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칭기즈칸이 이끄는 몽골은 겨우 100만 명의 인구로 세계 최대 제국을 건설했다. 그가 정복한 지역은 현대 기준으로 30개국에 이른다. 그 면적은 현재의 북아메리카(미국, 캐나다, 멕시코)와 중앙아메리카를 합친 것보다 더 넓다.
칭기즈칸이 정복했던 지역에 현재 거주하는 인구는 30억 명.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13세기에는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칭기즈칸의 신민(臣民)이었다.
칭기즈칸은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않았던 800년 전에 이렇게 넓은 영토를 정복하고 효과적으로 지배했다. 더 놀라운 사실은 당시 몽골인은 고작 100만 명에 불과했고, 그들의 군대는 10만 명 남짓이었으며, 이 모든 정복 활동이 불과 25년 만에 이뤄졌다는 점이다.
8년간 몽골 답사 후 써낸 역작
이런 업적에 비해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칭기즈칸의 전략이나 전술, 성공의 비결을 밝히려는 노력은 너무나 미약했다. 수백 년 동안 칭기즈칸은 단순한 정복자나 ‘전설’ 정도로만 알려져왔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몽골인들이 지배자를 우상화하거나, 그 묘지를 성역화하지 않은 데 있었다. 심지어 칭기즈칸이 묻힌 자리조차 지금까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20세기 들어 몽골을 지배한 구소련이 민족주의를 말살하고, 칭기즈칸 연구를 철저히 금지한 데 있었다.
칭기즈칸에 대한 연구는 1990년 구소련의 몽골 지배가 끝나면서 비로소 본격화됐다. 미국의 인류학자 잭 웨더포드는 이후 8년간 몽골을 직접 답사하며 문헌과 실증을 통해 칭기즈칸의 생애와 몽골이 인류 역사에 미친 영향을 연구했다. 그 생생한 결과를 엮은 책이 이번에 소개하는 <칭기즈칸>이다.
명예보다 실리 선택
웨더포드는 서구 사회가 칭기즈칸에 대해 갖고 있던 기존 이미지(침략자이자 저돌적 야만인)에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다. 아울러 그는 몽골 제국이 13세기에 유라시아 세계를 하나로 통합했고, 이를 통해 ‘근대 세계 체제’로 가는 길을 서구보다 200년 먼저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웨더포드는 흥미롭게도 ‘위대한 전략’이 아닌 ‘신속하고 실용적인 실행’을 칭기즈칸의 가장 큰 성공 요인으로 꼽았다.
칭기즈칸은 싸움에서 명예보다 실리를 우선했고, 이를 위해 전투마다 새롭고 혁신적인 전술을 개발했다. 그는 정면 승부를 고집하지도 않았다. 싸움에서 명예를 찾지 않고, 어떻게든 이기는 것에서 명예를 찾았다. 적을 쫓아가서 죽이는 것이나, 도망치며 죽이는 것은 칭기즈칸에게는 차이가 없었다. 그는 어떤 때는 일부러 도망을 치며 귀중품들을 땅에 떨어뜨리기도 했다. 귀중품을 줍기 위해 전열이 흐트러진 적군은 칭기즈칸 군의 반격에 궤멸됐다.
칭기즈칸은 한때 그의 주군이었던 세력가 옹칸에 대항해 싸울 때 심리전을 활용하기도 했다. 옹칸 생포에 실패한 후 그는 ‘옹칸이 국경까지 도망치다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한 경비병에게 죽임을 당했으며, 그 수급은 다른 지역의 세력가인 타양칸에게 짓밟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적의 사기는 일시에 꺾여버렸다.
칭기즈칸의 실용주의는 폭넓은 개방성으로도 나타났다. 정복자로서 몽골의 최대 장점은 정복한 지역의 앞선 기술과 문화, 인재, 때로는 종교까지도 받아들이는 개방성에 있었다. 몽골은 이렇다 할 자체 과학기술이나 무기 체계가 없었지만, 외부의 자원을 편견 없이 받아들여 활용했다.
칭기즈칸은 탕구트와 싸울 때 중국의 공성 무기인 투석기를 접하게 됐다. 그는 즉시 중국인 기술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이들에게 큰 상을 내걸었다. 또 몽골군 안에 ‘기술 개발 부서’를 신설해 투석기의 성능을 향상시켰다. 이후 방어전의 핵심이던 두꺼운 성벽은 그에게 더 이상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칭기즈칸과 몽골은 아시아와 유럽을 하나로 연결해 새로운 상품과 문화를 창조했다. 유럽이 동양의 인쇄술과 나침반을 접하게 된 것도 칭기즈칸 덕분이다. 칭기즈칸의 가장 큰 경쟁력은 이처럼 문명과 문명을 연결함으로써 어느 쪽에도 없던 새로운 기술과 문화를 창조해낸 것이다.
