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가 지루하다는 편견 깨고
굿즈-숏폼으로 팬 일상 파고들다
Article at a Glance2년 연속 1000만 관중 시대를 연 KBO 성공 요인의 핵심은 관중 감소와 젊은 세대 이탈이라는 위기의식을 출발점으로 삼아 경기 운영 및 콘텐츠, IP 비즈니스 전반을 팬 관점에서 전면 재설계했다는 점이다. KBO는 경기 몰입도를 높이기 위한 ‘피치클락’과 공정성에 민감한 젊은 세대를 고려한 ‘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ABS) 도입’ 등 야구팬들의 요구를 반영해 경기 운영 제도를 혁신했다. 구장 밖에서는 마케팅 자회사 KBOP를 중심으로 야구 IP 비즈니스를 일상 소비 영역으로 확장했다. 단순히 구단 로고를 활용하는 것을 넘어 오덴세, 케이스티파이 등 디자인과 품질이 검증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상품력을 강화해 야구가 팬들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했다. 이 밖에 뉴미디어 중계권 계약 과정에서 숏폼 영상 등 2차 저작물 활용 조건을 고수하며 ‘디지털 빗장’을 풀어 경기 영상이 다양한 플랫폼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구조를 구축해 한국 프로야구의 저변을 넓혔다.
2025년 10월 30일 프로야구 KBO 리그 한국시리즈 4차전이 열린 대전 중구에 위치한 대전한화생명볼파크. 8회 말 한화이글스의 공격이 시작되자 “최!강!한!화!” 구호가 경기장을 흔들었다. 1루 응원석에서는 주황색 깃발이 물결처럼 펄럭였고 한화이글스 팬들은 타월을 들어 올리며 응원의 열기를 더했다. 홈팀 한화이글스의 분위기가 한창 고조되던 중 분위기가 반전됐다. 9회 초 LG트윈스가 역전에 성공한 것이다. 3루 응원석에서 함성이 쏟아지며 LG트윈스 로고가 크게 박힌 유광 점퍼 차림의 팬들은 힘차게 응원가를 따라불렀다.
경기는 LG트윈스가 7대4 역전승을 거두며 마무리됐다. 이날 경기 결과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것은 구장을 가득 채운 야구팬들의 밀도였다. 구장에서 만난 한 외국인 관람객은 “메이저리그(MLB)와 월드 시리즈도 많이 봤지만 이렇게 모두가 노래하고 소리치며 응원하는 팬 문화는 처음”이라며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라 소름이 돋는다”고 말했다. 생후 10개월 된 아이를 안고 응원봉을 흔드는 20대 엄마, 구장 내 기념품 숍에서 굿즈를 고르는 초등학생 팬과 “야구장 올 때마다 살 게 늘어난다”고 말하는 40대 아빠까지. 야구장은 더 이상 특정 연령이나 성별의 공간이 아니었다. 구장 내 경험 자체가 관람의 이유가 되면서 야구장은 세대와 취향을 가로지르는 일상적 여가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이 같은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된다. KBO 리그는 2024년에 이어 2년 연속 1000만 관중을 돌파했다. 이는 단순한 흥행 반등을 넘어 프로야구가 ‘경기를 보는 스포츠’에서 ‘경험을 소비하는 산업’으로 전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성과다. 특히 한국 프로야구 리그를 총괄하는 한국야구위원회(KBO)는 투수와 타자, 포수의 준비 동작에 제한 시간을 두는 ‘피치클락’ 제도 도입 등 경기 시간 단축을 통한 관람 부담 완화, 선수와 구단 IP를 활용한 굿즈와 먹거리 상품 다양화, 경기 중계 영상을 숏폼 콘텐츠로 재가공해 디지털 플랫폼 전반으로 확산시키는 미디어 전략을 통해 야구를 복합 엔터테인먼트 산업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KBO는 어떻게 팬 경험을 혁신하며 한국 프로야구의 저변을 넓힐 수 있었을까. DBR이 KBO 관계자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관중 감소와 관람 환경 변화라는 위기의식을 혁신의 동력으로 삼아 1000만 관중 시대를 연 KBO의 성공 요인을 분석했다.
MLB 벤치마킹을 넘어 한국형 제도 혁신2022년 3월 KBO 제24대 총재로 취임한 허구연 총재가 진단한 한국 프로야구의 핵심 과제는 명확했다. 한국 프로야구가 생존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경기 운영의 틀을 넘어 하나의 스포츠 산업으로 도약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가 40년 넘게 야구 현장을 지키며 느낀 위기감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는 한국 프로야구가 일본의 NPB처럼 ‘경기 관리와 운영’ 중심의 리그에 머무르는 것을 경계하고 미국의 MLB처럼 흥행과 미디어, 팬 경험, 수익 구조를 유기적으로 확장하며 철저한 스포츠 산업 모델로 저변을 넓혀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야구 산업이 먼저 구조적 위기를 경험한 미국의 MLB를 중요한 참고 사례로 삼았다. 한때 미국에서 MLB는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판도가 바뀌었다. MLB가 NFL(미국 프로미식축구리그)에 1위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허 총재는 이 변화를 단순한 인기 순위 변동이 아닌 야구 산업 전반에 울린 경고음으로 해석했다. 한국 프로야구 역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기점으로 야구 시청률이 하락하고 관중 수는 줄어들고 있었다. 특히 젊은 세대가 야구를 보지 않고 야구장을 찾지 않는 현상이 뚜렷해졌다는 점은 심각한 위기의식으로 다가왔다. 이는 경기력이나 스타 선수의 문제가 아닌 야구라는 콘텐츠가 시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신호였다.
이런 문제의식 아래 KBO는 경기 운영 전반을 팬 경험 관점에서 재점검하기 시작했다. 프로야구가 직면한 문제 중 하나는 경기 시간이 지나치게 길어 ‘지루한 스포츠’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MLB는 평균 경기 시간을 약 2시간 40분대로 낮추는 것을 목표로 투구 시간을 제한하는 ‘피치클락’ 제도를 도입했다. 2023 시즌부터 MLB는 주자 없을 때 15초, 주자가 있을 때 투수가 20초 이내에 투구 동작을 시작하도록 규정했고 이듬해에는 이를 18초로 단축했다.
