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서울대 CFO 전략과정 Case Study 15: 대성전기의 공급망 관리
편집자주
DBR이 서울대 경영대학과 함께 서울대의 임원 교육 과정(주임교수 황이석)인 ‘서울대 CFO 전략과정’의 최신 경영 사례들을 연재합니다. 국내외 기업의 임원 출신들이 대거 포진하고 있는 서울대 CFO 과정의 교육생들은 총 6개월의 교육기간 중 각자 회사에서 겪은 경험과 강의를 통해 배운 지식을 접목, 자사의 경영 사례들을 공유합니다. 이때 발표된 사례 중 한국 기업에 도움을 줄 만한 내용을 엄선해 DBR 독자들에게 전달합니다. 기업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는 생생한 사례들이 가득 담긴 이 코너를 통해 기업 경영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통찰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박세준(고려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속이 탔다. 쉴 새 없이 전화벨이 울렸다. 자정까지 약속한 물량을 공급하지 못하면 라인이 몇 개나 설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 라인이 하나 설 때마다 1분당 100만 원씩 패널티가 붙는다. 안 되겠다. 도저히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만 있을 수가 없다. 황재구 생산관리팀 부장은 협력사가 있는 인천으로 직접 차를 몰았다. 현장은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 쉬는 기계가 한 대도 없었다. 직원들 모두 달라붙어 만들며 나르느라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황 부장도 팔을 걷었다. 상자가 채워지기 시작했다. 바닥에 쌓을 새도 없이 대기 중이던 용차에 실렸다. 상자들을 가득 실은 용차는 곧장 시동을 걸었다. 울산행이었다.
“매일이 전쟁이었다.” 황 부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1년 만에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단다. 2009년 하반기까지만 해도 뚝뚝 떨어지는 매출을 손놓고 보고 있어야 했는데 2010년 봄부터 주문이 밀려들더니 혹시 시간 안에 못 맞출까 마음 졸이는 날들이 그해 내내 이어졌다는 얘기다. 아울러 이 기간은 대성전기가 물류 체계를 체계적으로 정비해 발주 정보에 의존하던 후행 생산 체계에서 스스로의 생산 계획과 재고 관리를 통한 선행 생산 체계로 탈바꿈한 혁신의 시기이기도 했다. 급변하는 주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허둥대던 위기의 날들은 대대적인 물류 체계 개편을 통해 정확하고 신속한 입출고 시스템을 갖추며 핵심 경쟁력을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 대성전기에서 시행한 물류 혁신 과정을 박찬성 경영지원본부장(상무) 및 황재구 부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자세히 살폈다.
LS로의 인수, 혁신의 발판
대성전기가 LS에 인수된 것은 2008년이다. LS는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기 위해 기존에 보유하던 전기·전자·전력 부문 기술과 연관성이 높은 자동차부품업체 인수를 추진했다. 대성전기가 대상이 됐다. LS는 대성전기가 보유하고 있던 각종 기술과 현대·기아차의 1차 협력사로 일정 수준 이상의 시장을 확보하고 있는 점을 높이 샀다.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인수 직후 금융위기가 불거졌다. 자동차시장이 크게 위축됐다. 부품업체가 직격탄을 맞았다. 수주 물량이 없어 주 4일 근무를 해야 할 정도였다. 인수 후 생긴 제약들도 걸림돌이 됐다. 든든한 모기업을 확보한 것은 이점이었지만 새로 받게 된 규제들이 많았다. 기업 분류상 대기업 그룹에 속하게 되면서 채권기일이 120일로 늘어났다. 인수 전까지만 해도 현대·기아차를 포함한 고객사 대부분이 대금을 현금으로 줬지만 2009년 1월부터는 120일짜리 어음으로 주기 시작했다. 최장 150일까지 가능하던 매입대금 지급은 60일로 단축됐다. 이전에는 구매한 물품 대금을 구매 후 150일 안에만 지급하면 됐는데 이 기간이 60일로 짧아진 것이다. 다시 말해 받을 돈은 현금 아닌 어음으로 들어오면서 늦어지고, 줘야 할 돈은 이전보다 짧은 만기로 돌아왔다. 인수 직전 월 300억∼350억 원을 기록하던 매출이 계속 줄어들면서 2009년 1월 130억 원을 밑돌았다. 급기야 적자가 나기 시작했다.
변화가 필요했다. LS 산하로 편입되면서 새로 부임한 이철우 대표가 총대를 멨다. 이 대표는 원래 혁신에 관심이 많았다. “측정할 수 없으면 관리할 수 없다”고 강조하던 그였다. LS산전에서도 경영혁신부문장(CIO)을 맡은 바 있던 그는 취임하면서부터 근본적인 혁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특히 IT 인프라가 튼튼하지 않으면 결코 경영 수준을 올릴 수 없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상황 악화에 대응하기 위해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의지를 강하게 보였다.
재무구조가 나빠졌을 때 상황을 개선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비용을 절감하거나 매출을 늘리는 것이다. 대성전기도 두 가지 방향으로 전략을 짰다. 현재 지출하는 비용을 전면적으로 검토해서 최대한 줄이고 매출을 늘리기 위한 노력을 다각도로 기울인다는 목표였다.
우선 비용 절감이다. 이를 위해 대성전기는 PI(Process Innovation)팀을 신설했다. 경영 인프라부터 다시 정비하자는 의도였다. 협력사 120여 곳의 정보를 제대로 공유하기 위해 Web-Van 시스템을 구축했다. 주문과 재고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좀 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다. ERP(Enterprise Resource Planning) 시스템의 업그레이드가 이어졌다. 기존에 갖고 있던 ERP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여기서 수집되는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시각화할 수 있는 도구를 새로 깔았다. 임직원이 재무나 영업, 생산지표들을 손쉽게 파악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이 작업에만 2009년 한 해를 모두 썼다. 기존에 사용하던 시스템을 보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면적으로 다시 구축했기 때문이다. 박 상무는 “당시만 해도 어디서 비용이 새는지 파악하고 관리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시스템을 개편했는데 이것이 훗날 이렇게 크게 도움이 될지 몰랐다”고 말했다.