피점령지 보호로 반란 막아
칭기즈칸의 실용주의는 제국 영토 유지에도 큰 도움이 됐다. 칭기즈칸이 광활한 영토를 효과적으로 경영하고, 심지어 그의 사후에도 큰 반란이 일어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피점령지에 대한 보호와 체계적인 관리에 있었다.
당시 피점령지의 주민은 죽임을 당하거나, 약탈당하거나, 노예가 됐다. 하지만 몽골은 자신들에게 반항했던 지배층은 확실히 응징하되, 서민들은 대법령 체계를 통해 받아들이고 약탈로부터 보호했다. 칭기즈칸은 요나라 출신 야율초재와 위구르인 진해 등 피정복민을 중용해 정복지를 안정시키기도 했다.
그는 또 유목민들에게 가장 흔한 분쟁인 납치혼, 가축 절도, 수렵에 대한 권리, 친자 문제 등에 대한 지침을 명확히 하고, 후계자는 반드시 공동 의사결정 기구인 쿠릴타이를 통해서만 결정하도록 함으로써 내분을 예방했다. 이런 조치를 통해 몽골은 칭기즈칸이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새로운 전투를 위해 떠나더라도 점령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적 기반을 갖췄다.
칭기즈칸은 무리한 정복 전쟁을 삼갔던 점에서도 실용주의자였다. 그는 어떤 나라나 부족을 점령한 후 바로 다른 곳으로 전장을 옮기지 않았다. 대신 그 지역의 물자와 인력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안정화시킨 후 다른 지역으로 진출했다. 잭 웨더포드는 “칭기즈칸은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욕망이 별로 없었으며, 다만 그때그때 필요한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고 평가했다.
기업 경영에 주는 교훈
최근의 기업 경영 환경과 고객 니즈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이 빠르게 변화한다. 경쟁사들은 혁신을 거듭하며 지속적으로 시장 구도를 바꾼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신상품 개발과 새로운 전략의 수립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필자는 이럴수록 ‘실행’이 더 중요해진다고 생각한다.
챌린저 그레이 앤 크리스마스(CG&C) 등 컨설팅 업체의 조사에 따르면, 1999년 9.7년이었던 미국 최고경영자(CEO)의 평균 임기는 2006년 8.3년으로 1년 반 가까이 짧아졌다. 더구나 일부 장수 CEO들을 제외하면, 하위 40%의 CEO들은 불과 1.8년 만에 자리를 내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최고재무책임자(CFO), 최고운영책임자(COO), 최고마케팅책임자(CMO)의 임기는 이보다도 짧아 각각 4.5년, 3년, 2년에 불과하다. 예전처럼 새 CEO에게 2, 3년의 ‘허니문 기간(회사 내부와 산업의 경쟁 구도를 파악하고 장기적인 전략을 세우는 데 필요한 시간)’을 주는 관행은 이제 없다.
이런 현상의 가장 큰 이유는 주주 구성과 투자 성향의 변화다. 지금은 사모펀드(PE) 등 단기간에 투자 이익을 실현하고자 하는 투자자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높아졌다. 게다가 이들은 예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경영에 관여한다. 여기에 소액 투자자들의 목소리까지 높아지면서 경영자들은 ‘보다 신속한 성과 향상’의 압력에 직면하게 됐다.
그렇다고 기업이 단기 이익에만 집중할 수는 없다. 지나친 단기 이익 추구는 기업의 영속성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기업의 경영진은 칭기즈칸처럼 지금 눈앞의 ‘전투’는 물론, 장기적으로 ‘전쟁’에서도 승리하기 위한 방안을 궁리할 필요가 있다. 그 요체는 눈앞의 경쟁에 전력을 쏟되 장기적인 시각을 잃지 않는 태도에 있다. 무리하게 욕심을 내 조직의 역량을 넘어서는 확장을 시도하지 않는 것도 경영자가 명심해야 할 포인트다.
특히 전략적으로 유연하고, 구태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속도와 실행을 중시하는 칭기즈칸 전법의 시사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현재 많은 기업들이 지나치게 복잡한 상품 구성이나 의사결정 구조 때문에 고통 받고 있다. 경영자는 민첩한 실행을 방해하는 모든 요인을 찾아내 없애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제로베이스에서 복잡성을 진단하고 효율화하는 조치가 가장 먼저 필요하다.
아울러 기업은 실용적이며 합리적인 성과 평가 지표를 갖춰야 한다. 칭기즈칸은 실제 전장에서 공을 세운 사람이나, 음지에서 조직을 위해 헌신한 사람을 정확히 찾아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포상했다. 제대로 된 성과 평가 지표라면 이렇게 실용적인 성과 측정이 가능해야 한다.
이 밖에 조직의 내부는 단순화하되 외부의 역량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활용했던 칭기즈칸의 개방성도 하루가 짧은 현대 기업 경영자들에게 큰 교훈이 될 것이다.