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T Sloan Management Review

지금까지의 시장 파괴자들은 잊어라
더 빠르고 저렴하고, 품질 좋은 경쟁자가 나타났다

304호 (2020년 9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1997년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교수가 내놓은 파괴적 혁신 이론은 새로운 시장 진입자가 어떻게 값싸고 질 낮은 상품을 가지고 기존 시장을 사정없이 붕괴시키는지를 설명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파괴자들의 특징은 바뀌어 왔다. 디지털 기술로 무장한 오늘날의 파괴자들은 모든 측면에서 기존 제품에 ‘뒤지지 않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물론 이들도 확고한 과제를 바탕으로, 저렴하고 빠른 제품과 서비스를 선보여 고객을 끌어들인다는 측면에서 기존 파괴자들과 유사하다. 그러나 새로운 파괴자들은 쉽게 접근 가능한 자산, 긱 이코노미에 힘 입은 풍부한 인력, 온라인 구매에 거침없는 고객, 사업 운영을 돕는 디지털 기술을 등에 업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전통 기업들은 이제 ‘더 저렴하고, 더 빠르고, 충분히 좋은’ 기업들에 의해 주력 사업이 언제든 공격받을 수 있는 위험에 처했다.



편집자주
이 글은 MIT 슬론 매니지먼트 리뷰(SMR) 2020년 봄 호에 실린 ‘The New Disrupters’를 번역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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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이튼 크리스텐슨(Clayton Christensen)의 파괴적 혁신 이론(Theory of Disruptive Innovation)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처음 대중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값싸고 질 낮은 상품을 가지고 시장에 빠른 속도로 진입하는 파괴자들이 경쟁 우위에 대한 보편적인 믿음을 신봉하던 기존 기업들을 망가뜨릴 수 있다는 이론을 예지력 있게 설명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파괴자들의 특징은 급격하게 변해왔다. 특히 결정적인 차이는 이들이 이제는 어느 모로 보나 기존 기업들이 내놓는 것만큼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가지고 시장에 들어온다는 점이다. 이 같은 변화는 크리스텐슨의 이론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파괴자들은 영향력과 생명력을 더욱 넓히고 있고, 전통적인 기업들은 그만큼 이들을 따라잡기가 어렵게 됐다.

고전적 파괴 이론

상황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보기 전에 크리스텐슨의 이론이 왜 그렇게 파급력이 컸고 경쟁 우위에 대한 기존 개념들을 파괴했는지 그 이유부터 간단히 알아보자.1 전통적인 의미의 전략은 ‘본원적 전략’이라는 개념에 뿌리를 뒀다.2 이는 기업이 고가 시장에서는 차별화로, 저가 시장에서는 비용 우위를 바탕으로 경쟁하거나 특정 니치 시장에 탁월한 상품을 내놓는 전략을 뜻한다. 크리스텐슨은 새로운 시장 진입자가 어떻게 이런 기본적인 전략의 역학을 가뿐히 무시하는지를 설명했다. 그는 새로운 유형의 위험한 경쟁자가 마진도 적고 고객이 필요 이상의 돈을 절대 지불하지 않는 저가 시장에 들어가 어떻게 시장을 사정없이 붕괴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을 보여줬다.

새로운 진입자는 더 저렴하고 편리하지만, 수년간 이 기술을 개발해 온 기존 기업들에 많은 고객이 기대하는 지배적인 기준에는 못 미치는 성능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선보인다. 기존 기업들은 이런 신생 기업을 무시해도 된다고 여긴다. 제품의 품질이 뒤처질 뿐 아니라 마진이 적고 고객 충성도도 떨어지기 때문이다. 대신 기존 기업들은 고가 시장의 고객들이 가장 가치를 느끼는 특징을 개선하는 존속적 혁신(sustaining innovation)에 집중한다.