KBO 역시 경기가 늘어지면 젊은 팬들이 떠난다는 MLB의 위기의식을 공유하며 피치클락 도입을 추진했다. 목표는 불필요한 시간을 줄여 경기 몰입도를 높이는 것이었다. 허 총재는 “야구장에 온 팬들은 노래 부르고 먹으면서 3시간 넘게 놀아도 괜찮지만 TV 시청자들은 지루하면 채널을 돌린다”며 “속도감 있고 박진감 넘치는 것을 선호하는 젊은 세대를 공략하려면 변화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제도 도입을 앞두고 선수들 사이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투수에게는 멘탈 관리와 루틴이 중요한데 갑작스러운 시간 제한이 익숙한 투구 리듬을 깨 부상 위험이나 경기력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KBO는 MLB를 비롯해 국제 대회 전반에 걸쳐 경기 템포를 높이는 흐름이 확산되고 있는 만큼 한국 야구 역시 장기적으로는 이 기준에 적응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시대적 흐름을 외면하기보다 선수들이 점진적으로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제도를 연착륙시키는 것이 핵심 과제였다.
이 같은 인식 아래 KBO는 MLB의 규칙을 그대로 가져오기보다 한국 실정에 맞게 수정해 도입했다. 이 과정에서 KBO 리그 맞춤형 ‘K-피치클락’을 위한 TF를 구성해 감독, 코치, 선수 등 리그 구성원을 비롯한 야구계 각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한국형 피치클락의 성공적인 운영을 위해서는 투구 시간, 타석 간 시간 등을 KBO 리그에 가장 적합한 시간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그 결과, 선수들이 적응할 수 있도록 투구 시간을 MLB보다 조금 더 여유 있게 설정했으며 점진적으로 시간을 줄여 나가는 방식을 택했다. 2025년 시즌부터 도입된 한국형 피치클락은 주자 없을 때 20초, 주자 있을 때는 25초로 적용됐으며 올해 시즌부터는 각각 2초씩 당겨질 예정이다.
한편 KBO는 MLB를 벤치마킹하는 것에서 나아가 한국 프로야구가 직면한 문제에 더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 선제적인 혁신을 단행하기도 했다. 바로 1군 리그 전면 ‘자동 투구 판정 시스템(Automated Ball-Strike System·ABS)’ 도입이다. MLB조차 망설이던 이 기술을 KBO가 세계 최초로 도입하게 된 배경에는 판정의 정확성과 공정성을 원하는 팬들의 요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심판 판정에 대한 끊임없는 불신이 제기돼왔다. 경기 종료 후 데이터를 분석해 심판별 판정 성향을 비교하는 웹사이트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실제로 시속 150㎞가 넘는 강속구를 인간의 눈으로 100% 정확하게 판정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KBO의 자체 데이터 분석 결과, 2023년 기준 경기당 약 14개의 오심이 발생하고 있었다. 이는 전체 투구 중 판정이 이뤄지는 투구의 약 8~9%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한인국 KBO 국제팀장은 “이런 오심이 승부처에서 발생할 경우 경기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거나 KBO 리그 전체의 신뢰도를 훼손할 수 있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다”며 “이런 문제를 구조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ABS 도입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ABS 도입을 위한 내부 논의 과정에서는 인간 심판이 판정하되 이의가 있을 때만 기계를 확인하는 ‘챌린지 시스템’ 방식이 제안됐다. 그러나 KBO는 ‘모든 투구의 자동 판정’을 택했다. 공정성이라는 가치에 민감한 젊은 야구팬들의 정서를 고려한 결단이었다. 한 팀장은 “공정성을 최우선의 가치로 본다면 선별적으로 할 이유가 없었다”며 “모든 투구에 자동 판정 시스템을 동일하게 적용하는 것이 팬들이 기대하는 공정성에 부합한다고 봤다”고 말했다.
ABS의 1군 리그 전면 도입 결정 이후 가장 큰 난관은 ‘스트라이크 존 설정’이었다. 야구 규칙에는 스트라이크 존에 대한 정의가 있지만 이를 기계에 입력할 구체적인 수치로 환산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수십 년간 인간 심판이 적용해 온 실제 스트라이크 존과 규칙서상의 존 사이에는 괴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2020년부터 2군 퓨처스리그에서 ABS 시범 운영을 하며 데이터를 축적해온 KBO는 현장과의 이질감을 최소화하기 위해 인간 심판의 스트라이크 존 평균을 찾기 시작했다. 2023년 한 해 동안 볼을 스트라이크로 판정한 경우 등 명백한 오심을 제외하고 인간 심판들의 판정 데이터를 역추적해 평균 스트라이크 존을 도출했다. 그 결과, 선수 신장의 상단 56.35%, 하단 27.64%라는 ‘한국형 스트라이크 존’ 기준을 확립했다. 규칙서의 모호함을 데이터로 구체화해 현장이 납득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아낸 것이다.제도 변경 내용을 확정한 후 실제 적용을 앞두고 일부 선수 및 감독은 변화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러나 KBO는 “무조건 따라오라”고 하기보다 제도 도입의 당위성과 적용 방식을 충분히 설명하려 했다. KBO 리그운영팀은 시즌 개막 전 10개 구단의 스프링캠프를 직접 찾아가 선수들을 만났다. 제도의 취지와 작동 원리를 설명하고 실제 판정 화면을 시연하며 선수들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왔다. 단순히 서면 안내에 그치지 않고 현장에서 소통하며 제도의 수용성을 높인 것이다.
