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경영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미군은 한국전에서 두 번의 충격적인 실수를 경험했다. 첫 번째는 한국전의 발발 가능성을 낮게 보고 극동군을 형편없는 수준으로 방치한 것이다. 전혀 훈련이 돼 있지 않았던 미군은 전쟁 초기 인민군에게도 밀렸다. 당시 한국군들은 미군이 도로로만 이동하려고 하고 산비탈로는 절대 다니지 않으려고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오늘날 밝혀진 바로 당시 미군은 훈련부족으로 다리에 힘이 없었다고 한다.
두 번째 실수는 중공군에 대한 무지였다. 중공군의 개입에 대한 정보가 계속 들어왔지만 맥아더 사령부는 이를 무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주 무시한 건 아니었다. 맥아더는 중공군이 참전하기 전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완전히 확보해 전쟁을 끝내려는 계획을 세웠고 항공정찰을 통해 중공군의 동향을 계속 감시하면서 육군과 해병대에게 빨리 북진하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한국의 험악한 산악지형과 병력부족 때문에 전선을 유지하며 북진시킬 수가 없었다.
한반도는 북쪽이 Y자 형태로 꺾여 있어서 동서로 전선을 유지하려면 중부지방보다 최소한 2배의 병력이 필요하다. 미국은 병력증원 요청을 거절했고 맥아더 사령부는 모험을 택했다. 중앙부를 방치하고 병력을 좌우로 갈라 평안도와 함경도 양쪽으로 나누어 북진시켰다. 중앙부에 커다란 공백지대가 생기면서 양쪽으로 갈라져 북진하는 유엔군 측면이 무방비 상태가 됐다. 한국의 좁은 산길과 산곡으로 들어서면 전선은 모세혈관이 뻗어가듯 갈라지고 가늘어 지면서 서로 멀어졌다.
사령부는 무작정 일선부대에 신속한 진격을 요구했다. 이 진격이 성공해서 통일이 됐다면 과감한 결단이었다고 두고두고 칭송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십만의 중공군이 이미 들어와 덫을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중공군의 출현
중공군 출현 정보가 계속 보고 됐지만 사령부는 대규모 병력이 잠입했다고 믿지 않았다. 겨울에 나무 하나 없는 한국의 민둥산은 눈으로 덮여 있었다. 전투 사단이 들어왔다면 항공정찰에 잡히지 않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오산은 미군이 중공군의 특기와 야전능력에 대해 무지했던 탓이었다. 이때만 해도 서구인들은 아시아인들의 복종심과 단결력, 끈기, 강인함을 이해하지 못했다.
정찰기가 뜨면 수만 명의 중공군이 하얀 담요 한 장을 덮고 눈 위에 엎드렸다. 미군은 백색의 눈 위에서는 숨을 곳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거대한 대지의 이불이었다. 투박한 솜옷을 입은 중공군은 영하 40도의 날씨에 눈에 엎드려 숨고 밤이 되면 이동했다. 북부지방의 그 험한 산곡을 그들은 수레를 끌며 등짐을 지고 보급품을 날랐다. 솜옷은 입었지만 중공군의 약점은 신발이었다. 농구화 비슷한 신은 방수도 방한도 되지 않았다. 무수한 병력이 동상으로 쓰러졌지만 그들은 묵묵히 지시를 따랐다. 나중에 어느 미군은 심한 동상에 걸린 중공군 포로 한 명이 걸어가는 것을 보고 기겁을 했다. 발이 퉁퉁 부어 기형적으로 커져 있었고 살은 썩고 갈라져서 신발 안에 진물이 고여 걸을 때마다 철벅철벅 소리가 났다. 저 정도면 통증으로 걷는 게 불가능하고 지금 치료를 받아도 절단을 면할 수 없는 수준이었는데도 그는 등에 동료를 업고 걸어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중공군의 최고 장기는 야간 이동술이었다. 이때까지도 미군은 야간에는 싸우지 않는 것을 정상으로 여겼다. 반면 중공군은 소리 없이 야간에 이동하는 능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장진호의 혈전
1950년 11월, 후대에 ‘장진호의 혈전’으로 알려진 전투의 격전지인 함경남도 장진호 부근 개마고원 일대에 투입된 중공군은 약 20만이었다. 압도적인 병력에 독특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중공군도 약점이 많았다. 무기와 화력은 열악했고 군대로서 낙후하고 결여된 능력도 많았다.