크리스텐슨은 신규 진입자들을 무시할 때 생기는 역효과도 알려줬다. 이런 신출내기들은 점점 발전해서 기존의 지배적인 기준에서도 꽤 좋은 실력을 보인다. 또 이들은 저가 시장에서 아주 견고한 혁신을 이뤄 새로운 고객들을 시장에 끌어들인다. 이제까지 항상 작동했던 방식만 고수하는 기존 기업들은 여기서 두 가지를 간과한다. 첫째, 신규 진입자들이 이룬 저가 혁신의 중요한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 둘째, 고객들이 오래된 기능들에 대해 예전만큼의 비용을 더는 지불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들의 주력 제품은 고객의 변화하는 니즈에 더 잘 맞는 신기술에 대체돼 소모품이 돼 버린다.

이 과정을 거친 대표적인 예가 인텔이다. 이 반도체 제조사는 노트북과 데스크톱, 서버용 칩을 판매해 수십 년간 높은 수익을 향유하고 있었다. 나날이 전력 소모가 커지는 소프트웨어 사용을 최적화해주는 강력하고 빠른, 고성능 컴퓨터 칩이었다. 당시 개인용 컴퓨터는 대부분 전원에 계속 꽂혀 있거나 몇 시간 동안은 충전하지 않아도 되는 대형 배터리를 장착하고 있었던 만큼 회사도, 그 고객들도 전력 소모량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인텔은 거의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누렸다. 그래서 무명이었던 한 영국 회사가 덜 강력하지만 전력 소모가 적은 ARM 설계 방식의 칩을 처음 내놓았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무시했다.

2000년대 후반에 스마트폰 혁명이 일어나자 인텔 제품의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다. 인텔의 칩들은 전력 소모량이 컸는데, 사용자들은 하루 종일 사용할 수 있는 가벼운 모바일 기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는 ARM 설계로 된 칩들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고, 품질에 대한 새로운 차별화 포인트가 됐다. 반면 인텔의 관리자들은 이전까지 가장 중요하게 인식됐던 요소들을 기준으로 더 나은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드는 데만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회사는 낮은 마진을 만회하는 것을 넘어 수백만이 아니라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모바일 기기용 칩 사업에 진출할 기회를 놓쳤다.

모바일 기기용 칩 시장에서 인텔이 겪은 시행착오는 크리스텐슨이 설명한 파괴의 두 가지 차원을 설명한다. 첫째, 기존에 구축된 고객층(PC 소유자)의 요구에 충분히 부응하지 못하는 제품을 보유한 경쟁자의 시장 진입이다. 둘째, 새로운 진입자가 스마트폰 제조사처럼 이전에는 고객이 아니었던 사용자들에게 솔루션을 판매해서 시장을 창조하게 되는 순간이다.3

크리스텐슨의 이론은 또한 경영 지표와 인센티브 구조가 이런 패턴을 강화하는 강력한 방식을 부각했다. 그의 견해로는 이런 요소들이 결합하면 대부분 혁신에 투자하려는 경영진의 의욕을 저하시킨다. 비율로 표현되는 재무 지표들, 회계 중심의 감가상각 일정, 관습적인 사업 계획, 그리고 주식이나 시간에 기반한 보상 체계 등은 모두 성과를 낼 잠재력도 높지만 불확실성이 높은 혁신을 추구하려는 리더의 의지를 떨어뜨린다. 이런 상황은 경영진과 투자자들에게 단기적으로 지급되는 과도한 보상으로 인해 더욱 악화되고, 결국 장기적인 투자를 저해한다.