2024년 시즌부터 1군 리그에 전면 도입된 ABS의 효과는 즉각적이었다. 판정 시비가 잦아들면서 심판 오심을 비판하던 웹사이트는 운영을 중단했고 야구팬 대상 설문조사에서도 긍정적인 피드백이 쏟아졌다. KBO가 2024년 리그 관람객 및 일반 야구팬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해 8000명을 대상으로 온·오프라인 팬 성향 조사를 진행한 결과, 응답자의 88.7%가 ABS를 2024년 새로 도입된 제도 중 KBO 리그 운영에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 제도로 꼽았다. 또한 응답자의 86.4%가 ABS, 피치클락 같은 새로운 제도 도입이 경기 관람을 유인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답했다.
제도는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해 지속적으로 보완하고 있다. “너무 높아 칠 수 없는 공들이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는다”는 선수 및 현장 관계자 의견을 반영해 KBO는 2025년 시즌 ABS 스트라이크 존 비율을 선수 신장의 상단 55.75%, 하단 27.04%로 조정했다. 아울러 팬들의 요구도 적극적으로 수렴해 제도 혁신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다. MLB가 아직 도입하지 않은 ‘체크 스윙(Check Swing)’ 판독을 KBO가 전격 도입한 것이 단적인 예다. ABS가 ‘스트라이크 존’이라는 공정성 논란의 불씨를 잡자 팬들의 눈길이 자연스럽게 또 다른 회색지대인 체크 스윙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타자가 투수의 투구를 타격하려는 의도로 배트를 휘두르는 동작을 판정하는 체크 스윙은 야구 규칙상 명확한 기준이 없어 심판의 주관적 판단에 의존해 온 대표적인 영역이었다. KBO는 체크 스윙에 있어 공정성을 요구하는 팬들의 요구를 반영해 ‘배트 끝의 각도가 타자석 기준 90도를 초과했을 때 스윙으로 판정한다’는 명확한 기준을 마련하고 각 구장에 이를 판독할 수 있는 전용 카메라를 설치했다. ABS와 달리 체크 스윙은 구단의 요청이 있을 때만 확인하는 비디오 판독(챌린지) 방식으로 운영된다. 이처럼 과거의 규칙 변경이 심판이나 선수 등 현장의 편의를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이제 KBO는 ‘납득할 수 있는 공정성’을 요구하는 야구팬들의 기준에 맞춰 제도를 혁신하는 팬 중심 거버넌스로 탈바꿈하고 있다.
‘숏폼 빗장’ 풀어 디지털 암흑기 극복주인공 되길 거부한 KBO의 콘텐츠 전략ABS가 전면 도입된 2024년은 KBO의 미디어 전략 측면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KBO는 2024년 시즌 개막을 앞두고 유무선 중계방송권 계약을 논의하고 있었다. 당시 허 총재의 강력한 의지와 함께 KBO는 협상 테이블에서 하나의 조건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바로 경기 관련 숏폼 영상 등 2차 저작물을 허용하는 것이었다.
지난 2019년부터 5년간 이어진 네이버, 카카오, KT, LG유플러스, SK브로드밴드 등 통신·포털 컨소시엄의 뉴미디어 중계 구조하에서 KBO 리그는 디지털 암흑기를 겪어야 했다. 포털 사이트는 유튜브를 경쟁 플랫폼으로 간주했고, 거액의 중계권료를 지불한 만큼 경기 영상을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에 무료로 유통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 구단은 소속 선수가 끝내기 홈런을 쳐도 구단 공식 유튜브 채널에 해당 장면을 올릴 수 없었고, 팬들은 환호하는 관중석이나 더그아웃 영상만 볼 수 있었다. 리그 주관사인 KBO조차 경기 영상을 단 1초도 쓸 수 없어 KBO 공식 유튜브 구독자 수는 수년간 8만 명 수준에 머물렀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승부처는 2024년 중계권 경쟁 입찰이었다. KBO는 협상 테이블에서 “지금 시대에 경기 영상의 다양한 활용을 막는 것은 시대적 흐름에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티빙(TVING)은 KBO와 야구팬들의 요구를 전격 수용했다. 40초 미만 분량의 경기 관련 숏폼 영상 제작을 허용한 것이다. 미국 NBA가 숏폼을 전면 개방해 젊은 층을 유입시킨 사례를 벤치마킹한 이 전략은 적중했다. 티빙과의 중계권 계약으로 ‘디지털 빗장’이 풀리자마자 야구 콘텐츠가 소셜미디어를 뒤덮기 시작했다. 팬들은 단순히 야구 경기를 시청하는 것을 넘어 재미있는 장면을 자르고 편집해 움짤과 쇼츠로 만들어 퍼날랐다. KBO가 돈 한 푼 쓰지 않고도 수만 명의 마케터가 24시간 리그를 홍보해 주는 효과를 낳은 셈이다.KBO 역시 콘텐츠를 통한 브랜드 전략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리그 운영 주체인 KBO에 대한 팬덤이 없는 건 오랜 기간 마주한 냉혹한 현실이었다. 과거 KBO 홈페이지 게시판은 일명 ‘해우소’로 불렸다. 서둘러 경기 우천 취소를 하면 “왜 벌써 취소하냐”고 항의하고, 늦게 하면 “왜 기다리게 하냐”고 비난하는, 야구팬들의 모든 분노가 향하는 종착지였다. 특정 구단이 공격을 받으면 해당 구단 팬들이 적극적으로 방어에 나서지만 KBO는 누구도 변호해주지 않는 고립된 브랜드였다.
