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만 이건만AnF 대표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정다은(이화여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한글은 다루기 쉽지 않은 주제였다. 자음과 모음을 반복적으로 배열해 아름다움을 확보하면서도 나란히 선 글자들이 이상한 의미를 연상시키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우리나라 문화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적인 모티브라는 장점은 구식이며 고리타분한 이미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위험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모노그램을 만들어 선보였을 때 초기 시장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기회가 왔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하던 지인을 통해 이곳에서 판매될 문화상품 개발을 맡았다. 박물관에 전시된 그의 작품들은 큰 인기를 끌었다. 이를 계기로 청와대나 정부 부처의 해외 귀빈 의전용으로 제품을 납품하고 면세점과 백화점을 뚫었으며 대기업으로부터 별도 주문을 받기 시작했다. 한글을 다루는 디자이너로서 이건만 대표가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는 “좋은 디자인이 나오려면 일단 양적으로 충분해야 한다”며 “세계 어느 곳보다도 인재들이 많이 크고 있는 대한민국의 디자인 미래는 밝다”고 전망했다.
왜 한글인가.
본래 전공은 섬유미술과 섬유공예였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아트와 디자인을 공부했다. 원래 안 그랬던 사람도 외국에 오래 나가 있으면 애국자가 되는 법이다. 공부하다가 틈날 때마다 학교 도서관을 찾았다. 한국과 관련된 책이 없는지 뒤지고 다녔다. 일본이나 중국에 대한 책들은 많은데 한국에 대한 책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속상했다. 방학 때 한국에 들어오면 가능한 많이 책을 사다가 학교에 기증하곤 했다. 이러면서 문화와 언어의 힘에 대한 생각이 어렴풋하게나마 자리 잡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공부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기마다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앞으로 21세기가 되면 디자인이 굉장히 중요해질 것이다, 문화가 힘이다, 이제 너희 각자가 브랜드다 등등. 당시만 해도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고 하면 졸업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책 표지디자인 정도였다. 국내 디자인이라는 것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옷이며 가구며 해외에서 수입해서 잘 따라 하면 좋은 디자인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학생들에게 했던 말은 충분히 허무맹랑하다고 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이건만 대표는 홍익대 섬유미술과와 동 대학원을 거쳐 미국 Cranbrook Academy of Art를 졸업하고 뉴욕 F.I.T. 및 필라델피아공대 디자인대학원에서 수학했다. 우리나라의 대표 문화자원인 한글의 조형적 특징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한 독창적인 디자인을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판매될 상품 개발을 시작으로 한글을 비롯한 전통요소들을 패션에 접목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
그런데 어느 날 일이 터졌다. 의대와 공대를 다니던 학생 두 명이 내 수업을 듣고 미대로 전과를 해버렸다. 아차, 싶었다. 내가 학생들에게 지나치게 허황된 기대를 심어준 것은 아닌가, 디자인에 정말 미래가 있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내 말이 맞는지 틀린지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좀 더 정확하게는 그동안 해왔던 말들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싶었다. 2000년대 들어 마음 맞는 제자들 몇 명과 회사를 차렸다. 무엇을 우리의 모티브로 할까 고민하다가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 문화와 문명, 우리의 사상과 생각들을 담아내는 것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뭘까, 한글이라고 봤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한글을 주제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쉬운 주제는 아니다. 해마다 후회한다. 포기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차라리 꽃이나 하트처럼 일반적인 문양이었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다. 한글은 전통(traditional)이고 문화(culture)다. 디자인은 패션(fashion)이자 트렌드(trend)다. 이를테면 물과 기름이다. 절대 섞일 수가 없다. 전통과 트렌드가 어떻게 섞이겠는가. 아무리 흔들어도 둘은 섞이지 않는다. 조금만 지나면 금세 분리된다. 물과 기름이 함께 있어도 겉돌지 않고 완전히 섞이려면 화학작용이 수반돼야 한다. 사람들은 전통에 선입관을 갖고 있다. 많이 들어가면 싫어 하고 패션에 뒤진다고 생각한다. 한글을 넣으면서도 과하지 않게 전통과 트렌드 사이의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한글 모노그램을 단순히 기념품에 입히지 않고 핸드백이나 지갑, 벨트 등에 덧입힌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핸드백이나 지갑은 서양 문물이다. 우리도 쓰고, 서구에서도 쓰고, 전 세계 공통으로 사용한다. 전통적인 느낌의 한글 문양이 기념품에 들어가면 아무도 사지 않을 것이다. 그나마 누구나 사용하는 보편적인 품목에 입히니 패션 쪽으로 한걸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억지로라도 화학작용을 만들어보자는 노력이다. 지금 생각하면 지극히 당연한 과정이었지만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한글 문양은 당연히 한복이나 노리개 같은 고전적인 물품에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시선이 많았다. 나는 다르게 생각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우리의 문화, 우리의 문명을 활용해 글로벌 브랜드를 만들자는 것이 목표였다.