다음은 매출 증대다. 자동차부품산업은 전형적인 수주 산업이다. 지금 당장 주문을 받는다고 재무구조가 개선되지 않는다. 지금 확보한 물량은 2년 후에야 재무제표에 반영된다. 따라서 현재의 재무제표를 개선하기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없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대성전기는 미래의 씨앗을 뿌려둔다는 생각으로 매출원을 다각화하기 위해 애썼다. 해외사업본부를 만들어 아우디와 닛산, 크라이슬러 등 신규 해외 고객사와 접촉을 시작했고, 중국에도 사업본부를 신설해 현지 내수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기존에 납품해오던 부품 대신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고 제작하기 위해 전장사업본부도 새로 세웠다. 투자비용을 감수할 만큼 여력이 충분하지 않은 시기였지만 박 상무는 “당장 이익이 안 된다고 손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며 “연이은 적자에 회사 분위기가 침체돼 있었지만 그럴수록 하나라도 더 따내기 위해 뛰던 때”라고 회상했다.
상황의 급변, 그리고 새로운 위기
상황은 생각보다 빨리 개선됐다. 아니, 오히려 기대 이상으로 좋아졌다. 문제는 너무 빠르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달라졌다는 데 있었다. 2010년으로 넘어가면서 잔뜩 침체돼 있던 글로벌 자동차시장에 봄바람이 불었다. 특히 최대 고객사인 현대·기아차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자동차 시장이 재편되면서 기존 승자가 쓰러지고 새로운 강자가 도약하던 시기였다. 현대·기아차가 글로벌 시장점유율을 높여가면서 부품 주문량이 급속도로 증가했다. 2009년부터 새로 확보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해외 고객사로부터도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아웃소싱 다각화에 나섰던 선진업체들에 현대·기아차의 주요 협력사인 대성전기는 믿을 만한 거래처였다.
국내외 주문이 밀려들면서 출하량이 2009년 대비 2배로 뛰었다. 밤새 공장을 돌려도 물량을 대기가 어려웠다. 긴급 운송을 사용하거나 마감을 넘기는 날이 늘었다. 단지 제작 속도가 주문받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다면 생산 능력을 키우는 일에만 주력했을 것이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자동차 한 대를 만드는 데 필요한 부품은 약 2만5000개. 완성차업체들은 수백, 수천 곳의 협력사를 통해 필요 부품을 조달한다. 문제는 1차 협력사가 모든 부품을 자체 생산하지 않고 2차, 3차 협력사를 통해 조달한다는 데서 시작된다. 현대차와 거래하는 1차 협력사는 300∼400곳으로 알려진다. 이들과 거래하는 2차, 3차 협력사가 5000여 곳, 4차 이상 협력사는 수만 개에 달한다. 물고 물리는 피라미드 구조다. 무엇보다도 처음의 주문이 이중삼중 겹겹이 쌓인 단계를 거치며 수시로 달라지고 조정되는 것이 문제다. 중간에서 어느 한 곳만 수요 예측을 제대로 하지 못하거나 필요 부품이 예상보다 많거나 적어지면 연쇄적으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어느 한 곳에서 밀리면 줄줄이 멈춰 서야 하고 인력풀이 뻔하기 때문에 일손이 달리면 이곳저곳에서 아우성이 터진다. 완성차의 생산계획을 미리 받아 어느 정도 생산 물량을 예측하기는 하지만 소비자의 옵션 선택에 따라, 또는 시장 트렌드나 외부 환경 변화에 따라 실제 주문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대성전기가 다루는 부품들을 작업별로 분류하면 플라스틱을 사출기로 찍어내는 사출 작업과 철 관련 작업을 하는 프레스 가공, 전자회로와 관련된 PVC 작업 등으로 나뉜다. 대성전기와 직접 거래하는 협력사는 120여 개. 작업마다 다시 수십, 수백 개 협력사가 따라붙기 때문에 이들까지 합하면 부품마다 각각의 생태계가 형성된다. 부품에 따라 반제품을 가져오거나 완제품을 공급하는 업체들이 있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운반하는 배달업체나 이곳저곳에서 부품을 받아 조립만 하는 업체 등이 이 생태계에 속한다. 워낙 많고 다양한 부품들이 공존하다보니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JIT(Just In Time)라는 경구가 자동차업계의 핵심 목표인 데서 알 수 있듯 제시간에 필요한 모든 부품이 제자리에 있지 않으면 단 한 대의 완성차도 만들어질 수 없다. 박 상무는 “매출이 어느 정도 규모가 되고 나름의 체계를 갖추고 있는 곳은 그나마 낫지만 덩치가 작은 중소업체들은 감과 눈치로 물량을 가감해 주문을 낸다”며 “3∼4단계를 거치면서 단계마다 해당 업체들의 사정이 반영되고 원래의 주문이 계속 변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주문량이 갑작스럽게 늘어나면서 주먹구구로 예측하고 생산하는 기존 관행의 문제점이 더욱 두드러졌다. 발주에 따라 생산량이 요동쳤고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으며 시간 안에 물량을 대지 못할까봐 밤샘 작업하는 날이 늘었다. 늘어난 주문량에 인력이 부족해지면서 여기저기서 인력을 구하지 못해 난리였다. 때 마침 안산 일대에 외국인 근로자 단속이 돌면서 인력난이 한층 심해지기도 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류 혁신활동에 시동이 걸린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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