KBO는 운영 기관으로서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인공이 되는 걸 과감히 포기했다. KBO가 택한 건 야구 경기가 가진 힘과 현장의 진정성을 활용해 리그의 본질인 경기 자체를 콘텐츠 전면에 내세우는 전략이었다. KBO의 마케팅 자회사인 KBOP의 하지헌 디지털 마케팅팀장은 “KBO가 일을 잘한다’는 것을 알리는 자기 PR 중심의 콘텐츠는 팬들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며 “’KBO를 보게 하지 말고 그냥 경기를 보게 하자’는 생각으로 경기 위주의 콘텐츠 제작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KBO 공식 유튜브 채널 콘텐츠의 90%는 경기 중계 영상이다. 구단 유튜브가 더그아웃 비하인드나 선수들의 일상 모습을 담는다면 KBO는 철저히 경기 내용에 집중한다. 이는 10개 구단을 공평하게 다뤄야 하는 운영 조직의 한계 때문도 있지만 KBO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중계권을 십분 활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경기 자체가 가진 힘과 현장의 생생함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콘텐츠는 바로 경기 해설을 제거한 ‘무해설 영상’이다. KBOP 디지털 마케팅팀은 방송사로부터 중계 회선을 받을 때 경기 해설 오디오가 분리된 채널을 받을 수 있다는 점을 콘텐츠 아이디어로 연결했다. 하 팀장은 “‘해설 없이 현장의 타격음과 팬들의 환호성만 남기면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끝내기 홈런 같은 극적인 순간을 해설 없이 편집하는 실험적인 콘텐츠를 제작했다”고 말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배트에 공이 맞는 타격 소리와 오직 관중의 함성만 들리는 무해설 영상은 팬들에게 마치 야구장에 직접 와 있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을 선사했다. KBO 유튜브에서 무해설 영상이 큰 인기를 끌자 뉴미디어 중계권사인 티빙에서도 이를 벤치마킹해 무해설 현장음 중계 기능을 정식으로 도입했다. KBO의 새로운 콘텐츠 시도가 중계 서비스 혁신으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단순 홍보 채널이 아닌 경기 영상을 통해 리그의 감동을 전달하는 데 집중한 콘텐츠 전략이 먹히면서 KBO의 소셜미디어는 ‘스포츠 콘텐츠 플랫폼’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2024년 초 티빙 중계권 계약 전 8만 명 수준이었던 KBO 공식 유튜브 구독자 수는 2026년 1월 기준 41만 명으로 늘었고 지난해 10월 기준 KBO 공식 인스타그램 계정 누적 조회수는 16억7000만 회를 기록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KBO의 콘텐츠 철학과 전략도 구체화됐다. KBO의 대표적인 콘텐츠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브랜드 자산 보호를 위한 ‘긍정의 편집학’KBO 공식 소셜미디어 채널에는 선수들의 실책 영상이 올라오지 않는다. 방송사나 일반 유튜버들이 조회수를 위해 황당한 실책 장면을 부각하는 경우가 흔하지만 KBO는 이를 철저히 배제한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원칙이 아니다. KBO는 ‘선수는 리그의 자산’이라는 명확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 하 팀장은 “실책 영상이 선수에 대한 비난과 조롱을 유발하고 이는 결국 리그 전체의 브랜드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고 말한다. KBO 채널을 비난의 장이 아닌 감동과 환호의 장으로 만들며 팬들이 야구를 긍정적으로 소비하고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KBO의 콘텐츠 철학이다. 이는 ‘팬 없는 조직’인 KBO가 스스로 리그의 자산을 지키기 위해 택한 고도의 브랜드 관리 전략이기도 하다.
2. “고화질로, 빠르게, 최대한 많이”KBO 콘텐츠를 제작하는 디지털 마케팅팀의 운영 방식은 ‘콘텐츠 공장’에 가깝다. 핵심은 ‘속도와 빈도’다. 매일 콘텐츠 물량 공세를 이어가는 것이 핵심 전략이다. KBOP 디지털 마케팅팀은 정규 시즌 중 하루 8~13개 영상을 쏟아낸다. 경기 중 발생하는 주요 장면을 실시간으로 편집해 섬네일과 제목만 달아 즉시 업로드한다. ‘정제된 퀄리티보다 확산되는 타이밍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인스타그램 그리드(Grid)를 맞춰 예쁘게 올리는 디자인적 규칙이나 업로드 순서를 정하지 않고 터질 것 같은 영상은 편집해 즉시 올린다.이런 물량 공세의 목적은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을 타기 위함이다. 실제로 KBO 인스타그램 조회수의 60~70%는 채널 비구독자에게서 발생하고 있는데 이는 끊임없이 영상을 공급해 알고리즘 파도에 태운 결과다. 조회수의 상당 비율이 비구독자층에서 나온다는 점을 고려해 디지털 마케팅팀은 야구 룰을 잘 모르는 사람의 관심을 끌 수 있도록 최근 밈(Meme)을 숏폼 제작에 적극 활용한다. 예를 들어 네티즌들이 가수 카더가든을 지칭할 때 이름 음절 수(4글자)만 맞으면 엉뚱한 단어로 부르는 밈을 활용해 시구자로 나선 카더가든의 이름이 구장 전광판에서 ‘나가거든, 오마카세, 가던말던, 카레여왕, 기름가득’ 등으로 빠르게 바뀌는 영상을 편집해 업로드했다. 구장에서의 재밌는 순간을 담은 3초짜리 짧은 영상은 인스타그램 조회수 100만 회 이상을 기록했다.
실시간 콘텐츠 업로드와 물량 공세가 가능할 수 있도록 디지털 마케팅팀은 ‘경기 대응 조직’에 가깝게 운영되고 있다. 팀장 포함 총 6명이 움직이는 디지털 마케팅팀의 실무자들은 교대근무를 서며 채널 운영을 책임지고 있다. 시즌 기간 야구 경기는 거의 매일 열리고, 경기 종료 시점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반적인 ‘9 to 6’ 근무 체계로는 대응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한 명씩 교대로 오후 2시에 출근해 경기 종료 시점까지 중계 화면만을 집중 모니터링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경기 흐름 속에서 바이럴 콘텐츠가 될 만한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기 위해서다. 하 팀장은 “기존에는 네이버 블로그, 카카오 등의 채널도 운영했지만 선택과 집중 전략으로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에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며 “대신 콘텐츠 생산 속도와 업로드 양을 극대화해 소수 인력으로도 최대 효율을 낼 수 있는 운영 구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3. 태깅 시스템으로 콘텐츠 자산 구축KBO 자체 미디어 센터를 통한 태깅 시스템을 구축해 영상 자산도 체계적으로 관리해 나가고 있다. 과거 KBO 경기 영상의 아카이브 주도권은 리그 주관사인 KBO가 아닌 방송사에 있었다. KBO는 저작권자임에도 불구하고 과거 경기 영상을 쓰려면 방송사에 요청하거나 데이터가 유실돼 사용하지 못하는 등 ‘영상 주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구조였다. KBO는 미디어 환경의 변화 속에서 원천 소스를 쥐고 있어야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방송사로부터 아카이브 권한을 가져와 자체 미디어 센터를 구축하는 결단을 내렸다.