중공군 총사령관 팽더화이(彭德懷)는 전쟁이 장기전으로 가고 미군이 중공군의 전술을 파악하면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전술은 병력소모가 너무 크고 비인간적이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했던 조지 오웰이 이런 말을 했다. “진짜로 야전에서 싸우는 지휘관이나 병사는 오히려 인간적이 되고 적에게나 아군에게 그렇게 잔인하지 않다. 전쟁에서 가장 비인간적이고 잔혹한 명령과 전술을 강요하는 자들은 다 후방에 있는 인간들이다.”
팽더화이도 그런 고민에 휩싸였다. 장기전은 살육전이 될 것이고 승리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의 대안은 한번의 철퇴였다. 개마고원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다가오는 미군을 함정에 몰아넣고 완벽하게 몰살시킬 심산이었다. 2개 사단 이상의 미군, 특히 ‘무적’이라 불리던 미 제1해병사단을 섬멸하면 미군은 전쟁에서 발을 뺄 것이다. 더욱이 해병대를 잃으면 전투를 주도할 부대가 사라지게 된다.
중공군이 놓은 함정은 이랬다. 미군은 좌우로 전선을 유지하지 못하고 겨우 트럭 한 대나 지나갈 좁은 산악도로를 따라 종대로 올라오고 있다. 중공군은 항아리 모양으로 그들을 넓게 포위한다. 쉽게 말하면 산악도로를 타고 가는데 주변의 첩첩산중 전부가 중공군이다. 미군이 항아리 안에 들어오면 산곡을 이용해서 그들의 좌우로 병력을 내려 보낸다. 후방으로 침투한 중공군은 보급부대와 포병을 먼저 습격해 처리하고 퇴로를 차단한다. 그 다음 파상공세와 인해전술로 미군을 섬멸한다. 미군이 탈출하려고 해도 도로는 거의 외길이고 양쪽 비탈 위에는 중공군이 새카맣게 포진하고 있다. 탱크조차도 돌파가 쉽지 않다.
중공군은 이 전술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찾았다. 장진호였다. 압록강으로 북상하던 미군은 장진호를 만나 다시 둘로 분리되고 완전히 격리됐다. 서쪽은 해병 1사단 7연대와 5연대, 동쪽은 미 육군 페이스 특수부대가 진격했다. 해병 2개 연대 약 3000명의 병력이 중공군 9병단 6만 명이 엎드려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장진호는 오이처럼 남북으로 홀쭉한 형태인데 미군 선두가 장진호의 북쪽 유담리에 도착했을 때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됐다. 11월 27일과 28일 사이에 시작된 최초의 기습은 완벽한 성공이었다. 7연대 1대대의 대대본부가 순식간에 궤멸됐고 대대장이 전사했다.
혼란 속에 미 해병은 철수를 결정했지만 이미 퇴로에는 중공군이 가득했다. 비유를 들면 미군은 좌우로 고층빌딩이 가득한 도로를 따라 직선으로 퇴각해야 하는 셈이었다. 빌딩은 모두 중공군이 점령한 가운데 중간중간 교차로를 미군이 점거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죽어라 달려서 교차로의 엄호범위까지만 들어가면 교차로의 수비대와 합세해 다시 아래 교차로로 철수하는 식으로 퇴각 전략을 짰다.
이 작전에서 아래쪽 교차로가 먼저 점거당하면 탈출은 불가능해진다. 중공군도 이를 알고 전 교차로에 대해 동시다발적으로 무자비한 공격을 감행했다. 어떤 교차로는 연대본부 주둔지로 강력하게 방어되고 있었지만 중대 단위의 교차로도 있었다. 그중 하나가 7연대 F중대가 방어하는 하갈우리 북방의 덕동고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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