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높은 사람인가? 고객이 높은 사람인가? 여기서 제일 높은 사람은 자네가 비키라고 한 고객이네. 나는 높은 사람이 아니다. 나는 고객이 불편함이 없는지 보러 온 것이고 나는 그것만 보면 되는데 받들어 모셔야 할 고객을 비키라고 한 것이 말이 되느냐.”
롯데그룹 창업자인 신격호 총괄회장(90)은 매장을 자주 방문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티 내지 않고 조용히 다닌다는 점이다. 그는 매장을 둘러볼 때 수행원을 한 사람으로 제한한다. 고객 상담을 하던 직원이 자신을 보고 인사를 하면 오히려 싫어한다. 회장이 왔다고 해서 고객과 상담하다 말고 인사를 하면 그 고객이 기분 나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신 회장이 한번은 정기세일 기간 중에 롯데백화점 매장을 방문했다. 손님이 많아 혼잡스러웠는데 신 회장이 온다고 하자 점장이 나섰다. 점장은 회장을 따라 나섰고 안전요원을 대동했다. 그리고 안전을 생각해 신 회장이 지나갈 때 사람들을 비키게 해서 길을 터줬다. 신 회장은 그 자리에서 점장을 호되게 야단쳤다. 점장의 행동은 평소 신 회장의 철학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신 회장은 나서는 걸 매우 싫어한다. 언론에 잘 등장하지 않고 쓸 데 없는 말도 거의 하지 않는다. 외부 활동을 할 시간에 본업에 집중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일본을 오갈 때는 혼자서 직접 서류가방을 들고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다른 대기업 회장들과 달리 사무실의 크기나 장식이 매우 소박하다. 이는 화려한 것을 싫어하는 신 회장의 스타일 때문이다. 그런 그의 집무실에는 ‘거화취실(去華就實)’이라는 액자가 걸려 있다. 화려함을 멀리하고 실속을 추구하는 그의 철학을 잘 보여주는 액자인 셈이다.
서울대 임종원 교수는 저서 <롯데와 신격호, 도전하는 열정에는 국경이 없다>에서 거화취실의 진정한 의미를 한발 더 나아가 ‘미래 이익을 위한 선택과 이를 위한 준비 과정에서 불필요한 자원 소모를 막고 본질을 위해서라면 어떤 투자도 아끼지 않는 것’으로 해석한다. 거화취실은 철저하게 현실주의적인 사업감각을 갖고 일을 하면서 자신을 과장해 홍보하는 일은 하지 않는 롯데그룹의 철학이기도 한 셈이다.
신 회장은 껌 하나도 남들과 다르게 남미의 천연수지를 들여와 만들었고 초콜릿도 스위스의 최고 기술자를 스카우트해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을 지을 때 전 세계 유명 호텔을 거의 다 답사했으며 호텔 앞의 나무도 서울 교외를 다니면서 골랐다. 롯데월드 건설에 앞서 비슷한 콘셉트의 초대형 실내 테마파크인 캐나다 에드먼튼몰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조용한 리더십’이 가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연구결과로도 입증이 됐다. 울리크 말멘디어와 제프리 테이트 교수는 ‘슈퍼스타 CEO들’에 관한 연구에서 상을 받은 유명한 스타급 CEO들은 상을 받은 후 평균적인 CEO보다도 낮은 성과를 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라케시 쿠라나 하버드대 경영대 교수는 <하버드비즈니스리뷰>에 쓴 ‘슈퍼스타 CEO의 저주’에서 기업의 비전을 제시하고 언론과 이해관계자들의 혼을 빼놓는 카리스마가 있는 CEO들이 놀랍게도 기업의 실적에는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경영학자 짐 콜린스는 저서
신 회장은 어린 나이에 일본에 건너가 고생 끝에 사업에 성공한 후 뒤늦게 고국에 돌아와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런 롯데그룹은 이제 국내 재계 서열 5위까지 올랐다. 신 회장의 ‘거화취실’ 리더십은 소리 없이 강했다.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필자는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 인문지리학을 전공하고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2001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문화부, 경제부, 산업부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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