미디어 센터의 핵심은 단순 저장이 아닌 ‘데이터화’에 있다. KBO는 경기 중 발생하는 스트라이크, 볼, 파울, 타격 결과 등 투구 하나하나에 대한 기록과 선수별 기록을 영상에 타임코드로 심는 태깅(Tagging)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이 시스템은 디지털 콘텐츠 속도전의 ‘병참기지’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이대호 선수의 30호 홈런 장면’이 필요하다면 과거에는 수 시간 분량의 녹화 테이프를 돌려봐야 했지만 이제는 태그 검색 한 번으로 1초 만에 해당 클립을 추출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콘텐츠 제작 속도를 높이는 것은 물론 경기 영상 활용 권리를 판매해 수익화하고 아카이브된 경기 영상은 각 구단들의 전력 분석에도 활용되고 있다.
현재 KBO는 실시간 열리는 경기뿐만 아니라 과거 시즌 영상들까지 역순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태깅 작업을 진행 중이다. 이는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를 단순한 영상 파일에서 검색과 가공이 가능한 ‘디지털 자산’으로 변환시키는 과정이며 향후 야구팬들에게 더 풍부한 콘텐츠를 신속히 제공하기 위한 핵심 기반이 되고 있다.
야구가 일상에 스며들도록…KBOP의 마케팅 전략경기 중 뜨거운 응원 문화와 ‘바비큐 존’ ‘인피니티 풀’ 같은 구장 내 이색 체험 요소가 각 구단의 몫이라면 KBO의 역할은 구장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KBO는 구단이 하지 않는 혹은 할 수 없는 틈새 영역을 공략해 팬들의 일상을 파고들었다. 야구를 스포츠에서 매일 즐기는 엔터테인먼트로 확장시키고 있는 셈이다. KBO 마케팅 자회사인 KBOP가 팬들의 일상에 야구가 스며들 수 있도록 실행하고 있는 마케팅 전략은 다음과 같다.
1. “구단이 하지 않는 영역을 보완한다”KBOP의 상품화 전략 제1 원칙은 ‘구단이 하지 않는 영역을 공략해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각 구단은 이미 유니폼, 모자, 응원 도구 등 경기 관람에 필수적인 굿즈 시장을 꽉 잡고 있다. 여기서 KBOP가 똑같은 유니폼을 판다면 구단의 매출에 방해가 될 수 있기에 KBOP는 구단이 하지 않는 영역인 일상 소비재로 눈을 돌렸다. 때마침 ‘포켓몬 빵’의 성공으로 캐릭터 빵 열풍을 주도하던 SPC삼립 측에서 먼저 협업 제안을 했고 KBOP는 이를 야구가 없는 날에도 팬들의 일상에 스며들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SPC삼립과 손잡고 출시할 크보빵(KBO빵) 흥행 전략의 핵심은 ‘띠부씰’이었다. SPC삼립 측은 상품 기획 단계에서 각 구단 빵에 각 소속 선수 띠부씰만 넣자고 제안했다. 예를 들어 LG트윈스 빵에 LG 선수 띠부씰만 넣는 것이다. 그러나 KBOP 담당자는 오히려 “섞어야 팬들이 더 재밌어한다”며 랜덤 띠부씰을 밀어붙였다. 복권 긁는 심리와 수집 욕구를 자극한 고도의 계산이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나는 KIA 타이거즈 팬인데 왜 두산베어스 선수가 나와?”라고 불평하기보다 팬들은 자신이 원하는 선수 띠부씰을 얻기 위해 빵을 더 구매하고, 스티커를 서로 교환하는 일종의 놀이 문화를 형성했다. 실제로 야구장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서로 다른 팀 소속 선수의 띠부씰을 교환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순항하던 크보빵은 예상치 못한 암초를 만났다. 협업사인 SPC삼립 제빵공장에서 발생한 사망 사고와 그에 따른 대응이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것이다. 사고가 발생한 라인이 크보빵 생산 라인은 아니었지만 야구팬들의 시선은 싸늘했다.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우리가 사랑하는 선수들의 얼굴이 산재 기업의 이미지 세탁에 쓰이는 것에 반대한다”며 비판 여론이 형성되고 크보빵 불매 운동이 전개됐다. 일부 팬은 KBO 사옥 앞에서 트럭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크보빵 매출은 고공 행진 중이었지만 KBOP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KBOP 경영진은 SPC삼립 임원진과 수차례 미팅을 가졌다. “팬들이 정서적으로 불편해하는 사업을 지속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 아래 KBO는 야구팬들의 우려를 전달하며 판매 중단 의사를 전달했다. 2025년 시즌 개막을 기념해 출시한 크보빵이 흥행하며 가을 야구 시즌을 겨냥한 후속 상품 기획까지 이미 마무리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KBOP는 단기적인 수익보다 공정하고 깨끗한 야구 환경을 조성하는 ‘클린 베이스볼’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원칙을 택했다. 결국 SPC삼립 측도 이를 받아들였고 잘 팔리던 크보빵은 후속 제품 출시 없이 판매가 조기 종료됐다.
크보빵 사태는 KBOP 마케팅 전략에 ‘파트너사 리스크 관리’라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 과거에는 로열티 조건이 좋으면 계약을 맺었지만 이제는 파트너사의 사회적 평판과 윤리적 이슈까지 검토하게 됐다. 성승우 KBOP 마케팅팀장은 “이후에도 간혹 사회적 논란이 있었던 기업들의 협업 제안이 있었지만 아무리 수익성이 좋아도 팬 정서에 반한다고 판단되면 정중히 거절했다”며 “크보빵 사태를 계기로 컬래버 마케팅의 내부 기준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 IP를 넘어선 ‘상품력’ 강화과거 스포츠 굿즈 시장의 공식은 단순했다. 기성품에 구단 로고(Emblem)만 박으면 충성 팬들이 지갑을 열 것이라는 안일한 믿음이 지배했다. 하지만 KBOP 마케팅팀은 뼈아픈 실패를 통해 이 공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었다.
