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종 대의 거듭된 환국은 붕당 간 공존·협력의 틀을 무너뜨리고 정치 보복을 일상화해 경세가들이 국정에 몰입하기보다 생존과 안위를 먼저 걱정하게 만들었다. 김석주, 허적, 민정중은 행정, 재정, 진휼 등에서 탁월한 역량을 갖췄지만 숙종 치세에서는 정쟁과 숙청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역량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비극적 결말을 맞는다. 근본 원인은 숙종이 재상을 신뢰하지 않고 필요에 따라 ‘언제든 갈아치울 수 있는 소모품’으로 대하며 조직 전체를 불안과 단기 생존 게임으로 몰아넣은 데 있다. 리더가 인재를 소모하면 조직은 인재 공백, 업무 지체, 신뢰 상실이라는 ‘삼중 비용’을 치르게 되며 이는 단기 성과와 별개로 미래 역량을 갉아먹는다. 격변기일수록 인적 자원을 총동원해 잠재력을 200~300% 끌어내야 하지만 숙종은 오히려 온건한 조정자를 배척해 갈등을 고착시키며 국가의 장기 기반을 훼손했다.
지난 아티클(DBR 428호·2025년 11월 1호)에서 소개했다시피 숙종의 시대는 거듭된 환국(換局)으로 붕당 간 공존과 협력의 틀이 붕괴하고 갈등이 극단으로 치달았다. 상대에 대한 적개심은 사그라들 줄 몰랐고 정치 보복의 악순환이 계속됐다. 그러다 보니 이 시기에 활동한 경세가들 역시 온갖 수난을 겪었다. 삭탈관직과 유배는 예사였고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다. 나랏일에 집중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자신의 안위를 걱정해야 했으니 능력을 온전히 펼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첫 번째로 소개할 인물은 김석주(金錫胄, 1634~1684)다. 효종 대의 명재상 김육의 손자이자 현종비 명성왕후의 사촌오빠인 그는 진사시와 대과에 연달아 장원으로 급제했을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혔다. 훗날 정조가 “필력은 막힘이 없어 하늘을 나는 기상이 있고, 격조는 건실하며 짜임새가 단단하다”11『홍재전서(弘齋全書)』 161권,「일득록(日得錄)」닫기라며 극찬할 정도였다. 또한 그는 예학에 밝았고 천문학과 의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국방과 외교, 경제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탁월한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보기 드문 인재인 김석주를 숙종은 과연 잘 활용했을까?
숙종 시대에 김석주는 병권을 도맡았다. 오랫동안 병조판서를 지냈고 정승이 된 후에는 국왕 경호를 총괄하는 호위대장을 겸직했다. 왕이 믿을 만한 외척에게 병권을 맡기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라 특별한 것은 없지만 이 시기에 그가 권모술수와 공작 정치를 주도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는 1680년 남인이 몰락하고 서인이 정권을 잡은 ‘경신환국(庚申換局)’을 설계했고22남인의 영수이자 영의정 허적의 아들 허견이 삼복(三福, 숙종의 당숙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과 작당한 것을 역모로 확대하고 남인 대신들을 연루시켜 숙종이 환국을 단행할 명분을 제공했다.닫기 남인의 재집권을 막기 위해 ‘임술삼고변’33임술년에 벌어진 세 건의 반역 고발 사건으로 1) 김환이 허새와 허영의 역모를 고변한 것 2) 김익훈이 유명견의 반역을 고변한 것 3) 김중하가 민암의 모반을 고변한 것을 가리킨다. 모두 남인이 역모를 모의했다고 고발했는데 1)은 함정수사에 의한 것이고 2)와 3)은 무고로 밝혀졌다.닫기 이란 정치공작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서슴없이 불법을 자행했으며 모략과 협박, 조작과 왜곡을 가리지 않았는데 물론 본인의 선택이었지만 그를 그런 길로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숙종이었다. 숙종은 김석주에게 행정가나 문장가로서 빛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보다는 왕실을 지키고 왕권을 뒷받침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라는 것, 왕이 원하는 정국을 만들고, 이를 위해서는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해도 괜찮다는 것이 숙종의 요구였고, 그는 이를 따랐다. 숙종이 김석주의 정치공작을 질책한 적이 없고 이 일로 문제가 불거졌을 때 덮어준 데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즉 르네상스적 인재였던 김석주가 음험한 공작 정치의 달인인 된 데는 숙종의 책임이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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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akademie@skku.edu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