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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경영

시대 앞서간 영웅의 행적을 벤치마킹 하라

김경준 | 8호 (2008년 5월 Issue 1)
21세기를 흔히 컨버전스(convergen-ce), 퓨전(fusion)의 시대라고 한다. 통신과 방송이 융합하고 생물학과 디자인이 만난다. 스파게티가 김치와 만나면서 퓨전 음식이 생겨나고 국악기가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실험이 이제는 어색하지 않다. 연관 없는 것처럼 보이던 다른 분야의 지식이 만나고 교류하면서 새로운 차원으로 발전하는 통섭(consilience)은 학문의 주요한 트렌드로 떠오르고 있다. 글로벌 경제 환경이 강요하는 극심한 경쟁과 혁신의 압력 속에 생존과 발전을 모색하는 경영자들은 전통적 경영학의 범위를 벗어나 생물학, 철학, 역사학으로 관심을 넓히며 새로운 지혜를 구하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났을까.
 
역사는 벤치마킹의 보고(寶庫)다
피터 드러커가 “측정할 수 없는 것은 관리할 수 없고, 관리할 수 없는 것은 개선할 수 없다”고 갈파했듯이 경영이란 투입과 산출의 메커니즘을 관리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경영이란 원자재, 노동력, 자본, 토지의 유형자산 관리가 중심이었다. 하지만 21세기 지식사회로 접어들어서는 브랜드, 기술, 지식 심지어 문화와 같은 무형자산이 경쟁력의 핵심이 되었다. 자연히 경영활동의 주안점도 무형자산을 관리, 개선하는 것으로 이동하면서 사람에게 동기와 열정을 부여하고 조직을 활성화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이 지점에서 경영은 역사와 만난다. 인간과 조직의 경쟁과 발전, 성공과 패배라는 점에서 수천 년 동안 축적해온 인류역사는 100년에도 못 미치는 ‘신생’ 경영학이 감히 넘볼 수 없는 풍부한 경험과 사례를 가르치는 스승이기 때문이다. 서방의 고대 글로벌 제국 로마와 지도자 카이사르-아우구스투스, 스피드를 핵심 경쟁력으로 유라시아 대륙에 대제국을 건설한 몽골과 칭기즈칸,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이르는 일본 전국시대 말기 쟁투의 드라마, 외국인을 등용해 개혁의 추진동력으로 삼은 고려 광종 등은 문자 그대로 리더십, 조직관리, 전략실행의 교과서다.
 
카이사르, 로마 중흥의 소프트웨어 설계
카이사르는 갈리아 지방 정복을 이룬 군사적 역량, ‘갈리아 전쟁기’를 저술한 문필가적 재능, 정치개혁을 통해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일컬어지는 로마 번영의 토대를 닦은 정치가로서 큰 업적을 남겼다.
 
로마는 B.C. 753년 이탈리아 반도의 조그만 촌락으로 출발했다. B.C. 3세기에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B.C. 2세기에는 카르타고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지중해 전역의 패권국가로 올라선다. 당연히 커지는 몸집(하드웨어)에 맞춰 옷(소프트웨어)을 갈아입는 것이 필요했다. 하지만 하드웨어의 확대를 뒷받침하는 소프트웨어를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카이사르는 고도성장기를 지나 안정성장기에 들어선 로마에 맞는 소프트웨어를 갖추는 것, 다시 말해 강대해진 육체에 걸맞은 뇌와 장기(臟器)를 만들어내는 것을 시대정신으로 인식했다. 그는 통치의 근간을 이루고 있던 원로원, 민회, 집정관의 기능을 재조정하고, 세금제도의 개혁에 착수하였으며, 개방성의 정신으로 로마의 지도층을 재조직했다.
 
그는 갈리아의 유력자에게 원로원 의석을 주어 로마 지도층에 편입시키고 자신의 씨족 이름까지 나눠줬다. 카이사르가 추진한 갈리아의 편입은 성공적으로 이뤄져 후일 갈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은 다른 갈리아족들이 나서서 진압할 정도였다. 개방정책은 문화 분야로도 이어졌다. 카이사르는 “로마인은 다른 민족에게 배우기를 거부하는 따위의 오만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카이사르는 로마 건국 초기 로마에 패배해 멸망해버린 알바롱가 왕국의 후손이다. 그 자신이 로마제국 개방정책의 수혜자인 셈이다. 그는 피지배민족인 그리스의 신(神)들조차 받아들인 로마인 특유의 개방적 세계관과 정책을 라틴민족에서 당시 야만인으로 치부되던 갈리아-게르만-아프리카까지 확대 적용함으로써 도시국가 로마를 세계제국 로마로 도약시키는 성과를 거둔, 시대를 앞서가는 탁월한 리더였다.
 
카이사르의 정책은 당시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고, 결국에는 자신의 목숨까지 제물로 바쳐야 했다. 하지만 그의 정책은 아우구스투스를 비롯한 후대 지도자들에게 계승되면서 로마제국은 제도적 혁신을 이뤘다. 로마는 700년의 역사를 거친 후에도 다시 융성해 이후 300년의 전성기를 누렸다.
 
외국인 쌍기와 힘을 합친 고려 광종의 개혁
태조 왕건이 고려를 창업하고 후삼국을 통일했지만, 왕권은 미약했고 호족세력은 강력했다. 지방 호족들은 많은 노비를 소유하면서 군사력과 경제력을 겸비한 소국의 군주와 같았다. 2대 혜종, 3대 정종이 시도한 왕권강화가 실패로 끝난 가운데 949년 25세의 젊은 나이로 즉위한 4대 광종은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강화에 성공함으로써 500년 왕업의 기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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