KBOP는 과거 한 업체와 협업해 구단 선글라스를 출시했다. 렌즈 전면을 촘촘한 구멍(Mesh) 형태로 만들고 그 위에 구단 로고를 입힌 선글라스였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지만 팬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를 통해 상품 그 자체의 심미성과 실용성이 담보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애정하는 구단의 로고가 박혀 있어도 팬들은 외면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후 KBOP는 상품력 강화에 주력했다. 구단 로고 플레이에서 벗어나 디테일한 디자인 요소에 신경 쓰며 상품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했다.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오덴세(Odense)와의 협업으로 제작한 텀블러가 좋은 예다. KBOP와 오덴세는 구단별 고유 색깔을 텀블러에 세련되게 구현하는 데 집중했다. 롯데 자이언츠의 경우 일반적인 빨간색이 아닌 구단 특유의 고급스러운 붉은 색감을 살려내려 애썼다. 화룡점정은 빨대 마개였다. 빨대 마개를 각 구단의 마스코트 모양으로 정교하게 제작해 디자인 포인트로 삼았다. 야구팬들이 제품을 볼 때 단순히 ‘로고 박힌 텀블러’가 아닌 ‘디자인이 예쁜데 구단 감성까지 담긴 텀블러’로 느끼게 만든 것이다.
코스메틱 브랜드 메디힐과의 협업 과정에서도 KBOP의 상품 기획력이 빛났다. 크보빵의 흥행 이후 메디힐을 비롯한 파트너사 대부분이 띠부씰을 KBO 협업 제품에 넣고 싶어 했다. 하지만 KBOP는 “매번 띠부씰을 포함시키면 팬들이 지겨워할 것”이라며 제동을 걸었다. 대신 코스메틱 브랜드의 특성을 살려 선수 얼굴 일러스트에 발그레한 볼터치를 입힌 키링을 만드는 쪽으로 협의했다. 성 팀장은 “띠부씰 대신 여성 팬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귀여운 키링을 증정품으로 제공했더니 예상보다 좋은 반응을 얻었다”고 말했다.
텀블러(오덴세), 화장품(메디힐) 등은 야구장에 가지 않는 날에도 매일 쓰는 물건들이다. 이처럼 KBOP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와의 협업과 상품력 강화에 주력하며 야구가 관람 스포츠를 넘어 팬들의 일상 전반에 녹아들어 소비되도록 유도하고 있다. 결국 KBOP의 마케팅 전략은 ‘야구가 담긴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 제안’으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3. 10개 구단의 균형 맞추는 ‘마이크로 조율’화려한 컬래버 성공 이면에는 10개 구단의 이해관계를 조율해야 하는 전쟁 같은 과정이 숨어 있다. KBOP 마케팅의 가장 큰 난관은 ‘10개 구단의 형평성을 맞추는 것’이다. 컬래버 마케팅 진행 과정에서 인기 구단은 “우리가 팬이 많으니 더 대우해달라”고 요구하고 상대적으로 팬이 적은 구단은 “우리도 인기 구단과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주장한다. 팬들 역시 타 구단 상품과 비교하며 “왜 우리 팀 디자인만 이러냐”고 불만을 제기하기 일쑤다. 이 팽팽한 줄다리기 속에서 KBOP는 치밀한 ‘마이크로 조율’ 전략을 통해 10개 구단의 균형을 맞추려 노력하고 있다.
일례로 해태제과와의 협업 과정에서 과자 ‘홈런볼’ 포장지에 구단 마스코트를 넣기로 결정했을 때 KBOP는 예상치 못한 난관에 직면했다. 어떤 구단 마스코트를 중앙에 배치하느냐가 문제였다. 각 구단은 자신의 마스코트가 포장지 중앙이나 가장 잘 보이는 자리에 배치되길 원했다. 다른 마스코트에 가려지거나 구석에 배치되는 것을 꺼렸다. 자칫하면 특정 구단 홀대 논란으로 번질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KBOP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묘수를 냈다. 홈런볼 포장지를 4가지 종류로 제작하는 것이었다. 단일 디자인을 고집하는 대신 각 구단 마스코트가 적어도 한 번쯤은 중앙 부분에 배치돼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4가지 포장지를 만들어 구단과 팬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디자인 퀄리티의 격차를 줄이는 것 역시 KBOP의 핵심 과제다. 팬들은 냉정하다. 예컨대 “한화 이글스 상품은 힙한데 우리 팀은 촌스럽다”는 비교가 시작되면 팬덤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구단들도 흔히 타 구단과 비교하며 “우리도 저런 퀄리티로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KBOP는 모든 구단이 만족할 만한 컬래버 상품의 ‘상향 평준화’를 위해 검증된 브랜드와의 동행을 전략으로 택했다. 자체적인 기획 역량만으로는 높아진 팬들의 눈높이를 맞추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고 이미 시장에서 디자인과 품질을 확실하게 검증받은 각 분야 1등 브랜드들의 역량을 빌려 협업 상품의 퀄리티를 높이는 전략이다. 케이스티파이, 오덴세, 무신사 같은 브랜드가 대표적이다. 또한 파트너 브랜드가 제품을 생산할 때 특정 인기 구단에만 힘을 쏟지 않도록 KBOP가 중간에서 디자인 가이드를 엄격하게 조율한다. 인기 구단과 비인기 구단의 디자인 퀄리티 차이가 나지 않도록 조정하고 삼성라이온즈처럼 로고 사용 규정이 까다로운 구단의 가이드를 파트너 브랜드에 명확히 전달해 차질을 막는 식이다.
