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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의 리더십 집중 해부-3

천하통일의 전주곡, 상앙의 ‘변법 개혁’

김영수 | 47호 (2009년 12월 Issue 2)
통일의 전주곡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를 세운 진시황은 영토통일과 정치통일 외에도 화폐통일, 도량형통일, 문자통일로 대변되는 이른바 ‘삼통(三統)’을 단행했다. 또 진시황은 전국을 중앙집권적 군현제로 개편했다. 이 4가지 사항은 마치 진시황의 전매특허처럼 여겨져 진시황을 언급한 책에는 거의 빠지지 않고 실린다.
 
하지만 사실 진시황은 과거에 존재했던 이 4가지를 좀 더 완벽하게 다듬고 강화한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 창안한 사람들은 따로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 46호에 잠깐 언급했던 효공(孝公)과 상앙(商鞅)이 그 주인공이다. 진시황의 천하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이뤄진 게 아니라 오랜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됐고, 가장 직접적으로는 기원전 4세기 중반 효공과 상앙의 개혁 정치에 힘입은 바 크다. 말하자면 통일의 전주곡으로서 상앙이 작곡하고 효공이 연주한 ‘변법(變法) 개혁’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앙의 개혁은 전면적이고 철두철미했다. 그래서 혹자는 이 개혁을 ‘기적’이니 ‘마술’이니 하는 말로 과장하기도 한다.
 
진나라는 기원전 7세기 목공(穆公) 때 외부 인재를 적극 영입하여 위세를 떨친 후로는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내부에 난이 많았고, 전국시대에 들어와서는 대신들이 권력을 휘두르면서 최고 통치자인 군주를 교체하는 일도 빈번했다. 헌공(獻公) 때 도읍을 역양(중국 산시성[陝西省] 린퉁[臨潼])으로 옮기고 서하 지역을 되찾는 등 중흥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이 기운을 이어받은 군주가 바로 효공이었다. 효공은 즉위한 이듬해인 기원전 361년 적극적인 ‘구현령’을 통해 세계 개혁사의 기린아로 일컬어지는 상앙과 조우했다.

 

 
세기의 만남
상앙은 네 차례나 효공을 만나 효공의 개혁 의지를 확인했다. 마지막 만남에서 두 사람은 무릎을 맞대고 날이 새는 줄도 모른 채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눴다. 효공은 상앙을 너무 늦게 만났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에 상앙은 자신의 개혁 철학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학문을 하는 사람이 그 학문에 관해 의심을 가지면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어떤 행동이나 일에 대해 회의를 품어도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은 세상 사람들에게 배척당하기 마련입니다. 어리석은 사람과 진취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논의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에게는 그저 풍부한 수확을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지혜로운 견해는 세속과 늘 같지 않습니다. 크게 성공한 사람은 몇몇 사람과 일을 꾀하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의견을 묻지 않는 법입니다.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려면 철저한 개혁뿐입니다.”
 
효공은 타국 출신의 상앙에게 변법 개혁에 따른 전폭적인 지원과 권한을 주면서 계획과 진도에 따라 철저한 개혁을 실시하도록 했다. 당시의 용어로 이 개혁을 ‘변법(變法)’이라 했다. 기원전 361년 이 두 사람의 만남은 실로 ‘세기의 만남’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천하통일을 위한 첫걸음이기도 했다.
 
“모두 바꿔라”
상앙은 개혁을 위한 법령을 반포하기에 앞서 10m 높이의 나무 기둥 하나를 수도 역양 남문에다 세워놓고는 “이것을 북문으로 옮기는 사람에게 황금 10량을 상으로 준다”고 고시했다. 모두들 놀라움과 의아함에 머뭇거리자 그는 상금을 50량으로 올렸다. 어느 호기심 많은 청년 하나가 그냥 재미로 기둥을 옮겼더니 상앙은 진짜로 황금 50량을 그에게 상금으로 주었다. 이것이 상앙이 내디딘 개혁의 첫 걸음이었다. 그는 먼저 백성의 믿음과 존중을 얻은 정부라야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러 기록들을 종합해볼 때 상앙이 취한 개혁은 다음 11가지 구체적인 항목으로 귀납해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속된 말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다 바꾼다’였다.
 
1.백성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강제로라도 배우도록 했다.부모 자식과 형제자매가 한 부엌방에서 잠자지 못하며 반드시 방을 나누어 거처하게 했다.(부엌방이란 흙이나 벽돌로 쌓은 큰 침상을 말하는데, 아궁이가 설치돼 있어 겨울에는 불을 땔 수 있었다. 북방의 겨울은 매우 추웠기 때문에 한 가족이 모두 그 위에서 같이 잠을 자면서 몸을 데웠다.)
 
2.도량형 제도를 통일했다.전국적으로 같은 표준의 자와 저울, 그리고 됫박을 강제로 사용하게 했다.
 
3.지방정부의 체계를 세웠다.몇 개의 촌이 향을 이루고, 몇 개의 향이 현을 이루며, 현은 중앙정부에 직속되게 했다.
 
4.사회의 기초 조직을 세웠다. 10가를 하나의 조로 편성하여 서로 생산을 장려하고 행동을 감독하게 했다. 한 집이 법을 어기면 나머지 아홉 집은 죄를 지은 그 사람을 함께 검거할 의무가 있었다. 자기 조 이외의 다른 범죄 행위를 적발해 검거하면 적을 죽였을 때와 같은 정도의 후한 상을 받았다. 범인을 감추면 적을 감추는 것과 같은 중벌을 받았다.
 
5.모든 국민에게 정당한 직업을 갖도록 했다.세습귀족과 부유한 상인의 자제들을 포함한 놀고먹는 사람들이라도 적당한 직업에 종사하지 않으면 모두 노예로 삼아 변방의 황무지를 개간하도록 내보냈다.
 
6.후한 조건으로 이민을 장려했다.국적을 묻지 않고 진국에 와서 황무지 개간에 종사하는 사람에게는 9년 동안 토지세를 받지 않았다. 이는 인구 증가를 위한 조치였고, 인구는 곧 군대의 원천이다.
 
7.생산을 장려했다.농사와 옷감 짜기를 특별히 잘하고 양식을 많이 보관해둔 사람에게는 부역세와 노역을 면제해주었다.
 
8.한 집안에 성인 남자가 둘 있으면 강제로 분가하도록 했다.(이는 생산과 인구를 늘리는 수단이다).
 
9.사람들 사이의 다툼은 법정 재판을 통해 해결하도록 했다.개인적인 결투는 허용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결투한 사람에 대해서는 이유를 불문하고 처벌했다.
 
10.적과 싸우는 것은 1등 공적이었고, 상도 1등상을 주었다.
 
11.전투에서 공을 세운 사람은 반드시 승진시켜 주었다.지위가 높은 귀족이나 돈이 많은 부자라 하더라도 전공이 없으면 정부 관직을 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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