저렴하고, 편리하고,
품질 좋은 스타트업의 부상

오늘날 소비자와 직접 거래하는 DTC(Direct-to-Consumer) 파괴자들은 파괴 이론이 진화하는 방향을 보여준다. 파괴자들은 오늘날의 다양하고 강력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더 저렴하고 편리하면서 모든 측면에서 기존 제품에 뒤지지 않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기존 기업들의 주력 사업을 공격한다. 새로운 디지털 기술과 ‘뒤지지 않게 좋은’ 제품이 거대한 변곡점을 만들어내면서 기존 기업들에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압박을 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소매 업계에서는 월마트나 타깃, 카르푸 같은 대형 유통업체들이 제품 판매의 게이트키퍼로 있는 게 기본 전제나 다름이 없었다. 이에 제품 공급업체들이 유통업체 선반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려면 충분히 큰 고객 세그먼트에서 제품에 대한 수요가 충분히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이런 게이트키핑 기능은 여러 부작용을 일으켰다. 먼저, 판매 제품이 유통업체의 여러 지점에서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일정 정도 표준화돼야만 했다. 둘째, 제조업체의 정보 접근이 제한됐다. 즉, 누가 그 제품을 구매하는지, 제품이 어떻게 입고되고 진열되는지, 같은 지점에서 판매되는 경쟁 제품 대비 판매 실적은 어느 정도인지 등에 대해 기초적인 정보밖에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제조사는 구매 경험에 대한 통제력을 거의 가지지 못했다. 많은 제조사에 가장 중요한 ‘고객’은 최종 사용자가 아니라 유통업체였다.

2010년대가 되자 이런 게이트키퍼를 없애고 소비자에게 제품을 직접 제공하는 소비재 회사들, 즉 DTC(또는 D2C로도 불리는) 기업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와비파커(2010년 설립), 달러셰이브클럽(2011), 글로시어(2010), 어웨이(2015), 캐스퍼(2014), 보노보스(2007) 같은 회사들이 안경, 면도기, 화장품, 여행, 매트리스, 의류 등 다양한 상품군에서 기존 시장을 뒤엎었다. 이들이 소비자에게 주는 가치는 거의 예외 없이 비슷한 제품을 더 저렴한 가격에 판다는 것이다. 특히 이런 브랜드들은 기존 소매점에서 겪는 마찰이나 불편들을 없앤다.

2016년에 유니레버가 10억 달러에 인수한 달러셰이브클럽은 기존 남성 면도기 제품들이 갖고 있던 결함을 비판적으로 꼬집었다. 소셜미디어에서 유명해진 이들의 유머러스한 홍보 영상에서 회사의 공동 창업자인 마이클 듀빈(Michael Dubin)은 기존 업계의 관행을 비웃었다. 그는 대개 젊은 세대인 타깃 고객들에게 이렇게 물었다. “브랜드 면도기에 매달 20달러씩 쓰는 데 흡족하세요? 그중 19달러는 로저 페더러 에게 갑니다! … 쓸모없는 면도 기술에 이제 돈 좀 그만 쓰세요.” 이에 기존 선두주자였던 질레트는 어쩔 수 없이 제품 가격을 인하하고 자사 버전의 셰이브 클럽 서비스를 시작했다. 그리고 비록 반응이 엇갈리긴 했지만 실험적인 광고까지 과감히 내보내며 맞대응에 나섰다. 질레트의 시장점유율은 지금도 달러셰이브클럽이나 해리스 같은 D2C 계열 경쟁사들의 출현, 그리고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수염 기르기 트렌드로 인해 타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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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경쟁자들은 짧은 기간 세 가지 중요한 방식으로 고객 행동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소비자들은 이제 매트리스, 가구, 심지어 자동차 같은 내구재까지 기꺼이 온라인에서 구입한다. 이는 이전 세대에게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잘못된 선택을 하면 값비싼 환불 비용과 시간을 낭비하고, 품질과 안전성을 계속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금전적 손실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이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것이 위험하게 여겨졌기에 기업들은 소비자들이 중대한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항상 상품을 직접 만지고 느끼고 싶어 할 것이라 짐작했다.

새로운 파괴자들은 이 같은 위험과 복잡성을 없애 왔다. 구입한 지 99일 된 캐스퍼 매트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상관없다. 회사가 당신의 집까지 와서 무료로 수거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위험 부담이 높았던 선택이었지만 캐스퍼는 여기서 위험을 제거했다. 2019년 이 회사의 매출은 5000만 달러로 정점을 찍었다. 같은 해 매출 270억 달러 규모였던 매트리스 시장의 상당한 파이를 집어삼킨 것이다.

