천재 만슈타인의 손발을 묶고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마음에 와닿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 최중경choijk1956@hanmail.net

    한미협회장

    최중경 한미협회장은 33년간 고위 관료와 외교관을 지냈고 동국대 석좌교수, 고려대 석좌교수, 미국 헤리티지재단 방문연구원, 한국공인회계사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미 협력을 증진하는 민간단체인 한미협회 회장과 자선단체 평가 업무를 수행하는 NGO인 한국가이드스타 이사장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를, 미국 하와이대에서 경제학 박사를 받았다. 저서로는 『청개구리 성공신화』 『워싱턴에서는 한국이 보이지 않는다』 『역사가 당신을 강하게 만든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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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리=배미정

    정리=배미정soya1116@donga.com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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