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ting Machiavelli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 “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단테와 마키아벨리, 공통의 모진 운명
“처참할 때,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1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이다. 단테의 <신곡>은 단테와 베르길리우스의 영혼이 지옥과 연옥을 지나 천국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다루고 있다. 고향에서 추방당한 단테의 불행했던 여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단테는 두 번째 지옥의 방에서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진 프란체스카와 파올로를 만나게 된다. 고통 속에 있던 프란체스카는 단테에게 “처참할 때,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고 고백한다. 사실 이 말은 단테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조국 피렌체에서 추방돼 타국을 떠돌아다니던 단테는 고향에서의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마음에 큰 고통을 겪었다. 단테의 이 고통은 지금 산탄드레아의 시골집에서 절치부심하고 있던 마키아벨리의 심정이기도 했다.
피렌체의 고위 공직자로 지낼 무렵, 마키아벨리는 꿈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행복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이 없다는 사실을 마키아벨리도 뼈저리게 통감하고 있었다. 피렌체 외교관의 신분으로 프랑스를 네 번씩이나 방문했고 체사레 보르자와 교황 율리우스 2세의 이탈리아 정벌에 함께 동행했던 시절도 있었다. 교황 선거가 열릴 때는 바티칸에서 가톨릭교회의 수장이 선출되는 과정을 지켜보기도 했고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당당히 협상을 벌이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행복했던 시절은 지나가고 시골집에서 ‘밥이나 축내고’ 있는 한심한 신세가 되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로 돌아가고 싶은 열망에 사로 잡혀 <군주론>을 썼다. 따라서 <군주론>은 조심해서 읽어야 하는 책이다. <군주론>의 작가 마키아벨리야말로 진짜 여우이기 때문이다. 그는 피렌체로 돌아가기 위해서 여우처럼 ‘능숙하게 분장할 줄 알아야 하며 감쪽같이 위장도 해야 하고 때로는 뻔뻔스러워져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살아남기 위해 쓴 책에는 여우의 기만술이 가득하다. 위장술을 부린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속아서는 안 된다. <군주론>의 불편한 진실은 계속 이어진다.
왜 체사레 보르자가 영웅인가?
<군주론>을 오독(誤讀)하고 있는 많은 사회과학자들은 마키아벨리가 체사레 보르자를 이상적인 군주의 모델로 보았다고 단언한다. 타인에게 자신의 속셈을 절대로 읽히지 않는 영악함은 여우를 닮았고 자신을 배반했던 장군들을 일시에 죽여 버리는 단호함에서 사자의 사나움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적인 권력자는 체사레 보르자처럼 행동해야 한다고 가르쳐왔다. 미안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군주론>에서 체사레 보르자가 이상적인 통치자의 모델로 제시된 것은 그가 교황의 혈족이기 때문이다. <군주론>의 1차 독자인 로렌초 데 메디치가 체사레 보르자처럼 교황의 혈족이기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의도적으로 체사레 보르자를 띄웠던 것이다.2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가 교황 알렉산데르 6세(1492-1503년 재위)였던 것처럼 로렌초 데 메디치의 작은 아버지가 바로 교황 레오 10세(1513-1521)였다. ‘교황의 아들이 영웅이 될 뻔했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당신도 교황의 조카가 아닙니까? 당신이야말로 진짜 이탈리아의 영웅이 될 수 있습니다! 나만 불러 주십시오. 당신을 이 시대의 진정한 체사레 보르자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마키아벨리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 <군주론>에서 체사레 보르자를 영웅의 모델로 제시했던 것이다.
<군주론>은 신흥 국가가 탄생하는 과정에서 군주가 취해야 할 행동 양식과 정치적 판단을 가르치고 있는 책이다. 이 교훈은 체사레 보르자가 로마냐 지방을 차지하고 마키아벨리의 표현대로 ‘무법천지’였던 로마냐 지방에서 ‘새로운 국가를 만드는 작업(Nation building)’을 관찰하고 얻은 것이다. 체사레가 처해 있던 상황은 지금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가 피렌체에서 처해 있는 상황과 같다. 피렌체 공화정이 붕괴되면서 힘의 공백이 발생했고 메디치가문의 사람들은 이 혼란을 진정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즉각 혼란의 현장으로 들어가 군주의 위엄을 보이라고 조언했다. 필요하다면 악한 군주라는 인상을 줘도 좋다고 말했다. 혼란을 방치해 피렌체 시민들이 더 큰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면 군주는 따끔한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고 조언했고 그 이상적인 모델이 바로 당신과 같은 교황의 혈족, 체사레 보르자라고 강조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마지막 부분(26장)에서 체사레 보르자를 시대의 영웅으로 칭찬한다. 마키아벨리의 눈에 비친 당시의 이탈리아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가 더 참혹한 고생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 어둠이 짙을수록 밤하늘의 은하수가 빛나고, 시대가 암울할수록 영웅의 존재가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난세가 체사레 보르자와 같은 영웅을 탄생시킨다.
“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는 일, 자기 편을 늘리는 일, 힘이나 지혜를 부려 승리하는 일, 대중으로부터 사랑받으면서 동시에 두려워하게 하는 일, 병사들에게 명령을 따르도록 하면서도 존경받는 일,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을 섬멸하는 일, 낡은 제도를 새로운 방법으로 개혁하는 일, 엄격하면서도 정중하고 관대하면서도 활달한 처세, 충성스럽지 않은 군대를 해산하고 새로운 군대를 조직하는 일, 상대방 국가의 왕과 친교를 맺고 자기에게 존경심을 갖도록 하는 일, 해를 가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일, 이상의 모든 사항이 새로운 (타인의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자의) 군주국에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면 발렌티노 공작(체사레 보르자)의 정책만큼 생생한 사례는 없을 것이다.”4
이 부분에서 다시 ‘여우’ 마키아벨리가 조용히 등장한다. 이렇게 위대한 영웅도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체사레 보르자도 몰락하고 말았다. 여우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체사레 보르자보다 더 뛰어난 영웅의 이름을 열거한다. <군주론>에서 제시되고 있는 진정한 영웅이자 ‘군주의 진정한 모델’은 모세, 키루스, 로물루스, 테세우스이다. 모세(Moses)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유대인의 지도자, 키루스(Cyrus)는 바빌로니아를 물리치고 페르시아제국을 만든 황제5 ,로물루스(Romulus)는 팔라티노 언덕에서 로마를 건국(기원전 753년)한 전설의 영웅, 테세우스(Theseus)는 크레타 섬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친 아테네의 전설적인 영웅이다. 그런데 이 영웅들은 모두 종교적 인물이거나 상상 속의 신화적 존재이다. 왜 마키아벨리는 역사적 실체였던 체사레 보르자의 실패를 아쉬워하면서 상상 속의 존재들을 군주의 이상적 모델로 추천했을까? 이 부분이 바로 마키아벨리가 여우인 이유를 밝혀준다. <군주론>의 이상적인 모델이 될 수 있는 영웅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군주란 실현 불가능한 현실이란 것이다. 아니, 마키아벨리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군주론>의 모델은 체사레 보르자가 아니다. 영웅은 신화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진정한 군주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나, 마키아벨리야말로 진정한 군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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