거의 모든 것이 서비스 형태로 판매될 수 있다. 이 같은 개념은 소프트웨어 쪽에서 처음 나왔다. 서비스형 소프트웨어 혹은 SaaS 모델이 그 시작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의류, 가구, 자동차, 트럭, 중장비, 심지어 애완동물 업계에서도 구독이나 무료 체험 기간 같은 서비스가 활용되고 있다. 필요할 때 똑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고 결제 방식도 더 유연한데 굳이 상품을 소유할 필요가 있을까?

잉여 용량은 소비자의 자산이다. 이 트렌드의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에어비앤비다. 에어비앤비는 일반인들이 활용도가 낮은 집을 낯선 이들에게 대여해 돈을 벌 수 있도록 함으로써 새로운 시장을 창조했다. 2019년 기준 미국인들은 힐튼호텔보다 에어비앤비에 더 많은 돈을 지출했고, 그 규모는 미국 소비자들이 숙박 시설에 쓴 전체 비용의 약 20%에 달한다. 이 모델은 이제 다른 자산으로도 확대되고 있다. 일례로 네이보닷컴(Neighbor.com) 같은 스타트업은 집에 여유 공간이 있는 집주인과 창고가 필요한 사람들을 연결해준다.

새로운 D2C 경쟁사들의 성공, 이들이 받는 신뢰와 이미 검증된 가치를 감안하면 기존 유명 브랜드들의 가치가 급락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 놀랍지 않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기업들이 하루아침에 신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됐듯이 새로운 브랜드들도 소셜미디어와 디지털 채널, 온라인 인플루언서 등을 활용해 유의미한 정체성과 명성을 빠르게 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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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파괴 모델의 디지털 요소들

이런 새로운 D2C 사업에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 디지털 기술, 알고리즘, 데이터 분석, 새로운 형태의 연결성이 이들 사업의 추진 동력이라는 점이다.

• 자산을 소유하지 않고 자산에 접근하기. 전통적인 조직들은 소유한 자산을 통해 차별화된 경쟁력을 만들고 진입장벽을 구축했다. 반면 D2C 조직들은 온디맨드 거래의 양 당사자를 모두 대변하는 디지털 플랫폼에 참여함으로써 당사자 간 마찰과 위험을 없앤다. 이렇게 오픈마켓에서 자산의 사용에 관한 계약을 맺으면 규모를 빠르게 키울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다른 업체들이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을 쉽게 베낄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예를 들어, 온라인 압축포장배송(mattress-in-a-box) 산업의 경우 새로 진입한 업체가 150개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정도의 신규 진입자 수는 하버드 교수인 윌리엄 살먼(William Sahlman)과 하워드 스티븐슨(Howard Stevenson)이 수년 전 자본시장의 근시성이라 부르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즉, 시장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스타트업이 한꺼번에 뛰어들고 있는 상황이다.4

• 고객과 함께 창조하기. 디지털 채널은 중개자를 없앤다. 이름이 말해주듯이 D2C 기업들은 고객과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이를 통해 기존 소매업체보다 더 빨리 실험하고, 반복하고, 더 유연하게 고객 맞춤형 상품을 제공하는 강력한 피드백 순환고리를 만든다. 최고의 D2C 브랜드들은 완전한 엔드투엔드 경험을 창출해 전체 프로세스에 걸쳐 고객의 관심과 충성도, 데이터를 독점한다. 이 경험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지 않는다.

• 상시 접속, 상시 모바일. 소비자에게 직접 상품을 판매하는 회사는 이전에도 있었다. 엘엘빈(L.L. Bean)이나 랜즈엔드(Land’s End) 같은 곳들을 떠올려 보라. 하지만 새로운 유형의 D2C 기업들은 고객과 24시간 상호작용하고, 상시 접속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모바일 기술과 인프라를 사용한다. 이제 D2C 기업 하면 소비자들은 거래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손쉽게 접근할 수 있고, 원하는 것을 제때 제공하는 파트너를 자연스레 기대한다.

