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ting Machiavelli-7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 “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마키아벨리가 시간을 끌면서 당부아즈 추기경과 협상을 벌였던 프랑스의 블루아성 입구. 전면 파사드에 루이 12세의 기마상이 보인다. |
시간이라는 좋은 약
두 집단 간의 충돌과 갈등이 평행선을 이루면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전체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줄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 마키아벨리는 이럴 때 시간을 끌면서 결정을 늦추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판단했다. 두 집단 간의 충돌과 갈등이 평행선을 이루면서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 전체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준다면 결정을 미루고 시간을 끌라는 조언이다. 그는 <로마사 논고>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간’이라는 좋은 약을 쓰기만 하면 병독(病毒)의 진행이 늦춰지고 결국 타고난 병독의 수명이 다하면 저절로 그 고통은 사라지게 마련이다.”1
이해 집단 사이의 충돌과 갈등이 팽팽한 평행선을 이루며 사회적 긴장감이 최고점을 향해 치닫고 있는 요즈음 마키아벨리의 조언은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시간이라는 마법사에게 충돌과 갈등의 해결사 역할을 맡기는 것이 옳은 지도자의 선택일까?
꼬여가는 피사 문제와 프랑스 용병대
마키아벨리는 100% 확실한 해결책이 없을 때는 시간을 끄는 것이 상책이라고 믿었다. 갈등의 비등점이 계속 끓어올라 폭발의 위험 수위까지 올라갔다면 어느 한쪽을 선택해 다른 한쪽의 가능성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보다 판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나을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생애 최초의 해외 출장 업무였던 프랑스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런 지혜를 깨닫게 된다. 특히 당신이 약자(弱子)의 위치에 있다면 시간 끌기가 더욱 효과를 발휘한다. 너무 강력한 강자와 맞붙게 됐을 때 운명을 걸고 단번에 승부를 겨루는 건곤일척(乾坤一擲)보다는 시간을 끌면서 다른 기회를 엿보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이 더 지혜로운 선택이라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프랑스로 첫 해외 출장을 떠나게 된 경위는 이러하다. 프랑스의 국왕 루이 12세(1462-1515)는 1499년 9월11일, 밀라노 왕국을 무력으로 점령해 버렸다. 이탈리아 북부지방이 외적(外敵) 프랑스의 손에 넘어간 것이다. 이탈리아반도 내에서 외국 군대가 승전보를 올리자 피렌체는 화들짝 놀라 급히 친선 사절단을 밀라노로 보냈다. 피렌체는 자국의 방어를 위해서라도 프랑스 군대의 군사력이 필요했다. 승전을 축하하는 아부의 제스처를 잠시 취한 다음 피렌체 대표단은 프랑스와 용병 계약을 체결했다. 반란을 일으킨 피사를 점령해 주는 조건으로 5만 듀카트라는 거액을 주기로 했다.
용병 계약을 맺은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드 보몽(Hugh de Beaumont) 장군을 지휘관으로 앞세워 군대를 남하(南下)시켰다. 5000명으로 구성된 용병 부대는 대부분 스위스 출신 군인들이 주력부대를 이뤘다. 그러나 파르마시를 출발한 프랑스의 용병 부대는 피사로 바로 진격하지 않고 볼로냐, 미란돌라, 코레조, 카르피 등을 돌아다니면서 무력시위만 했고 피사 주변에 도착해서는 인근 도시 루카(Lucca) 등지를 돌아다니며 소란만 피워댔다. 원래 용병이란 게 그런 것이다. 대규모 전쟁은 피하면서 개인적인 실익을 챙기는 것이 용병들의 일반적인 태도였다. 피렌체는 프랑스 용병 부대의 피사 공격을 독려하기 위해 루카 델리 알비치와 잔바티스타 리돌피를 군사 고문으로 파견했다. 이 두 명의 고문단을 보좌한 사람이 바로 마키아벨리다. 피렌체의 군사 고문단과 마키아벨리는 프랑스의 드 보몽 장군에게 빨리 계약조건대로 피사를 점령하라고 요구했다. 마침내 프랑스 용병 부대는 피사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본진을 성채 안으로 보낼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드 보몽 장군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부대를 갑자기 밀라노로 철수시켜 버린다(1500년 7월9일). 피렌체의 군사 고문단 대표였던 알비치와 리돌피는 아연실색한다. 마키아벨리는 보고서를 쓰면서 프랑스의 태도에 욕설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었다.
병력 철수를 결정한 지휘관은 루이 12세 본인이었다. 밀라노 방어를 위해 병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루이 12세는 피사 점령에 든 비용 5만 듀카트를 이미 수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추가로 3만8000금화를 더 요구했다. 뻔뻔스럽게도 부대의 철수비용까지 요구한 것이다. 만약 추가 대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피렌체와의 외교를 단절하겠다고 통보했다. 자체적으로 군대를 보유하지 않았던 피렌체로서는 프랑스와의 외교단절은 곧 국가의 존위가 풍전등화(風前燈火)에 처하는 것과 같았다. 프랑스 군대가 없으면 피사 점령은 고사하고 피렌체 자체의 방어도 위험해진다. 피렌체 행정부는 이 다급한 외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키아벨리를 프랑스로 파견했다. 가뜩이나 용병 제도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던 마키아벨리로서는 프랑스 용병과 관련된 업무가 불쾌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마키아벨리의 보고서 여러 곳에서 프랑스 왕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넘쳐난다. 마키아벨리의 눈에 비친 프랑스 왕은 ‘신의를 지키지 않는 인간’의 화신이었다.2
첫 번째 프랑스 사절 임무
마키아벨리는 1500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프랑스에서 첫 해외 출장 업무를 수행했다. 피렌체 명문가 출신의 프란체스코 델라 카사(Francesco della Casa)가 전권대사로 임명됐고 마키아벨리는 그를 수행하는 부사(副使)로 파견됐다. 프랑스로 떠나기 직전에 그는 부친상을 당했다(5월10일). 그러나 국가의 중대사를 책임진 마키아벨리는 변변한 장례식을 치를 만한 시간조차 없었고 부친의 시신은 산타크로체 성당에 서둘러 묻혔다. 알프스 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국경선을 넘어 루이 12세가 체류하고 있다던 리용에 도착(7월 26일)했지만 왕은 이미 그 도시를 떠나고 없었다. 피렌체 행정부가 마키아벨리 일행에게 “가능한 한 말에서 내리지 말고 빨리 이동하라”고 지시할 만큼 화급을 다투고 있었다. 당시 루이 12세는 프랑스를 엄습한 흑사병을 피해 도시를 순회 통치하고 있었다. 마키아벨리 일행도 왕의 이동 경로를 따라 계속 이동해야만 했다. 그래도 명색이 한 국가의 외교 대표부로서 복장이나 숙소에 격조를 갖추다 보니 경비 지출이 만만치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특유의 위트와 푸념을 섞어가며 출장비를 인상해달라는 보고서를 피렌체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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