어려운 주제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흔히 내가 한글을 굉장히 사랑한다거나 푹 빠져 있어서 한글을 주제로 삼았다고들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다. 사랑해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한글이어야만 했기 때문에 어려운 주제인 줄 알면서도 시작했다고 봐야 맞다.
한글뿐 아니라 기와라든지 한복의 여밈 등에서 모티브를 따온 작품이 많다.
이 같은 아이디어는 어떻게 포착하는가.
양에서 질이 나온다. 지금까지 동료나 제자들을 포함해 수천 명의 디자이너를 만났지만 ‘와, 쟤는 진짜 천재야’라는 생각은 한 번도 못해봤다. 많이 시도하고 그려보는 친구가 결국 좋은 디자인을 만들어낸다. 많은 양을 쏟아내다 보면 그중에 작품이 하나씩 나온다. 그러려면 항상 생각해야 한다. 한때 디자인에 미쳐 있을 때는 머리맡에 스케치북을 놔두고 잤다. 혹시 꿈에서라도 형태나 패턴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자기 전에 누워서 올려다보면 천장에 디자인이 그려지곤 했다. 마치 당구를 처음 접한 사람이 천장에 당구대를 그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계속 집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아! 하면서 무릎을 치게 된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하는 순간이 온다. 아무 것도 안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영감이 떠오르는 경우란 절대 없다. 그저 매일 그 생각만 하는 수밖에 없다.
항상 디자인을 생각하다 보면 무엇을 봐도 디자인과 연결된다. 일본에 갔을 때다. 가로수를 심어둔 흙과 사람이 걷는 도로를 구분하는 경계에 놓인 받침대를 보고 감탄한 적이 있다. 우리나라는 받침대 문양이 큼직큼직해서 여성들이 다니다가 구두 굽이 잘 빠지는데 일본은 그 사이에 굽이 빠지지 않도록 문양을 작고 섬세하게 그려 넣은 것을 봤다. 어떤 나라에서는 길을 걸으며 유심히 봤더니 하수구 뚜껑마다 디자인이 달랐다. 다른 사람을 만나면 머릿결이나 옷감이 펄럭이는 느낌 등을 본다. 채널을 돌리다가 흑돌과 백돌이 놓인 바둑판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은 적도 있다. ‘어느 날 갑자기’는 절대 없는 얘기다.
직원들에게는 ‘자꾸 실패하라’고 얘기한다. 많이 참견하지 않고 가이드라인만 제시한 후 실패를 독려한다. 나도 자주 실패한다고 털어놓고 실패담을 공유한다. 내가 정답이 아니니 나를 믿지 말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실제로 내가 주도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별로 없다. 가급적 디자이너들에게 맡기는 편이다. 경주나 담양 등 한국적 문양을 많이 가진 도시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다만 슬럼프에는 엄격하게 대처한다. 사람들은 슬럼프가 오면 힘들어 한다. 무기력해지면서 포기하고 싶어 한다. 슬럼프는 몸이 그대로인데 정신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됐을 때 온다. 정신이 큰 만큼 몸이 따라주지 못해서 우울한 것이다. 슬럼프에서 벗어나려면 정신이 큰 만큼 몸도 발전할 수 있게 더 많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인간은 정신이 지배하는 동물이다. 결국 정신이 가는 대로 몸이 가게 돼 있다. 따라서 슬럼프는 좋은 신호다. 슬럼프가 왔다는 것은 이제 한 단계 발전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디자이너들이 슬럼프에 빠지면 계속 작업하라고, 다른 생각하지 말고 디자인에 더욱 집중하라고 밀어붙인다. 우울하다고 치우지 말고 끝장을 보라고 압박한다. 나도 그렇다. 무기력해지고 다 포기하고 싶을 때 오히려 더 많이 끌어안고 작업에 몰두한다.
