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타치 턴어라운드
Article at a Glance – 전략,혁신 히타치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큰 손실을 기록하며 위기에 빠졌다. 당시 히타치 회장은 본사 부사장을 끝으로 자회사의 명예직을 전전하던 가와무라 다카시를 사장 겸 회장으로 발탁했다. 위기에 빠진 히타치는 외부인의 눈으로 위기를 진단해야 했다. 그래서 60대 후반의 ‘흘러간 인사’까지 불러서 방향키를 맡겼다. 이런 결단은 성공이었다. 가와무라 회장과 경영진은 히타치의 정체성을 ‘소셜이노베이션’으로 정하고 체질 개선에 나섰다. 사회 인프라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던 히타치의 강점을 최대한 살린 결정이었다. 이후 수익을 내더라도 정체성을 살리지 못하거나 중장기적으로 적자가 예상되는 사업은 과감히 정리했다. 그 결과 매출액은 줄었으나 위기에서 벗어났으며 재무제표는 흑자로 돌아섰다. 히타치의 회생은 중국 기업에게 쫓기는 한국 기업에게 시사점을 남긴다. 향후에도 IT 분야에서 경쟁력을 되찾기 어렵다고 판단한 히타치는 다른 일본 전자업체와는 달리 여전히 일본 기업들이 강하게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는 사회 인프라 분야에 집중했고 결국 위기에서 벗어났다.
명암 엇갈리는 소니와 히타치
2014년 9월 소니는 1958년 상장 이래 처음으로 무배당을 발표했다. 2015년도 적자가 2300억 엔에 달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4684억 엔의 적자를 낸 이후 아직도 적자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편 2009년 3월 히타치제작소(이하 히타치)는 소니보다 훨씬 많은 7873억 엔의 손실을 기록했다. 당시 일본의 제조기업이 낸 적자 규모로는 최대였다. 그것도 창업 100주년인 2010년을 바로 1년 앞둔 시점에서 기록한 성적표다.
그러던 히타치가 2014년 3월에는 5328억 엔이라는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히타치에게는 ‘거함’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소니가 TV·휴대폰 등 주로 IT사업에 주력하는 기업이라면 히타치는 전력과 철도, 수도, 정보통신, 가전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전자사업에 손을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내에서는 ‘대마불사’ 의식이 팽배해 ‘침몰하는 거함’에 비유되기도 했다. 침몰 위기의 거함이 새롭게 순항하기 시작하고 있다. 무엇이 일본 전자산업을 대표하는 두 기업의 명암을 갈랐을까?
히타치 개혁의 성공 요인으로 이단아의 반란을 빼놓을 수 없다. 가와무라 다카시(川村隆史) 전 회장과 나카니시 히로아키(中西宏明) 현 회장이 이단아 반란의 주역이다. 두 사람은 침몰하는 거함을 개조했다. 이들이 히타치를 어떻게 개혁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자.
뜻밖의 인사가 개혁 주도자로 등장
히타치 개혁은 2009년 3월 실시한 기상천외한 사장단 인사에서 시작됐다. 2003년 히타치 본사 부사장을 마지막으로 퇴사한 후, 자회사의 명예직을 전전하던 가와무라를 회장 겸 사장으로 발탁한 것이다. 히타치는 한 번 사장으로 발탁되면 8∼10년은 자리를 유지하는 게 관행이었다. 1999년 쇼야마 에츠히코(庄山悅彦)가 신임 사장으로 취임했기 때문에 당시 부사장이었던 가와무라에게는 사실상 사장이 될 가능성이 사라졌다. 그런 인물이 위기의 히타치를 구원할 회장 겸 사장으로 발탁되자 히타치에서는 물론 경제계 안팎이 크게 놀랐다. 이미 사내 경쟁에서 탈락했던 인물이 부활했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다. 가와무라와 함께 개혁을 추진할 부사장 5명의 인사도 예상 밖이었다. 미국 자회사에서 불려온 나카니시를 비롯해 국내 자회사에서 2명, 영업·정보통신 책임자 등에서 발탁됐다. 당시 히타치의 경영을 책임지던 임원은 아무도 없었다. 이제 이단아들이 일본 최대 전자기업인 히타치 경영에 전면 등장한 것이다. 이런 인사를 두고 “경영진의 나이가 점점 젊어지는 게 추세인데, 시대에 역행하는 것은 아닌가” “히타치에 그 정도밖에 인재가 없는가”라는 비판이 들끓었다. 당시 가와무라는 이미 69세로 은퇴를 눈앞에 둔 ‘흘러간 사람’에 불과했다.
가와무라 역시 회장이었던 쇼야마에게서 사장 취임 요청을 받았을 때 당황했다. 그리고 고민했다. 지인들은 “히타치 적자가 7000억 엔을 넘는다” “만년을 더럽히느니 거절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하룻밤을 고민한 후 그는 곧 승낙했다. 자회사를 돌며 밖에서 히타치 본사의 문제점에 대해 느낀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또 현재 히타치는 외부에서 히타치를 바라본 사람에게 개혁을 맡길 수밖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다. 매출이 10조 엔이 넘는 거대한 본사는 전략의 명확성과 결단의 스피드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규모가 작은 자회사 경영에서는 재무상황을 보며 전략을 즉시 수립하고 빠른 결단을 내릴 수가 있다. 위기에 봉착한 히타치는 그런 경영자가 필요했다. 가와무라는 자회사 경영을 경험한 자신에게 위기의 히타치를 빨리 개혁하라고 ‘시곗바늘을 되돌린 인사’를 단행한 쇼야마의 결단이 옳다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사장과 회장을 겸직하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비상사태에는 스피드가 무엇보다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가와무라는 스스로가 히타치의 ‘라스트 맨(last man)’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가 이렇게 결심한 배경에는 2가지 에피소드가 얽혀 있다. 하나는 히타치공장 설계과장 시절 공장장에게 배운 라스트 맨 정신이다. 당시 공장장은 “내가 창문을 뒤로하고 앉아 있는 이유는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공장이 침몰하면 직원들이 먼저 탈출하고 나는 마지막에 창을 부수고 탈출하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경영자는 회사가 망하는 최후까지 남아서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는 ‘라스트 맨 정신’이 각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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