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동엽 교수의 경영 거장 탐구
스티브 잡스의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 연설에 ‘항상 바보스러워야 한다! 항상 배고파야 한다!(Stay Foolish! Stay Hungry!)’라는 대목이 나온다. ‘바보스러워야 한다’는 부분은 21세기 초경쟁 환경의 규칙인 창조적 혁신경쟁에서 상상력과 꿈, 직관, 통찰력 등 전통적 관점에서 언뜻 바보스러워 보이는 행동이 치밀한 계산이나 계획 이상으로 중요한 이유를 분석한 ‘바보스러움의 기술(technology of foolishness)’에 관한 DBR 기고문에서 이미 설명했다(DBR 29호 참조). 그런데 ‘배고파야 한다’는 무슨 의미일까? 잡스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도 8강에 진출한 직후 ‘나는 여전히 배고프다(I’m still hungry)’라고 말했다.
‘배고프다’는 표현의 정확한 의미는 1950∼60년대 제임스 마치(J. G. March) 교수가 사이먼(H. Simon) 교수 등과 함께 주도한 거시 조직이론 분야의 카네기학파(Carnegie School) 핵심 개념인 ‘열망수준(aspiration level)’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21세기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최신 조류인 ‘행동주의 경제학(Behavioral Economics)’을 비롯해 비경제학자 중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사이먼과 카네먼(D. Kahneman), 윌리엄슨(O. E. Williasmon)은 모두 카네기학파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카네기학파 류의 조직이론인 ‘행동주의 기업이론(Behavioral Theory of the Firm)’의 핵심 개념 중 하나가 바로 ‘배고프다’는 표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열망수준’이다.
열망수준: 만족과 불만족의 경계
마치 교수와 카네기학파 동료들에 따르면 열망수준은 만족과 불만족을 구분하는 주관적인 심리적 경계다. 전통적인 경영학이나 경제학 이론들은 대부분 성과를 평가할 때 연속선상에서 사고한다. 물론 객관적 성과를 계량화하면 연속선상에 배열할 수 있다. 100점 만점인 시험의 예를 든다면, 0점에서 100점까지의 연속선상 어디엔가 모든 사람들의 점수가 위치할 것이다. 따라서 대표적인 경제학적 의사결정 이론인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이론 등 대부분의 기존 논의들에서는 객관적 점수가 높을수록 만족도도 비례해서 높아질 것이라고 전제하고, 그 만족도를 극대화(maximizing)하는 방향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치 교수의 ‘몇 점을 받으면 시험을 잘 쳤다고 만족할까’라는 질문으로 논의의 초점을 바꾸면 문제가 훨씬 복잡해진다. 실제로 중요한 것이 각자가 그 점수에 만족하느냐 혹은 불만족하느냐의 여부다. 객관적 점수는 0점에서 100점까지의 연속선상에 위치한다. 하지만 이 점수에 대한 ‘만족’과 ‘불만족’ 여부는 어떤 기준점을 경계로 불연속적으로 나눠진다. 즉 ‘만족’과 ‘불만족’은 연속선상에 있는 개념이 아니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상태다. 예를 들면 100점 만점의 시험에서 89점과 90점은 실제로는 통계적으로 유의한 차이를 찾기 힘들 정도로 유사한 점수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89점을 받으면 시험을 못 쳤다고 느끼고 90점을 받으면 잘 쳤다고 여긴다. 바로 이 90점이 시험 성적에 대한 이 사람의 열망 수준이다.
만족과 불만족 사이의 구분선인 열망 수준이 왜 중요할까? 만족-불만족 판단이 행동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마치 교수는 객관적 성과는 0점에서 100점과 같이 연속선상에 분포한다. 하지만 이후에 새로운 행동을 ‘한다’ 혹은 ‘하지 않는다’는 결정은 서로 불연속적이며 질적으로 다른 상태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혁신처럼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전혀 다른 문제며, 어떤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 행동을 하지 않는 상태의 연속선상에 존재하지 않고, 전혀 다른 상태로의 퀀텀 점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속선상에 분포하는 시험의 성과가 성적을 올리기 위한 특단의 행동을 하느냐 마느냐라는 질적으로 다른 불연속적인 방향 중 어디로 갈 것인가를 결정한다. 여기서 행동 여부를 결정하는 경계선이 바로 그 결과에 대한 만족-불만족의 구분 기준인 열망수준이다. 즉 열망수준이 90점인 사람은 90점을 받으면 그때까지 해오던 방식을 유지하지만, 89점을 받으면 전혀 다른 새로운 해결책을 강구한다는 것이다.