• 소자본 생태계 기반의 비즈니스 모델. D2C 스타트업의 흔한 특징은 전통적인 자본의 측면에서는 상대적으로 적은 자원으로도 시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D2C 기업은 운영의 상당 부분을 아웃소싱한다. 또 인프라 자체가 공유 자원인 디지털 플랫폼에 구축한 생태계에 참여한다. 이런 기업들은 더 나은 유통망이나 공급망을 두고 경쟁하지 않는다. 아날로그 세계에서 요구되는 시간과 비용의 극히 일부만 갖고도 충분히 복잡한 공급망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대신 D2C 기업들은 더 나은 고객 경험이라는 중요한 요소를 두고 경쟁한다.

파괴 이론: 여전히 유효한 특징들

크리스텐슨 교수가 처음 주장한 파괴 이론은 자산이나 브랜드라 할 만한 게 거의 없는 스타트업들이 어떻게 입지가 확고한 기존 기업들의 시장점유율을 채 가는지를 논리적으로 아주 잘 설명한다. 그의 이론이 예견했듯이 자신들의 주력 사업을 잠식할 가능성이 있는 혁신에 투자하는 기업들은 자신들의 계획이 매력적이지 않고 위험하다고 느낀다. 그들 입장에서는 주력 사업을 통해 누리던 것보다 마진이 적은 기회를 추구할 이유가 거의 없다. 사업 지표들도 기존 사업을 강화하라고 가리킨다.

크리스텐슨이 전망한 것처럼 고객들이 그들의 삶에서 해결하고자 하는 과제는 놀라울 정도로 확고하다.5 디지털 기술이 그 과제의 수행 방식을 완전히 새롭게 창조해냈을 뿐이다. 가령, 자신의 아파트에 필요한 가구를 들여놓아 안락한 집을 만들고자 하는 과제가 있다고 하자. 오늘날 도시에 사는 노마드 성향의 젊은 직장인들은 가구를 구입하는 것보다 대여하는 것이 이 과제를 더 편리하게 수행하는 방법이라고 여길 수 있다. 이럴 경우 기존 업체들은 고객들의 달라진 과제 해결 방식에 기습 공격을 당할 수 있다. 특히 그들의 경쟁사는 동종 업계의 전통적인 기업이 아니라 디지털 기술을 마스터한 완전히 새로운 분야의 기업일 것이다. 애플이 골드만삭스와 제휴를 맺고 애플 브랜드가 새겨진 신용카드를 발급하고 있는 게 대표적이다. 전자상거래 업체인 알리바바가 결제 시스템을 두고 은행들을 위협하고, 아마존이 오프라인 상점 및 식료품 사업에 진출하고, 우버가 서드파티 음식 배달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것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크리스텐슨의 이론은 비소비(non-comsumption)와 경쟁할 정도로 가격을 낮춰서 신규 고객을 창출하는 것이 약삭빠른 시장 진입자에게 여전히 실효성 있는 기회라는 측면에서도 아직 유효하다. 기존의 파괴적 경쟁자들이 가격을 인하해 신규 구매자들을 새로운 시장으로 유인했듯 디지털 기반의 파괴자들 또한 놀랍도록 저렴하고, 쉽고, 빠르게 고객을 끌어들인다. 가령, 보청기 시장에서 벌어진 상황을 생각해 보라. 보통 보청기 하나를 맞추려면 고객은 발품을 팔고 많은 비용을 들여 이비인후과 전문의와 상담을 한 뒤 자신에게 딱 맞는 보청기를 맞추고 조정하는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그런데 벤처 지원 스타트업인 이어고(Eargo)는 이 모든 과정을 없애 버렸다. 제물낚시에서 영감을 얻은 이어고의 ‘귓속형(보이지 않는)’ 보청기는 귀에 딱 들어맞는다. 스스로 증폭 수준을 맞추고, 특수 케이스에서 충전까지 되기 때문에 배터리를 교체하거나 구입할 필요도 없다. 게다가 기존 보청기보다 가격대도 저렴하다. 보청기가 필요하지만 기존 모델을 구입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방대한 시장을 개척할 잠재력이 있다. 보청기가 대부분 의료 보험 수가를 받지 못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마지막으로, 소위 자본가의 딜레마라 불리는 크리스텐슨의 관점도 여전히 건재하다.6 많은 대형 조직에서 직원의 인센티브는 새로운 시장을 창조하는 혁신 활동과 일치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있다. 기업이 자사주를 대량 환매할 경우 경영진에게는 훌륭한 보상이 되지만 혁신에 투자할 수 있는 현금은 고갈된다. 같은 돈을 혁신에 투자했다면 독점 제품과 서비스를 더 단순하고 저렴하게 만들어 신규 고객을 유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7

