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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손 다각화 전략

키워드 = 女心·중국·브리지 주얼리 ··· 남성적 시계업체, 여성적 주얼리를 뒤집다

고승연 | 179호 (2015년 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전략, 마케팅, 혁신

 

 

 

1990년대 중후반까지 한국을 대표하는 시계 회사였던 로만손은 다양한 사회문화적 변화, 기술환경적 변화에 의해 위기를 겪게 된다. 위기가 가장 심화되던 시기에 인접 분야인주얼리사업으로 다각화를 이뤄 J.ESTINA라는 브랜드를 출시하며 큰 성공을 거둔다. 성공요인은 다음과 같다.

 

1) 고객가치 이해, 그리고 선택과 집중

2) 탁월한 포지셔닝 역량과 시장개척자 전략

3) 새로운 제품개발 방식의 구축과 활용에 기반한 차별화

4) 해외 시장에서 외국계 후발기업으로서의 약점 극복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손혜령(미국 다트머스대 경제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삼성에서 시계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을까?

1980년대 후반까지 대한민국의 시계시장은 삼성과 오리엔트가 각각 33∼37% 사이를 오가며 양분하고 있었고 아남과 한독이 각각 13% 8%의 점유율을 차지하며 뒤를 쫓고 있었다. 하지만 1988 4, 시계 시장에 핵폭탄이 하나 떨어진다. ‘완제품 손목시계완전수입 개방정책으로 해외 고급 시계가 국내 시장에 쏟아져 들어왔다. 기존 4강 체제는 완전히 무너졌다. 당시 언론보도 등을 보면 삼성은 사업을 정리하면서 해당 사업부가 SWC라는 기업으로 독립했지만 예전의 영광을 되찾지 못했다. 오리엔트는 시계로만 당시 1000억 원 가까운 매출을 바라봤지만 역시수입 브랜드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아남과 한독도 마찬가지였다.1

 

한국 시계시장이 요동치던 그때혼돈의 한복판으로 뛰어든 기업이 있다. 바로 로만손이다.

 

차근차근 시계 사업을 준비해 오던 로만손의 창업자(김기문 현 로만손 회장) 5명의 직원들과 함께 시장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수년 만에무서운 30대들의 기업이라 불리며 돌풍을 일으켰다. 로만손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글로벌 브랜드의 꿈, 그러나

창업 후 1년 뒤부터 곧바로 100% 자체 브랜드를 만들어수출에 중점을 뒀다. 로만손이 창업 당시부터 시작된 한국 시계 시장의 혼란을 피해갈 수 있었던 이유다. 물론 로만손도 처음 비즈니스를 시작했을 때에는 당시 국내 200여 개의 시계 제조업체 중 70% 이상이 택했던 OEM 방식이었다. 처음부터 브랜드를 알릴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일본 리치저팬과 니혼하레이에 OEM 방식의 수출을 시작한다. 그러나 엔화가 하락하자 일본 바이어 등은 채산성을 이유로 수입선을 곧바로 대만과 홍콩으로 전환했다. 김기문 당시 사장은 이때, 수출이든 내수든 사업의 지속성, 제대로 된 성공을 위해서는 반드시내 브랜드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는다. 자체 브랜드 개발에 온 힘을 기울여 1년 만에 회사명 그대로 ‘romanson’이라는 브랜드를 만들어 키우기로 결심한다. 본래 로만손이라는 사명이 ‘Romansion’이라는 스위스 시계 제조도시에서 따온 것이어서 상징성이 있었고, 남자의로망이자로맨스를 상징하는 등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브랜드화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렇게 자체 브랜드를 키워서 수출해야겠다는 당시 경영진의 생각은국내적 압력국제적 조건이 만나는 과정에서 도출됐다. 전술했듯, 1988년 수입시계 완제품 개방 이후 국내 시장은 요동치고 있었고 기존의 시장 최강자였던 삼성과 오리엔트 등도 변화의 파고를 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이러한 압력 속에서 OEM도 큰 리스크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되자 자체 브랜드 수출은 더욱 절실해졌다. 오랜 시간 준비했기에 기술력에도 자신이 있었다. ‘고급 예물시계’해외로 수출할 수 있는 한국 명품 시계로 브랜드 콘셉트를 잡았다.

 

여기에 국제적으로 좋은 조건 하나가 더해진다. 로만손이 시장 개척에 나선 80년대 후반은 신흥 성장 시장(Emerging Markets)으로 일컬어지는 개도국 시장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시절이었다. 여전히수출주도형 성장 모델을 갖고 있던 한국 정부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하도록 기업들을 독려했다. 대한무역공사(KOTRA)가 나서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도움을 주는 상황이었다. 또한 신규 시장이기에 후발업체임에도 해볼 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로만손은 특히 처음부터 중동 시장에 주목했는데 중동 국가들이 대부분이 석유 생산국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보이는 반면 공산품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수출 시장으로서의 매력이 컸던 탓이다. 여기에 두바이는 중동 지역의 중계 무역 중심 도시로 중동뿐 아니라 아프리카에서 러시아까지 재수출되는 지역이다. 무역이 자유로운 중계 거점 지역 또는 자유 무역 지역을 우선 공략하고, 이를 통해 인근 지역으로의 재수출 방식은 저비용 고효율의 효과적인 방식이다. 이 전략은 이후 로만손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마케팅 기법으로 활용된다.

 

1989 5 KOTRA 주최 행사에서 처음 두바이 바이어와 독점 대리점 계약을 맺어 중동을 중심으로 한 자체 브랜드 수출이 시작된다.2

 

이처럼 로만손은 해외 각국에서 로만손 시계만을 취급하는독점 대리점방식의 계약을 통해 창업 이후 1992년까지 매년 평균 300%씩 성장을 하면서 새로운 역사를 써갔다. ‘romanson’이라는 브랜드명은 어느 나라에서든 비슷하게 읽히고 쉽게 기억됐다. 주로 UAE나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지역 국가를 비롯해 70여 개국으로 수출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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