마치 교수와 카네기학파의 동료들이 1950년대에 제시한 열망수준이론은 그 후 기업 등 수많은 조직에 관한 연구들에 적용돼 성과에 따라 혁신과 같은 새로운 시도를 하느냐의 여부를 예측하는 데 활용됐다. 그런데 열망수준이 혁신 행동으로 연결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면 마치 교수와 카네기학파 동료들의 또 다른 이론인 ‘문제해결형 탐색(problemistic search)’ 개념을 알 필요가 있다. 이는 성과가 열망수준보다 낮을 때 불만족을 느끼게 되고, 열망수준 대비 낮은 성과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존에 하지 않던 혁신과 같은 새로운 행동을 시도하게 된다는 뜻이다. 즉 불만족이 혁신 행동으로 연결된다는 의미다.
객관적 성과 자체는 ‘높다-낮다’ ‘만족한다-불만족한다’ 등과 같은 평가를 내포하지 않는다. 이런 평가는 이것을 인식하는 주체인 행위자의 주관적 판단이다. 그리고 어느 쪽으로 평가되느냐는 바로 그 사람의 열망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따라서 열망수준이 높은 사람은 웬만한 성과는 그 열망수준보다 낮기 때문에 불만족을 느낄 확률이 높아지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끊임없이 혁신하게 된다는 게 바로 마치 교수의 논리다. 열망수준이론은 1950년대 이후 경영학 거시 조직이론의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 중 하나인 조직학습(organizational learning)이론의 핵심 변수가 됐다.
어느 정도의 열망수준이 바람직할까
기업경영 실무나 컨설팅, 언론 등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표현들 중 열망수준 개념에 가장 가까운 것은 아마 ‘스탠더드’ 혹은 ‘눈높이’일 것이다. 눈높이가 높다 혹은 낮다는 표현은 어떤 대상에 대한 열망수준과 관련이 있다. 눈높이가 높은 사람은 웬만한 결과에는 만족하지 않고 더 나은 것을 찾아 끝없이 도전한다. 이는 바로 열망수준에 따른 문제해결형 탐색행동이다. 기업경영과 관련해 외환위기 이래 한국에서 자주 회자된 ‘글로벌 스탠더드’의 정확한 의미도 바로 열망수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한국에서는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개념이 왜곡돼 흔히 연봉제나 팀제, 고용유연성 등과 같이 소위 신자유주의적 경영기법으로 오해돼 왔다. 이는 완전히 틀린 이해다. 글로벌 스탠더드의 정확한 뜻은 모든 측면에서 선진 국가나 조직들에 뒤지지 않는 글로벌 최고의 열망수준을 갖자는 것이다. 과거 우리의 열망수준이 국내지향적이었을 때는 웬만한 성과에 만족했기 때문에 하던 대로 더 열심히 하면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따라서 혁신과 같은 급진적 시도는 드물었다. 그러나 열망수준을 글로벌 스탠더드로 높여 세계 최고 국가나 기업들과 비교해보면 실제 우리 성과가 턱없이 낮기 때문에 끊임없이 혁신을 시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바로 ‘글로벌 스탠더드’란 화두의 정확한 의미다.
열망수준의 옵션은 다양하다. 예를 들면 자기 내부 기준이 열망수준인 기업은 지난해와 비슷한 성과가 나오면 만족한다. 또 경쟁자와 비교하는 열망수준을 가진 기업은 자기 성과가 예년보다 높더라도 경쟁자보다 낮으면 불만족을 느낀다. 자기보다 훨씬 우월한 초우량 기업과 비교하는 열망수준을 갖춘 기업도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바로 이런 열망수준을 말한다. 이 경우 국내 최고의 성과를 달성했더라도 위기의식을 느낄 수밖에 없다. 1990년대 중반 굴지의 국내 1위 그룹이던 삼성이 신경영 선언을 통해 절체절명의 생존 위기와 근본 변신을 강조한 것은 바로 열망수준을 국내 최고에서 글로벌로 전환한 결과다. 최근 애플처럼 자타가 공인하는 글로벌 1위지만 끊임없이 상시 혁신을 추구하는 기업의 열망수준은 ‘맥시멈 가능성’과의 비교다. 즉 다른 기업들과 비교하면 경쟁자가 없는 굴지의 글로벌 1위지만, 여전히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하면 아직 멀었다는 태도가 끊임없이 혁신하며 전인미답의 영역을 개척하는 위대한 창조적 기업들의 열망수준이다. 스티브 잡스의 ‘항상 배고파야 한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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