KBOP가 브랜드 컬래버 한 번을 진행하려면 똑같은 메일을 10개 구단에 보내고, 10번의 피드백을 받아야 한다. 인기 구단은 판매량이 많으니 더 많은 로열티나 조건을 요구하고 비인기 구단은 판매량은 적어도 제품 구색은 똑같이 맞춰주길 원한다. 이 난해한 방정식을 푸는 열쇠는 결국 KBOP의 협상력이다. 성 팀장은 “KBOP는 파트너 브랜드로부터 더 높은 미니멈 개런티(최소 보장 금액)나 좋은 조건을 이끌어내는 데 주력하고 이를 바탕으로 ‘KBO가 좋은 협상 조건을 이끌어낼 테니 믿고 가 달라’며 구단들을 설득하고 있다”고 말했다. 결국 KBOP의 마케팅 성공 비결은 단순히 좋은 상품을 파는 것을 넘어 10개 구단의 니즈와 이익을 조율하고 설득하는 협상력인 셈이다.
야구 경험을 일상화하는 KBOP의 마케팅 전략은 실질적인 수익 구조 변화를 견인하고 있다. 과거 KBOP 매출에서 중계권료를 제외한 IP·컬래버 사업 비중은 1~2% 수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크보빵, 야구 카드, 각종 브랜드 컬래버가 연이어 흥행하며 현재 관련 분야의 매출 비중은 10% 이상으로 성장했다. KBO가 단순히 중계권료에 의존하는 관리 조직에서 벗어나 팬 경험을 수익으로 전환하는 콘텐츠·IP 비즈니스 주체로 진화하고 있는 셈이다.
장기적으로 KBO는 구단별로 분산돼 있는 예매 데이터와 고객 데이터를 통합해 팬 이해도를 높이고 MLB처럼 리그 차원의 통합 비즈니스를 구축하는 미래도 그리고 있다. 그 일환으로 리그 차원에서 통합 트래킹 데이터 구축을 장기 과제로 추진하고 있다. 야구는 타율·홈런·방어율 같은 기본 기록을 넘어 타구 속도와 방향, 투구 구종과 회전 수, 구장별·상황별 성과, 수비 범위와 이동 거리 등 다양한 데이터가 끊임없이 생산되는 스포츠다. 이런 세부 데이터는 야구팬들의 관심과 분석 욕구가 큰 영역이지만 현재는 여러 채널에 흩어져 있어 한눈에 접근하기 어렵다. 유병석 KBOP 사업기획팀장은 “구단 간 이해관계 조율이라는 현실적인 과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각 구단에 흩어져 있는 기록과 트래킹 데이터를 리그 차원에서 통합 제공해 팬들이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서비스와 부가가치를 창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DBR mini box I : 성공 요인 및 시사점
경기 보며 응원 떼창-야외 피크닉… 프로야구, ‘복합 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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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한양대 스포츠산업학과 교수 hurley72@hanyang.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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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프로야구만의 팬 경험… 경기와 야외 피크닉 함께 즐겨
경영학자 로버트 러시와 스티븐 바르고가 제시한 ‘서비스 지배 논리(Service-Dominant Logic)’는 최근 한국 프로야구의 성공 요인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이다. 서비스 지배 논리는 기업이 만들어내는 제품의 물리적 실체 이상으로 그 제품을 둘러싼 서비스와 고객 경험이 기업의 성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를 한국 프로야구에 적용해보면 야구 경기라는 상품 자체보다 경기를 관객에게 서비스하는 방식과 이를 통해 관객이 체감하는 팬 경험이 성공의 핵심 요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국 프로야구 경기가 펼쳐지는 야구장은 콘서트와 야외 피크닉을 동시에 즐길 수 있는 장소다. 치어리더의 율동과 함께 등장하는 응원가와 이를 함께 따라 부르는 팬들의 모습은 마치 아이돌 그룹의 콘서트 장을 방불케 한다. 실제로 이 같은 한국 프로야구 경기장의 분위기는 전 세계 그 어떤 야구장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미국 메이저리그에는 치어리더 자체가 없다. 일본 프로야구에는 한국과는 달리 주로 외야 응원석 주변에서 치어리더의 응원이 펼쳐지며 높은 데시벨의 사운드를 만드는 앰프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 같은 차이는 한국 프로야구가 단순한 경기 관람을 넘어 ‘집단적 감정과 에너지를 공유하는 체험과 서비스의 장’으로 탈바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야구장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식음료도 팬 경험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다. ‘치맥(치킨과 맥주)’과 ‘피맥(피자와 맥주)’은 기본이고 부산 사직 구장의 ‘다리집 떡볶이’ 등 각 지역 구장에는 로컬 맛집들까지 입점했다. F&B(식음료) 경험이 중요한 이유는 야구라는 종목이 지닌 고유한 관람 방식과 맞닿아 있다. 선수들의 플레이 시간보다 정지 장면이 더 많은 야구의 특성상 팬들은 응원을 즐기면서 음식을 먹고 동행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여유를 가진다. 실제로 2025년 KBO가 실시한 신규 관람자 조사에서도 응원 문화와 다양한 F&B 서비스가 야구장을 찾게 된 결정적 계기로 분석됐다. 한마디로 현재의 프로야구 경기장은 ‘야구만’ 보는 장소가 아니라 ‘야구도’ 즐기는 복합 여가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는 셈이다.