디자이너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다.
각 분야에서 얻은 노하우가 있다면.
처음에는 완전히 다른 분야라고 생각했지만 기업을 운영한 지 15년 가까이 돼가는 지금 생각해보면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더 많다. 일단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 디자이너가 트렌드나 다른 사람의 취향은 고려하지 않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려면 상업 디자인이 아닌 순수 미술을 해야 한다. 사업가는 더욱 그렇다. 사업을 하다 보면 무수한 갑을 관계가 형성된다. 자기 잘났다고 목에 힘주는 것은 망하는 지름길이다. 직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자존심은 스스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남이 세워주는 것이다. 직원들에게 지시하고 호통 친다고 사장 자존심이 서지 않는다. 또 다른 공통점은 신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뢰는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 오래 변함없이 지속해야 얻을 수 있다. 디자인도, 비즈니스도 오랜 기간 꾸준히 유지해야 신뢰가 확보된다.
좋은 디자인은 오래, 많이, 비싸게 팔리는 것이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준다거나 잘 어울린다거나 등등 다양한 이유를 갖다댈 수 있겠지만 결국은 오래, 많이, 비싸게 팔려야 좋은 디자인이다. 정말 좋은 디자인인데 안 팔릴 수도 있다. 이것은 비즈니스 영역이다. 디자인이라는 하나의 요소 외에 다른 요소들이 뒷받침돼야 한다. 구슬을 꿰고 연결해서 가치를 높이는 작업, 이것이 비즈니스다.
요즘은 독특한 디자인 하나 만들어내는 것보다 브랜드를 디자인하고 잘 관리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록새록 깨닫고 있다. 샤넬을 보자. 샤넬 디자인이 예뻐서 사는 사람이 많을까, 브랜드를 보고 사는 사람이 많을까. 디자인은 브랜드를 구성하는 한 요소일 뿐 궁극적으로는 브랜드를 디자인해야 한다. 좀 더 장기적으로 접근해야 할 문제다.
디자인 측면에서 대한민국의 경쟁력은 어느 수준인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디자인은 어떤 제품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한 부속품에 불과했다. 오늘날 디자인은 비즈니스의 본질이자 제품의 본질이다. 어떤 제품을 규정하는 정체성이 곧 디자인이기도 하다. 디자인을 무시하면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는 시대다. 그리고 그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이제까지는 디자인 및 기타 요소들이 서로 더하기의 관계였다면 지금은 곱하기의 관계다. 하나가 제로(0)면 나머지 다른 부분에서 아무리 잘해도 결국 결과는 0이 되고 만다. 많은 경영자들이 이 점을 깨닫고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며 투자를 늘리는 현상은 매우 긍정적이다.
앞으로 한국의 디자인은 더욱 발전할 것이다. 여러 가지 요소들이 우리나라 디자인을 끌어올리고 있다. 일단 국민 수 대비 디자인 전공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한국이다. 대학교 수 대비 디자인 관련 학과가 가장 많은 나라도 한국이다. 미대 가려고 중학교 때부터 학원 다니면서 그림을 배우는 나라도 우리나라뿐이다. 양에서 질이 나온다고 하지 않았나. 이렇게 배출되는 인재들이 당장은 디자인이나 미술 분야에서 일하지 않더라도 국가 전체적으로 디자인적 원동력을 가져오는 자산이 될 것이다. 현재 젊은 부모들이 키우는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부모로부터 디자인적 감각을 익히고 있다. 요즘 젊은 부모들의 감각이 얼마나 좋은지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수준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 봐도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처럼 옷 잘 입고 스타일 좋은 여성들을 만나기 어렵다. 국가 전체적으로 디자인적 내공이 깊어지고 있다는 증거다. 하나 더, 요즘 젊은이들은 문화적·민족적 콤플렉스가 없다. 불과 10∼20년 전만 해도 한국이나 한글에 대해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 드물었다. 한국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존재감이 약했다. 지금은 다르다. 젊은 세대 사이에 우리나라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굉장하다. 이런 분위기는 좋은 디자인이 꽃필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된다. 이런 요소들이 결합해 앞으로 10년 안에 한국 디자인이 세계적으로 인정받을 날이 올 것이다. 기업에 있는 분들이 이런 흐름을 인지하고 비즈니스에 잘 활용한다면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최한나 기자 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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