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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13

‘검은 왕비’ 카테리나, 인내의 리더십을 보이다

김상근 | 79호 (2011년 4월 Issue 2)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메디치 소녀의 비극적 출발

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조반니(Giovanni), 코시모(Cosimo), 로렌초(Lorenzo), 줄리아노(Giuliano) 등의 이름을 선호했기 때문에 많은 부모들이 이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주었다. 로렌초란 이름도 여러 세대에 걸쳐 여러 명이 사용했는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아마위대한 자(Il Magnifico)’로 불렸던 15세기의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일 것이다. 이 로렌초의 손자 역시 같은 이름을 사용했다. 로렌초를 할아버지 로렌초와 구별하기 위해우르비노의 공작이란 별칭이 함께 불렸다.

1516년에 피렌체의 실질적인 영주로 등장했던우르비노의 공작로렌초는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1469-1527) <군주론>을 헌정했던 바로 그 인물이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던 로렌초는 마키아벨리가 심혈을 기울여 쓴 책을 읽지 않았다.

카테리나 데 메디치(1519-1589)는 바로 이우르비노 공작의 딸로 태어났다. 이 소녀는위대한 자로렌초를 증조할아버지로 두었고, 당시 교황이었던 레오 10세가 작은 할아버지였을 만큼 막강한 권세를 등에 업고 태어났다. 장차 프랑스의 왕비와 섭정황후로 등극해 16세기 후반의 프랑스와 유럽 역사를 쥐락펴락하게 될 메디치 가문의 여걸이 탄생한 것이다.

무릇 영웅의 생애는 비극이나 시련과 더불어 시작된다. 카테리나도 그렇게 출발했다. 카테리나는 태어나자마자 몇 주 만에 부모를 잃었고(1519), 혈혈단신 외로운 고아로 성장했다. 카테리나를 돌본 사람은 작은 할아버지였던 교황 레오 10세였다. 그러나 교황은 1521년에 임종을 맞이했고 겨우 세 살 난 어린 카테리나는 16세기 유럽의 냉혹한 정치판에 내동댕이쳐졌다. 당시 이탈리아를 둘러싸고 있던 이웃 나라의 국왕들은 유럽의 정치적 패권을 겨루며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스페인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카를 5(1500-1558)는 로마까지 진격해영원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드는(1527) 역사의 격변을 일으켰다. 스페인 군대의 용병으로 고용됐던 독일인들은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로마 교황청에 지독한 악감정을 품고 있었다. 개신교도들인 이들은 로마를 잔인하게 난도질했다. 이들은 가톨릭교회의 사제들을 백주대낮에 살해 했고, 수도원에서 수녀들을 겁탈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굴욕적인 로마의 함락을 몸소 겪어야 했던 교황은 클레멘스 7(1478-1534)로 레오 10세의 뒤를 이어 메디치 가문에서 두 번째로 배출했던 메디치 교황이다. 클레멘스 7세가 교황으로 즉위했을 때(1523), 당시 네 살 난 어린 아이였던 카테리나에게도 한줄기 희망의 서광이 비치게 된다. 두 번씩이나 친척인 교황을 대부(Godfather)로 모시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기대도 잠시 뿐. 스페인 황제가 고용한 독일 용병들에 의해 로마가 초토화되고 메디치 교황 클레멘스 7세가 궁지에 몰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피렌체 시민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폭동을 일으켰다. 참주정을 실시하던 메디치 가문을 축출하고 다시 시민이 주인이 되는 공화정으로 복귀하기 위해 피렌체 시민들은 메디치 타도를 외쳤다. 당시 8세 소녀 카테리나가 피렌체에 남아있던 거의 유일한 메디치 가문의 혈족이었다. 피렌체 시민들은 메디치 궁전으로 난입해 값진 보물을 닥치는 대로 약탈하고, 그 안에 숨어있던 어린 카테리나를 죽이려들었다. 이 긴박한 살해 위협 속에서 어린 카테리나는 평범한 사람들이 야수로 변해가는 과정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소녀는 피렌체 외곽에 있는 산타루치아 수녀원으로 몸을 피해 겨우 목숨을 건졌지만 수녀원 정문 앞에 몰려든 시민들은 카테리나의 목숨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메디치 가문의 싹을 아예 잘라버리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당시 8살 밖에 안 된 어린 소녀 카테리나는 수도원 정문을 에워싸고 있던 시민들 앞에서 놀라울 만큼 당찬 모습을 보였다. 공포에 질려 울기는커녕, 하느님께서 계신 수녀원 안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천벌을 받을 신성모독이라고 또박또박 말하며 시민들과 대치했다. 피렌체 시민들의 반란은 1530년까지 3년 동안 계속됐다. 그동안 스페인과의 평화 협정으로 위기를 모면한 메디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다시 자신의 고향 피렌체를 접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교황의 군대와 스페인의 연합군이 피렌체 성벽을 에워싸고 대포 공격을 준비하자 피렌체 반란군은 어린 카테리나를 성벽에 묶어 두는 방안을 고려했다. 메디치 가문의 적자(嫡子)인 카테리나를 대포공격을 막기 위한 인간방패로 활용하자는 방안이었다. 그러나 메디치 가문의 어린 소녀는 자신의 뒤에 실권을 회복한 교황 클레멘스 7세와 신성로마제국의 막강한 군대가 버티고 있다는 것을 반란군들에게 큰 소리로 상기시켰다. 이성을 잃은 피렌체 시민군들은 어린 메디치 소녀의 당당한 태도와 용기 앞에 할 말을 잃었다.
 

프랑스 궁정에서의 굴욕

로마의 함락(1527)과 피렌체 폭동(1527-1530)이 진정된 후, 카테리나는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정치적 판단에 따라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1494-1547)의 며느리로 시집가게 된다. 교황은 자기 가문의 딸을 프랑스의 왕세자비로 받아 주면 지금까지 교황청이 유지했던 친() 스페인 정책에서 친 프랑스 정책으로 외교노선을 수정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관습대로 엄청난 액수의 결혼 지참금을 피렌체 부자 가문으로부터 기대했던 프랑수아 1세는 메디치 출신의 14세 소녀를 프랑스의 왕세자비로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교황의 친척을 자부(子婦)로 두는 것은 썩 나쁘지 않은 정치적 선택이었다. 남편으로 지명된 앙리 2(1519-1559)는 장남이 아니었기 때문에 프랑스 왕실의 입장에서도 딱히 손해 볼 것이 없는 거래였다.

그러나 프랑스 왕실의 기대와 메디치 가문의 계산은 곧 빗나가고 만다. 든든한 방어막이었던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카테리나가 결혼식을 올린 지 약 1년 만에 임종(1534)했고, 로마 교황청은 미지급으로 남아있던 카테리나의 결혼 지참금 지불을 거절했다. 피렌체의 갑부였던 메디치 출신의 며느리였지만 카테리나는 프랑스 왕실이 기대했던 것만큼 많은 지참금을 가져오지 못했다. 이미 메디치 가문의 재산은 대부분 폭도들에게 강탈당했으며, 새 교황을 선출한 교황청은 선대 교황 친척의 결혼 지참금을 지불할 이유가 없었다.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던 프랑수아 1세는이 계집아이가 완전히 알몸으로 내게 왔구나(J’ai reçu la fille toute nue)!”고 탄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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