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ased on “Dinosaurs of the Organizational Landscape Facing Technological Disruption: Liability of Aging and Exaptation in Monastic Orders”(2026) by Jan Simon Danko and Katja Rost in Research Policy.
스위스의 한 베네딕도회 수도원은 난방과 성당 조명을 디지털로 제어하고 오르간도 태블릿 PC로 작동시킨다. 자체 개발한 앱 두 개를 운영하고 소셜미디어를 활용하며 미사는 온라인으로 생중계한다. 기도와 침묵, 세속과의 거리를 중시하는 수도원의 전통적인 이미지와는 언뜻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스위스 취리히대 연구진은 이런 수도원에 주목해 오래된 조직이 기술 변화에 어떻게 적응하는지를 살펴봤다. 조직 이론에서는 흔히 ‘노화의 부담(liability of aging)’을 이야기한다. 조직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과거 환경에 맞춰 만들어진 제도와 관행이 굳어져 새로운 기술과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래된 조직의 유산이 반드시 변화의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만들어진 제도나 구조가 새로운 환경에서 전혀 다른 쓸모를 가질 수도 있다. 연구진은 이를 ‘전용(exaptation)’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원래 특정 기능을 위해 생겨난 생물학적 형질이 훗날 전혀 다른 용도로 활용되는 현상을 조직에 적용한 개념이다.
연구진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독일어권 스위스의 가톨릭 수도원 354곳을 조사해 이 가운데 112곳의 자료를 확보했다. 수도원 책임자와 구성원을 대상으로 설문을 실시하고 홈페이지와 소셜미디어 활동도 분석했다. 연구자가 스위스·오스트리아·예루살렘의 베네딕도회 수도원 5곳에서 직접 생활하며 36건 이상의 인터뷰도 진행했다. 수도회는 설립 시기에 따라 초기 중세의 오래된 수도회, 중기 중세의 탁발수도회, 후기 중세의 개혁수도회로 나눠 비교했다.
예상대로 오래된 수도회일수록 디지털 기술을 위협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했다. 전체 수도원 책임자와 구성원의 35~40%가 스마트폰과 상시 접속 같은 디지털화가 기도와 예배, 공동 식사 등 수도원의 일상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 특히 초기 중세에 뿌리를 둔 수도회에서 이런 인식이 강했다. 한 수도자는 스마트폰이 들어온 뒤 수도원이 외부 세계와 분리된 공간이라는 의미가 크게 약해졌다고 토로했다.
그런데 실제 디지털 기술 도입 정도를 살펴보자 예상 밖의 결과가 나왔다. 오래된 수도회가 젊은 수도회보다 디지털화에 뒤처진다는 뚜렷한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후기 중세에 등장한 개혁수도회가 디지털 접근성과 소셜미디어 활용 등 일부 지표에서 조금 앞섰지만 차이는 크지 않았다. 디지털 기술을 더 경계한다고 해서 실제 도입까지 더딘 것은 아니었다.차이를 만든 것은 조직의 나이가 아니라 ‘조직 구조’였다. 의사결정이 분권화돼 있고 구성원들이 공동의 규칙과 가치를 잘 지키는 수도원일수록 디지털 적응 수준이 높았다. 이런 수도원은 더 다양한 디지털 서비스를 제공했고 구성원의 디지털 접근성과 활용 역량도 높았다. 소셜미디어에서도 더 많은 팔로어를 확보하고 다양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경향을 보였다. 경제적 자립을 중시하는 수도원 역시 디지털 서비스와 소셜미디어 활용에 상대적으로 적극적이었다.흥미로운 점은 이런 조직 구조가 디지털 시대를 대비해 만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초기 중세의 수도원들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멀리 떨어진 공동체를 안정적으로 운영해야 했다. 그래서 개별 수도원에 상당한 자율성을 부여하는 한편 공동생활과 교육을 통해 구성원들이 수도회의 규칙과 가치를 강하게 공유하도록 했다. ‘현장에는 자율성을 주되 공동의 원칙은 강하게 공유하는 구조’였던 셈이다.
수백 년 전에는 고립된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장치였던 이 구조가 디지털 시대에는 새로운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각 수도원이 자신의 상황에 맞는 기술을 빠르게 시험하고 도입할 수 있는 기반이 된 것이다. 과거의 필요 때문에 만들어진 조직 구조가 전혀 다른 환경에서 혁신을 돕는 자산으로 변신한 셈이다. 연구진이 이를 ‘전용’의 대표적인 사례로 보는 이유다.
그렇다고 오랜 규칙을 버린 것도 아니다. 일부 수도원에서는 지금도 신입 수도자는 처음 몇 달 동안 스마트폰을 반납해야 한다. 다른 수도원에서는 어떤 디지털 기술이 공동체에 필요한지를 구성원들이 함께 논의한다.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면서도 기도와 공동생활이라는 조직의 핵심 가치가 훼손되지 않도록 경계를 정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오래된 조직의 유산이 반드시 혁신의 반대편에 위치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오래된 제도와 관행은 변화의 족쇄가 될 수도 있지만 새로운 환경에서 뜻밖의 경쟁력으로 바뀔 수도 있다. 오래된 조직을 혁신할 때 필요한 것은 과거의 유산을 무조건 걷어내는 일이 아니다. 무엇을 버릴 것인가에 앞서 과거의 어떤 자산을 새로운 목적에 맞게 다시 쓸 수 있는지를 찾아야 한다. 수백 년 된 수도원이 디지털 시대에 적응한 모습이 기업에 던지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