파괴 이론: 변한 특징들

크리스텐슨은 파괴를 새로운 진입자들이 주변부에서 기존 기업의 주류 비즈니스로 서서히 발전해 나가는 과정으로 설명했다.8 그가 처음 이 이론을 제시한 뒤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디지털 경쟁사들이 전례 없이 빠른 속도로 움직일 수 있게 됐다는 점이다.

조금이라도 마진을 내는 분야로 진입할 수 있는 조건이 지금처럼 좋았던 적은 없었다. 적어도 지금 이 글을 쓰는 시점에서는 넉넉한 자금, 긱 이코노미(gig economy, 계약직 고용이 주를 이루는 경제 형태-역주) 안에서의 풍부한 인력, 직접 보지 않은 물건도 거리낌 없이 구매하는 고객, 그리고 이전에는 장애물로 작용하던 사업 운영을 모두 용이하게 하는 디지털 기술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 와비파커나 캐스퍼 같은 기업들이 증명하듯이 경쟁력 있는 가치를 입증한 파괴자들은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속도로 규모를 확장할 수 있게 됐다.

기존의 파괴 이론과 달라진 두 번째 특징은 전통적인 주력 사업과 혁신적인 신규 사업의 관계다. 기존 공식에 따르면 주력 사업 부문은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다. 매출 수치, 수요가 확인되는 고객, 기존 모델을 대규모로 복제했을 때의 보상 등을 대강 알 수 있었다. 반면에 혁신적인 신규 사업 부문은 지식보다는 수많은 가정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발견 중심의 계획, 실패를 통한 학습, 신속한 실험 등을 통해 사업을 운영해 왔다.

오늘날의 디지털 파괴는 너무 격렬해서 주력 사업의 안정성이 그 어느 때보다 떨어진 상태다. 주력 사업의 쇠퇴가 기업 전체를 위험에 빠뜨릴 정도다. 한때는 유명 경영대학원의 사례 연구 대상으로 각광받았으나 이제는 생존 자체가 위태로워진 GE의 운명을 보라.9 GE의 경영진은 디지털이 자신들의 사업에 막대한 변화를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비교적 일찍 알았다. 그래서 2013년 프레딕스(Predix)라 불리는 플랫폼을 선보이며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착수했다. 사물인터넷(IoT) 기술을 활용해 이 거대 기업에 파괴적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의도로 기획된 사업이었다. 그러나 GE는 미래를 위한 투자와 분기별 목표 달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했다. 프레딕스의 실패는 GE의 핵심 사업을 포함해 다른 계열사의 건전성에도 악영향을 미쳤고, 회사는 심각한 곤경에 빠졌다.