도시의 랜드마크 된 프로야구 경기장
야구장이 ‘핫 플레이스’로 부상한 또 다른 요인은 도시의 랜드마크가 된 각 지역 구장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야외 프로스포츠인 프로축구 경기장 다수가 2002년 월드컵을 전후해 건설된 것과 비교하면 프로야구 10개 구단의 홈구장 가운데 5곳은 2014년 이후 신축돼 쾌적한 관람 경험을 제공한다. 최근 지어진 프로야구 경기장은 바비큐존, 인피니티 풀 등 다양한 즐길 거리를 갖췄으며 과거에 비해 관중 수용 규모도 늘었다. 게다가 10개 구단 홈구장 대부분이 역세권에 위치해 팬들의 접근성도 좋은 편이라 관중 동원에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무엇보다 프로야구 팀은 오랫동안 지역 도시의 상징이었다. 야구에 관심 없는 국민이라도 롯데자이언츠나 기아타이거즈란 이름만으로 이 팀의 연고지가 부산과 광주임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처럼 강력한 지역 정체성은 다른 어떤 프로스포츠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평균적으로 프로야구팀의 브랜드 가치가 타 스포츠보다 높은 이유 역시 여기에 있다. 프로야구가 지닌 이런 상징성은 팬들의 응원 문화에도 그대로 반영돼 많은 야구팬이 자신의 출신 지역이나 연고지를 기준으로 팀을 선택하고 장기적으로 지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 같은 지역 정체성은 프로야구 10개 구단의 홈구장을 찾는 팬들에게 강력한 ‘장소 애착(Place Attachment)’을 불러일으킨다. 사회심리학자 어윈 올트먼, 세타 M. 로우가 제시한 장소 애착은 특정 장소에 대한 사람들의 정서적, 문화적, 사회적 유대감이 형성된 상태를 의미한다. 장소 애착은 구장에 운집한 팬들의 소속감을 높여주고 편안함과 안정감 등 긍정적 감정을 느끼게 해주는 핵심 요소다. 즉 한국 프로야구 초창기부터 누적돼온 지역 구장에 대한 장소 애착이 신축 구장 건설로 환경 개선까지 결합되면서 시너지 효과가 발현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신축 야구장의 관중 동원 효과가 극대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홈팀의 성적이 좋아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 프로야구의 전력 상향 평준화도 흥행에 기여했다. 2020년부터 2025년까지 프로야구 최강팀을 가리는 한국 시리즈에는 전체 10개 팀 가운데 9개 팀이 진출했다. 이 같은 전력 상향 평준화는 신축 야구장 흥행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최근 6년간 홈구장을 새로 지었던 기아타이거즈, NC다이노스는 한 차례씩 우승을 차지했고 삼성라이온즈는 2024년 준우승을 거뒀다. 2025년 대전한화생명볼파크를 새로 개장한 한화이글스도 같은 해 준우승을 기록했다. 이처럼 비수도권에 연고를 두면서 최신식 홈구장을 보유한 팀들의 성적이 개선되자 프로야구 전체의 관중 동원 효과도 함께 확대됐다. 실제로 2025 시즌 기준 삼성라이온즈는 총관중 수 전체 1위를 차지했고 ‘돌풍의 팀’ 한화이글스는 홈경기 29경기 연속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야구장 직관 트렌드가 지속가능하려면
최근 한국 프로야구가 높은 인기를 구가할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는 특유의 응원 문화와 경기장 신축 효과 등으로 야구장 관람 경험이 젊은 층의 트렌드에 잘 부합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KBO가 도입한 ABS와 피치클락 제도 역시 공정성과 속도감을 중시하는 MZ세대 팬들 사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논쟁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일부 팬은 피치클락이 자연스러운 경기 흐름을 통제한다며 불만을 드러냈고 선수의 부상 위험을 높일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됐다. 프로야구 올드 팬들에게 이런 제도 변화는 이질적으로 느껴질 여지도 있다. 그럼에도 ABS와 피치클락 등의 제도 도입은 젊은 팬층을 새로 유입하고 관람 경험의 기준을 시대에 맞게 재정의했다는 점에서 유의미한 시도로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MZ세대의 프로야구 선호 현상이나 야구장 직관 트렌드가 지속가능하려면 궁극적으로 프로야구 경기 자체의 품질도 함께 높아져야 한다. 응원 문화나 경기장 환경, IP 상품 등 경기 외적 요인만으로는 프로야구 인기를 장기적으로 견인하는 데 한계가 있다. 최근 젊은 세대 중심으로 빠르게 유입된 ‘라이트 팬’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하드코어 팬으로 전환되고 선수들의 경기력과 팀 전술 등에 더 많은 관심을 갖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최근 한국 야구의 국제 경쟁력은 과제로 남아 있다. 한국 야구는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했던 2008년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준우승을 기록한 2009년 이후 WBC에서 3회 연속 본선 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했다. 지난 2021년 도쿄 올림픽에서도 한국 야구는 6개 참가국 중 4위에 그치는 등 국제 무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국제 대회는 야구팬들에게 한국 프로야구가 ‘명품 야구’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팬 저변을 확대할 절호의 기회다. 실제로 국제 대회에서 거둔 야구 국가대표팀의 놀라운 성과가 곧바로 프로야구 인기 상승으로 연결된 전례가 있다. 2000년대 후반 WBC와 올림픽에서 대활약했던 야구 국가대표 선수들을 보기 위해 프로야구 경기장을 찾는 관중 수가 증가했었다. 유럽파가 주축을 이루는 축구 국가대표팀과는 달리 야구 국가대표팀 대다수는 국내 프로야구에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는 3월 개막 예정인 WBC는 한국 프로야구의 인기를 한 단계 상승시킬 수 있는 무대다. 극심한 침체기에 빠져 있었던 한국 프로야구의 반전 드라마도 약 20년 전 WBC에서 시작됐다. 국제 대회에서 좋은 성적표를 얻으려면 장기적인 시스템에 기반한 한국 야구의 경쟁력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특히 유소년들을 체계적으로 육성할 수 있는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과거처럼 뛰어난 선수들이 한 세대에 대거 등장해 국제 대회 성과로 이어지는 방식은 저출산으로 선수 풀 자체가 줄어드는 한국의 현실을 감안하면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이는 KBO와 아마추어 야구를 관장하는 대한야구협회가 역할을 분담하고 협력해 풀어가야 할 구조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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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성 교수는 인터넷 매체 프레시안에서 스포츠 담당 기자로 근무했으며 이후 영국 드몽포트대(DMU)에서 스포츠문화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스포츠문화와 경영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관련 주제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야구의 나라』(2024) 『스포츠 문화사』(2014)와 『A History of Football in North and South Korea』(2015)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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