크리스텐슨의 초기 연구 결과가 발표된 뒤 일어난 중요한 변화가 하나 더 있다. 기존 기업들도 파괴에 대한 지식을 하나둘 쌓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독일계 철강 유통사인 클로크너(Kloeckner)는 사업 운영을 위한 디지털 플랫폼을 구축하지 않으면 다른 스타트업이 그 일을 하게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철강 산업을 디지털화하는 작업을 꾸준히 추진했다. 다른 기업들도 회사 자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시장 파괴에 맞서기 시작했다. 막대한 돈을 들여 스타트업을 인수하고, 스타트업 정신과 관행을 주입하려 최선을 다하며, 내부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 하고, 디지털 관련 자회사나 인수 기업의 규모를 빠르게 키우고자 애쓴다. 예컨대, 월마트는 33억 달러를 투자해 제트닷컴을 인수했고 그 밖에도 수백만 달러를 들여 젊은 층에 어필하는 상품을 보유한 여러 D2C 회사를 인수했다. GM과 포드자동차는 최근 각광받는 자율주행 차량 분야에서 경쟁하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기존 기업들도 크리스텐슨의 글들을 읽어왔고, 가장 앞선 기업들은 과거의 방만했던 실수를 피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벌이고 있다.

보통 파괴의 기미가 보이면 기존 기업들이 보이는 반응은 세 가지 중 하나다. 첫 번째는 크리스텐슨이 말한 전형적인 덫에 걸리는 유형이다. 이들은 변화의 가능성을 철저히 무시한다. 두 번째는 파괴를 목격한 뒤 과잉 반응하는 유형이다. 이들은 앞으로 파괴적 시장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관계없이 일단 뛰어들기 위해 막대한 돈과 시간을 쏟아붓는다. 필자가 보고 싶은 마지막 유형은 클로크너처럼 파괴의 조짐이 보이는 시장에 적당한 투자를 하기 시작하는 유형이다. 이들은 고통스러운 몰락이나 과도한 전환 없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역량을 조금씩 쌓아 나간다. 가령, 도요타는 기존에 주력 사업이었던 내연식 자동차 사업을 포기하지 않은 채 하이브리드 전기차 시장의 대중화에 힘썼다. 그 결과 이제는 전기차 분야에서 수익을 내는 몇 안 되는 회사 중 하나가 됐다.

기존 기업들이 가야 할 길

전통적인 기업이라면 이제 지속적인 혁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위태롭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디지털 공격이 그 어느 때보다 적은 비용으로 쉽게 그들의 주력 사업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은 ‘더 빠르고, 더 저렴하고, 충분히 좋은’이라는 파괴적 만트라를 한층 더 강화한다. 디지털로 구현되는 비즈니스 모델은 모든 전통적인 사업에 잠재적인 변곡점을 만들고 있다. 고위 경영진과 이사회 멤버들은 이제 안전한 베팅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 기업의 리더들은 디지털 파괴자들의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과 경제성은 고려하지 않은 채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너무 많은 돈을 쓰고 있다. 낡은 비즈니스 모델을 자동화하는 것 또한 그보다 나을 게 없다. 이는 디지털 도구들이 가능케 한 파괴적 수준의 가성비 혜택들을 누리는 데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디지털의 속도로 움직이는 세상에서 경쟁하는 법에 대해서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도 많다. 이런 상황에서 빠르게 학습하고, 실험하고, 이를 통해 수집한 통찰을 반영하기 위해 방향을 바꾸는 능력은 엄청난 가치를 가진다. 기존 기업들은 이제 아날로그 사업을 더 나은 버전으로 만드는 투자를 멈춰야 한다. 대신 새로운 발견을 향한 안목을 가지고 디지털 전략을 짜기 시작해야 한다.

번역 |김성아 dazzlingkim@gmail.com


리타 군터 맥그래스(Rita Gunther McGrath)는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의 교수이자 불확실하고 급변하는 환경에서의 전략 수립에 대한 세계적인 전문가다. 그녀는 『경쟁우위의 종말(The End of Competitive Advantage)』과 『Seeing Around Corners』의 저자다. 이 글에 의견이 있는 분은 http://sloanreview.mit.edu/x/61301에 접속해 남겨 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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